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자’를 아세요? (아젠다 11호 / 20210420)

문탁
2021-04-20 12:44
87

 

  난 이번 보궐 선거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왜? 서울(부산)시민이 아니니까. 핫, 썰렁. 농담이고, 서울시민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지리멸렬 정치소음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하여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선거 이야기는 빠르게 패스, 선거와 사회적 거리두기에 최선을!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 서울에 강의를 가는 길에 우연히 기본소득당 신지혜씨의 선거플랜카드를 봤다. 그녀의 공약은 ‘무상생리대’와 ‘미프진’ 공급이었다. 와, 간만에 신박하네. 갑자기 흥미가 솟구침. 그런데 미프진이 뭐지? 검색 결과 그건 먹는 낙태약이었다. 하하, 난 이제 진짜 꼰대구나. 그녀들 덕분에 그렇게 잠시 즐거웠다. 그것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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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선거에 대한 나의 관심은 선거가 끝난 후 오히려 증폭되었다. 바로 ‘이남자(이십대 남자)’ 때문이었다. 모든 언론에서 오세훈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이남자’를 꼽았다. ‘이남자’의 마음이, 무려 72.5%의 마음이 오세훈에게 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심?!에 대한 분석이 분분했다.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변심 이유가 궁금한 게 아니라 도대체 ‘이남자’가 누군지가 진짜 궁금했다. ‘이남자’는 내가 아는 남자인가? 내가 모르는 남자인가?

 

  일단 주변의 ‘이남자’들을 꼽아본다. 우선 길드다 청년들이 있다. (앗, 모두 ‘이남자’는 아니네~ ) 어쨌든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이들 셋, 그러니까 20대 초반인 우현과 30대 초반인 지원, 명식은 너무 다르다. 입맛도 다르고 연애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다르고 돈 쓰는 법도 다르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다르다. 물었다. 너희가 서울시민이었으면 누구에게 투표했을 것 같니? 명식과 우현은 투표를 안했을 것 같다고 하고 지원은 오태양한테 했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난 안다. 명식이가 투표를 안 한 이유와 우현이가 투표를 안 한 이유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차마 여기에 그 이유를 쓰지는 못하겠다)

 

  음, 또 내 주변의 ‘이남자’는 누가 있을까? 앗, 악어떼1)1기 졸업생들이 있다. 시설에서 자랐고 지금은 사회복지사 혹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LH임대주택에서 거주하는 그 녀석들은 박근혜를 욕하면서 문재인에게 투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재인에게도 등을 돌렸다. 이유는? 젠더이슈였다. (이 정부가 여자들한테만 잘해준다는 것이다. ㅠ)

 

  앗, 아들이 있구나. 20대는 아니고 30대 초반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문재인 정부 욕을 하기 시작한 아들. 이유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부동산 정책을 포함하여 산적한 현안 (이 현안은 방역, 민생, 개혁 등을 모두 포함한다.)을 해결하는데 이 정부가 너무 무능하고 무기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 조카들도 있네. 막 스물이 된 녀석과 20대 후반인 녀석. 한 녀석은 중, 고등학교 내내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밤에는 게임만 하고, 그러다가 ‘현피’ 떠서 코뼈 부러지고, 학교에서 말썽 피우다가 퇴학 직전에 자퇴했는데, 이제 스물이 되어서 투표권이 생긴 이 아이가 투표를 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인 그 애의 형은? 나름 잘 나가는 뮤지션인데 그 애의 특징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이 둘의 구별도 잘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남자’는 누구일까?

 

KakaoTalk_20210418_173137245_03.jpg한겨레21 1358 中 (2021년 4월 9일자)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포함, 아무리 손에 꼽아도 내가 자주 만나는, 구체적인 관계가 있는 ‘이남자’는 스무 명이 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연령(20대 초반과 20대 후반의 감각은 진짜 다르다)에 따라, 부모의 백그라운드에 따라 (악어떼 친구들은 부모가 없다), 직업의 유무에 따라 (누군가는 기를 쓰고 취직을 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임노동 밖에서 살아보려고 애쓴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관심 (연애냐, 게임이냐, 공부냐, 비트코인이냐, 서학개미냐)에 따라 경험과 감정의 차이가 크다. 내 아들과 명식, 내 조카와 우현, 지원과 악어떼는 공통점이 정말 적다.

