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탐구, 대안적 지성일까 문화적 타자일까? (아젠다 12호 / 20210520)
문탁
2021-05-20 12:47
185
얼마 전에 길드다 청년들과 일민미술관 전시에 다녀왔다. 사정인즉 이렇다.
일민미술관이 <운명상담소 : Fortune Telling>이라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길드다의 친구인 티슈오피스(청년 디자인 스타트업)에 이를 온라인으로 구현하는 게임형 모바일 전시 어플리케이션 ‘Fortune Telling Center’를 맡겼고, 티슈오피스는 그것을 게임으로 구현하면서 주제를 주역으로 잡았고, 그 게임에 들어갈 텍스트 (주역 괘 해설)를 길드다에 요청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길드다는 이 전시에 아주 부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또 어쩌다보니 “이런 신박한 청년들(길드다)”을 신기하게 본 일민미술관 측에서 새로 기획하는 온라인 전시 웹페이지에 글을 기고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무조건 한다” 였다. 운명에 대해 어떤 글을 쓸 것인가는 뭐 차차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일단 전시를 먼저 보자. 하여, 평생에 걸쳐 몇 번 가본 적이 없는 미술관을 이번에 가게 된 것이다. 반쯤은 의무방어전으로.
내가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젊은 시절을 한참 지나서였다. 고미숙샘 덕분에 우연히 사주명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유용했다. 처음으로 나의 신체적 운명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내가 왜 비위가 약한지 (난 편식이 심하고 그래서 늘 주변에서 놀림을 받는다^^) 왜 계속 넘어지고 발이 삐끗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에너지를 쓰는 패턴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본투비 오지라퍼구나. 그러니 사는 게 이렇게 고달프지.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살면서 끊임없이 남 탓, 세상 탓을 할 것인가? 사주명리를 공부한 이후 나는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바꾸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자기 구원’ 같은 단어가 비종교적 맥락 속에서 나에게 들어온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랬다! 사주명리, 그것은 한 마디로 아주 훌륭한 자기배려의 테크네이다.
명(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맹자를 공부하면서 명(命)에 대해 꽂혔다. 아마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그러니까 원하지 않았던 독박부양의 삶으로 내 인생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좀 당황했고 약간 억울했고 많이 고단했다. 그렇게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에게 운명에 대한 관심이란, 결과는 늘 의도를 배반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해나가는 과정이고, 내 노력이 즉시 인정받거나 당대에 보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고도 꾸역꾸역이 아닌 방식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어쨌든 운명탐구=늙은이의 지혜!
그러다보니 나는 미술 전시의 주제가 운명이라는 것도, 그 전시에 젊은이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청년들 사이에 사주명리나 타로가 엄청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문도 익히 들은바가 있었다. 운명과 청년이라,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전시는 1층과 2층에 나눠서 구성되어 있었다. <운명>이란 이름이 붙여진 1층엔 내가 익숙한 전형적인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회화, 조각, 비디오아트, 설치미술...뭐 이런 것. 도슨트(오디오 가이드)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를 누르고 순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방 따분해졌다. 작품들은 대체로 소박한데 도슨트의 해설은 너무 과했다. 무슨 미술을 말로 다 해? 그리고 운명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가 뭐 이리 어리고 가벼워? 하지만 삐쭉삐쭉 터져 나오는 그런 생각들을 서둘러 수습했다. 난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운명을 말하려면 적어도 박정자 정도의 톤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꼰대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소>라는 이름이 붙여진 2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난 다시 당황했다. 사주를 봐주기도 하고, 타로카드를 뽑기도 하고, 이름을 풀어서 부족한 오행기운을 채워주기도 한다는 부스들이 전시된 그곳은 매우 블링블링했고, 무엇보다 관객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들이었다. 아, 여기 뭐지? 여기 미술관 맞아? 아, 물론 무식해서일수도 있고 편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길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 사주포차를 미술관에 옮겨놓는다고 그것이 뒤샹의 <샘>처럼 자동적으로 ‘질문’을 낳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오행백신센터>(정윤선)를 체험한 우현의 전언에 따르면, 이름을 풀었더니 금(金)기운이 부족한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안내에 따라 하얀 천 안쪽의 의자에 앉아서 헤드폰을 썼더니 5분 내내 쇳소리가 들려나왔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박장대소를 했다.
운명에 대한 탐구든 영성에 대한 탐구든 그것은 근대 물질문명과 기술합리성 ‘너머’를 탐색하는 대안적 지성의 활동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거나 계산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는 것, (남성)인간을 만물의 척도의 지위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 그렇다고 종교적 도그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연의 총체인 무한한 우주를 경외하고 어떤 제한성 속에서 충실히 살아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목격한 것은 운명탐구가 대안적 지성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타자들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시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차이들을 생산해서 그것을 상품화하여 자신을 연명해나간다. 사주명리나 타로, 포춘 쿠키, 심지어 주역조차 지금 세상에서 탈영토화된 차이의 신상(新商)이 되어버렸다.
미술관을 나와서 길드다 청년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광화문 피맛골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고관대작을 피해 평민이나 하급관리들이 다녔다는 뒷골목길. 지금 거기엔 청년들이 넘쳐났고 탈영토화된 차이들이 득실거렸다. 한식, 일식, 중식, 퓨전을 지나 우리는 대만 우육면 집에 들어갔다. 우육면과 딤섬. 비쌌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맛이 없었다. 지루하고 피곤하고 살짝 우울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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