<나는 고수다>3편-인디언:정심편

게으르니
2016-07-0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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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장마가 7월로 면면히 흐르는 오후 한시  반

이층까페로 속속 모이신 방청객 여러분들^^

'고수다'의 우물쭈물 난상 수다가 문탁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을까요?

점점 고정 방청객들이 자리를 잡으시고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러 온 호기심파부터

시간 남아 자리 잡은 심심파

그리고 고수다의 고정들^^ 고전공방 동학들이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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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수다 주제발표자는 인디언의 '정심' 편!

<대학>의 3강령 8조목 중에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의 '정심' 네 번째 조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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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주자의 주석은 물론 주석에 붙은 세주까지 꼼꼼하게 원문을 해석해 나갔습니다.

고전에 관심 많은 뿔옹이 뭔가 적고 있는데  감이 좀 잡혔을까요^^?

 

정심은 성의 다음 단계(단계라는 이 표현은 계속해서 쟁점을 불러일으킵니다;;)라고 본다면

성의, 즉 마음을 진실하게 망동이 없게 했는데 그 마음을 또 바르게 한다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주자의 주석인 세주에서 제자 또한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주자는 성의 단계에서 마음을 진실하게 했음에도 외물과 응하면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으니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답니다.

이에 진실한 마음이 되었는데 또 치우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있었고

이번에 처음 오신 코스모스님은 마음의 그런 상태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고전공방 세미나 때도 제기 되었던 부류입니다.

 

8조목에서 성의와 정심을 따로 나눈 까닭과 또 정심과 수신은 붙어서 '정심수신'장 으로

불리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 궁구해야 할 질문입니다.

 

또 마음 즉 心의 해석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인디언의 해석을 따라가면 마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마음이 텅 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했고

그렇게 해석하면 불교에서 마음을 해석하는 것과의 차이점이 없지 않은가? 라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또 성의는 자신만이 아는 내밀한 곳에서의 기미를 살피는 성찰이라면

정심은 외물과 접했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나 라는 주체가 따로 있는 것처럼 들린다. 혼자만 아는 마음?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과 공존하는 것에서 반응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과 해석들이 고전공방 멤버들을 중심으로 오갔고

방청객들은 정확한 뜻을 파악하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대학 문장을 인용하는 듯하는 언사를 날리고 사라진 방청객도 있었다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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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다의 고정 방청객 달팽이의 강력한 주문이 있었습니다^^

3강령 8조목이라면서 .... 그렇다면 처음부터 차례차례로 설명해 주면 어떤가

이렇게 중구난방이면 듣는 관객 너무 헷갈리고 어렵다! 괴롭다!

 

'고수다'를 처음 기획했을 때는 원문 해석 중심의 세미나라 시간이 부족하니

개념을 좀 더 정확히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그러나 너무 무겁게는 말고 수다처럼!

어렴풋한 감만으로 시작했지요^^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친구들의 수다를 들으러 온 방청객들에게 마음이 가 닿네요^^

의리(?)와 예의만으로 계속 우리들의 수다와 함께 할 수 있을까?

한 시간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안에서

수다로 우리의 공부을 공유하는 것은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염려와 고민이 교차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학이당만의 닫힌 공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층까페로 문을 열고 나와 '고전의 향연' 으로 가는 길.

수많은 시행 착오와 어느 한 순간의 적중 사이를 유동하다보면

우리 모두 향연을 누리는 순간이 오겠지요^^?

그 길에 함께 하는 동학들, 친구들.

우리 서로 서로에게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위해 함께 전진해 주실꺼죠^^?

 

다음 7월 8일 오후 한 시반 이층까페에서

나는 고수다 4편: 진달래의 '지어지선'에서 뵙겠습니다^^

 

댓글 2
  • 2016-07-04 16:11

    어리둥절하고 어려웠지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고전공부에 대한 관심이 화~~악 생기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 2016-07-04 19:32

    나는 고수다...좋군요. 무엇보다 저한테 많은 공부가 되네요.

    사실 시간내서 따로 복습하는게 어려운데, 고수다 오기 전에 '명명덕'이면 '명명덕'부분 한번 읽고 오고, '정심'이면 '정심'부분 한번 읽고 오는데, 이게 예전 읽을 때와 또 다르더라구요.  <중용>을 읽으면서  <나는 고수다>에서 수다를 떨어가며 다시 읽어서일까요? 또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어요. 

     

    전 이번에 '정심수신장'을 읽으면서 새삼 그것이 '정심수신장'이라는데 더 주목하게 되었어요.

     즉 성리학, 혹은 사대부의 문제의식이 어쩌면 이 장에 있을지도 모른다고나 할까...ㅋㅋㅋ

     

     자기를 닦는 것(어지러운 세상에서 득도, 혹은 해탈하는 것) - 이것은 당대 사람들이 불교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였잖아요?

     그런데 주희는

    1)수신을 그 이후 제가,치국,평천하로 연결시켜, 수신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죠. 사회와 세상에 대한 관심. 선우후락!!. 사대부의 존재이유!!  그러나 동시에 

     2)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닦아야 가능하다는 것 역시 분명히 밝혔어요.(성의, 정심). 소위 주자의 내면주의. 혹은 엄격한 자기검열.  불교를 포섭해버린 거죠.

     

    이것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이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성인의 탄생을 기다릴 일이 아니라는 것. 생지안행하는 성인 대신 사대부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을 통해 모두가 경세제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니었을까요? 새로운 정치적, 윤리적 주체의 탄생! 정말 엄청난 거죠.

     

    피에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의'와 '정심'의 차이는 뭘까? 중용 1장에서 주희가 이야기한 '존양'공부 /'성찰'공부와 관련 있는 것 같긴 한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정심 읽다가 성의부분도 같이 읽었는데 지난번 제가 말씀드린 것, 틀린 것 같아요. <대학>과 <중용>의 신독이 다르다는 것. 다시 읽어보니 아닌 것 같아요. 둘 다 같은 것 같아요. ㅋㅋㅋ... 맨날 이랬다 저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