 

  그렇다면, 즉 미시적 차이가 득실득실한 이들이 ‘이남자’로 묶여 하나의 집단인 것처럼 재현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의 정세에서는 “‘이남자’는 촛불세대이고 진보의 아이콘이고 문재인 정부 탄생의 주역인데 왜 갑자기 돌아섰지? 이들을 다시 돌려세우지 않으면 차기 집권은 성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집권여당의 절박함이 이 담론의 추동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남자’는 촛불세대이고 진보의 아이콘이고 문재인정부 탄생의 주역이라는 분석은 과연 맞는 분석일까? 왜 우리들은 어느 시대나 노인들은 보수적이고 청년들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만하임이라는 사회학자는 이미 90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세대 연구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가정, 즉 청년 세대는 진보적이며 구세대는 그 자체로 보수적이라는 가정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은 없다. 최근의 경험을 돌아보면, 옛 자유주이 세대가 청년들 중의 어떤 파들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진보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청년들이 보수적일지, 반동적일지, 진보적일지는 현존 사회구조와 그 구조 안에서 청년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청년 자신들의 사회적 목적들과 지적 목적들의 촉진에 기여할지 안 할지에 달려 있다...청년과 나이 같은 생물학적인 요소들은 명백한 지적 또는 실천적 성향과 아무 관련이 없다. (즉 청년은 자동적으로 진보적인 태도와 상호 연관될 수 없다.)” 

- 만하임, 『세대문제』, 전상진, 『세대게임』, 문학과 지성사, p37에서 재인용

 

 

  한마디로 이남자=청년=진보라는 전제 자체가 허구적,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가 계속 되는 이유를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게임’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분석한다. ‘세대 게임’이란 “그에 참가한 사람들이 세대를 이뤄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활동과, 게임의 판을 짠 집단들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대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경쟁이나 싸움을 부추기는 움직임”(위의 책, 310)이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를 빠르게 설명하고 누굴 지지해야 하는지 누굴 비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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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스스로 젊은 진보라 자칭하며 내년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모병제와 여성군사훈련(남녀평등복무제)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국방이슈와 젠더이슈에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남자들에게 누굴 비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세대게임의 최강플레이어로 등장한 것은 혹시 아닐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시 선거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남자’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이남자’를 아시는가? 혹시 만난 적이 있으신가? 그는 키가 큰가? 잘 웃는가? 화가 나 있나? 아니 ‘이남자’는 실존 인물인가?

 

  ‘이남자’는, 어떤 점에서는, 즉 72.5%라는 어떤 감정(“아, 엿 같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실존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감정은 변화무쌍하며 이 감정들의 맥락은 통약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전상진의 말대로 세대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대’는 불필요한 개념일까? ‘세대 게임’ 밖에서 세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과연 ‘청년우쭈쭈’ 혹은 ‘청년개새끼’ 담론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일까? 한참을 그런 생각 속을 헤매다가 불현듯 깨달음.

 

  어쩌면 청년이 아니라 나(의 세대)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대 프레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내가 나(의 세대)를 떠날 수 있느냐는 것을 묻는 게 아닐까? 내가 나의 세대의 정체성을 내파하고 시간을 횡단, 종합하는 존재성을 다시 구성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닐까? 내가 늙지도 젊지도 않을 때 (아니면 이 둘의 시간대를 빠르게 왕복 주파할 수 있을 때) 그럴 때만이 내가 만나는 다양한 청년들 모두가 나의 “소중한 타자”2)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 SF소설을 읽어서인지 이런 SF같은 생각만 자꾸 든다. ㅎ

 

  피에쑤 :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내가 아는 규문의 청년들, ‘이남자’^^들은 이번에 어디에 투표했을까? 

 

 

 

 

각주 :

 1) <악어떼프로젝트>는 문탁네트워크가 <성심원>이라는 지역청소년복지시설에 거주하는 10대들과 꾸리는 인문학프로그램의 이름이다. 201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기, 2기, 3기 이렇게 세 번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  ‘소중한 타자성’은 도나 해러웨이가 <반려종선언>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그녀는 이 용어를 그녀와 그녀의 반려견이 (인간과 개가 아니다^^) 이 딥키스를 통해 유전물질을 수평으로 전달하고 또 어질리티게임을 통해 서로를 훈련시키며 함께 사는 동반자적 관계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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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1.06.11 | 조회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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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1.06.08 | 조회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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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길드다 청년들과 일민미술관 전시에 다녀왔다. 사정인즉 이렇다.      일민미술관이 <운명상담소 : Fortune Telling>이라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길드다의 친구인 티슈오피스(청년 디자인 스타트업)에 이를 온라인으로 구현하는 게임형 모바일 전시 어플리케이션 ‘Fortune Telling Center’를 맡겼고, 티슈오피스는 그것을 게임으로 구현하면서 주제를 주역으로 잡았고, 그 게임에 들어갈 텍스트 (주역 괘 해설)를 길드다에 요청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길드다는 이 전시에 아주 부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또 어쩌다보니 “이런 신박한 청년들(길드다)”을 신기하게 본 일민미술관 측에서 새로 기획하는 온라인 전시 웹페이지에 글을 기고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무조건 한다” 였다. 운명에 대해 어떤 글을 쓸 것인가는 뭐 차차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일단 전시를 먼저 보자. 하여, 평생에 걸쳐 몇 번 가본 적이 없는 미술관을 이번에 가게 된 것이다. 반쯤은 의무방어전으로.          내가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젊은 시절을 한참 지나서였다. 고미숙샘 덕분에 우연히 사주명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유용했다. 처음으로 나의 신체적 운명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내가 왜 비위가 약한지 (난 편식이 심하고 그래서 늘 주변에서 놀림을 받는다^^) 왜 계속 넘어지고 발이 삐끗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에너지를 쓰는 패턴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본투비 오지라퍼구나. 그러니 사는 게 이렇게 고달프지.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살면서 끊임없이 남 탓, 세상 탓을 할 것인가? 사주명리를 공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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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1.05.20 | 조회 180
지난 연재 읽기 해완이의 쿠바통신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돌파구를 찾아서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M은 인생을 다시 계획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 년 간의 긴 투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M은 아버지가 쉰 살에 얻은 막둥이였고, 이미 가정을 꾸린 다섯 명의 손위형제들은 오 년 전 병 구환을 도맡을 사정이 안 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결국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M이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처음에는 슬픔과 당혹감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곧 틀에 박힌 일상이 모든 것을 덮었다. 어떤 마음이든 일상에 편입되면 얼마간은 무감각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자 갑자기 자유가 찾아왔다. M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전환기, 그는 돈 벌기와 병 구환에만 몰두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뺀 모두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 듯했다. 물론 M의 생존력은 어떤 친구들보다도 강했다. 그는 소소한...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돌파구를 찾아서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M은 인생을 다시 계획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 년 간의 긴 투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M은 아버지가 쉰 살에 얻은 막둥이였고, 이미 가정을 꾸린 다섯 명의 손위형제들은 오 년 전 병 구환을 도맡을 사정이 안 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결국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M이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처음에는 슬픔과 당혹감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곧 틀에 박힌 일상이 모든 것을 덮었다. 어떤 마음이든 일상에 편입되면 얼마간은 무감각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자 갑자기 자유가 찾아왔다. M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전환기, 그는 돈 벌기와 병 구환에만 몰두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뺀 모두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 듯했다. 물론 M의 생존력은 어떤 친구들보다도 강했다. 그는 소소한...
관리자
2021.05.19 | 조회 402
지난 연재 읽기 지원의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파지사유 공사일지: 공간은 무엇으로 공간이 될까요?     “잡동사니에 대한 강조가 가장 중요하다. 도시란 바로 이런 것, 즉 서로를 보완하고 지탱해주는 잡동사니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얽히고설킨 질서는 여러모로 대단히 경이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호 의존하는 여러 용도들의 생생한 집합체, 이런 자유와 이런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안타까운 공간   공간 디자인을 시작한 뒤로, 나는 어떤 공간이든 한 번씩 더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식당이든 카페든 사적인 공간이든 공적인 공간이든, 나는 그곳을 ‘공간’으로써 본다. 친구의 집은 한편으로 그냥 친구의 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점에선 ‘잘 계획된 공간’, 어떤 점에선 ‘디자인되지 못한 공간’이다. 후자의 시선으로 볼 때, 나는 내가 디자인을 하면서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는지,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나쁜지 분석한다.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것을 지양해야할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눈을 가지고 보면, 많은―어쩌면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공간들이 잘 계획되어있지 못하다. 거의 모든 공간들이 ‘되는대로’ 만들어져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들은 우리의 생활, 우리의 일상과 관계없이 만들어져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춘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에 맞추어 산다. 상업 공간 역시 크게 다르지...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파지사유 공사일지: 공간은 무엇으로 공간이 될까요?     “잡동사니에 대한 강조가 가장 중요하다. 도시란 바로 이런 것, 즉 서로를 보완하고 지탱해주는 잡동사니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얽히고설킨 질서는 여러모로 대단히 경이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호 의존하는 여러 용도들의 생생한 집합체, 이런 자유와 이런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안타까운 공간   공간 디자인을 시작한 뒤로, 나는 어떤 공간이든 한 번씩 더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식당이든 카페든 사적인 공간이든 공적인 공간이든, 나는 그곳을 ‘공간’으로써 본다. 친구의 집은 한편으로 그냥 친구의 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점에선 ‘잘 계획된 공간’, 어떤 점에선 ‘디자인되지 못한 공간’이다. 후자의 시선으로 볼 때, 나는 내가 디자인을 하면서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는지,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나쁜지 분석한다.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것을 지양해야할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눈을 가지고 보면, 많은―어쩌면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공간들이 잘 계획되어있지 못하다. 거의 모든 공간들이 ‘되는대로’ 만들어져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들은 우리의 생활, 우리의 일상과 관계없이 만들어져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춘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에 맞추어 산다. 상업 공간 역시 크게 다르지...
지원
2021.04.25 | 조회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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