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난잡한 돼지'들'

경덕
2023-08-22 04:42
399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난잡함이 지나쳐 찢어진 가랑이를 수습하느라 하반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다.

 

 

 
 
난잡한 돼지'들'
 
 
돌봄, 중단
 
지난 한 달 동안 돼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돌봄 1주년을 앞두고 나는 무모 님에게 7월 돌봄을 쉬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7월에 많은 일이 몰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 나는 문탁네트워크 안팎으로 여러 세미나를 신청했고 소개에도 적었다시피 '난잡한 공부'를 '체질'로 선언하며 호기롭게 한 해를 시작했다. 몇몇 샘들의 응원, 격려, 경악, 걱정이 이어졌고, 문탁샘은 "경덕...2023은 빡세게 공부하는 해? 주역에 불교로 기본기를 다지고 양생프로젝트 당대철학으로 문제의식을 벼리고...아주 좋네, 좋아!!! (그런데 너, 연말에 가랑이 찢어지겠다. 크하하핫)" 라고 댓글을 남기셨다. 그런데 상반기를 결산하는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연말이 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피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했던가..?) 어떻게든 잘 수습하기 위해 발표가 몰린 7월에는 돌봄을 쉬고 일을 조정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상반기 공부를 마무리했다. (찢어진 나의 가랑이는 서서히 아물고 있다.)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하루에 두 번씩 밴드에 올라오는 일지로 돼지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 비인간 동물들은 폭염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더위가 극심할 때는 대형 얼음을 주문해서 진흙탕 옆에 두거나 조각 얼음을 간식으로 주기도 했다. "새벽, 잔디에게 큰 얼음을 배달받아서 줬어요. 새벽이는 좋아하는데 잔디는 코로 얼음을 눌러보다가 몸에 살짝 닿으면 흠칫흠칫 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y활동가) 돌봄 활동가들도 더위 때문에 힘겨워했다. 새벽이생추어리까지 도보로 꽤 걸어야 해서 푹푹 찌는 날씨에는 도착하자마자 체력이 많이 소진되기 때문이다. 가장 더울 때 돌봄을 쉬고 있는 나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공부를 핑계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쉬기로 한 이유가 공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연재에 "아침잠이 많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잠에서 깨고, 그리 무겁지 않은 걸음으로 가서, 고양된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적었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돌봄에 익숙해지고 밥 주고 똥 치우는 일에 능숙해졌음에도 그랬다. 나는 돼지와의 비대면 기간을 가지면서 나의 신체 증상을 살피고 돼지와 만나지 않는 나의 일상을 점검하는 기간을 갖고 싶었다.
 
 
 
J와의 만남
 
의외의 일이 있었다. 데이트 어플로 누군가 나에게 대화 신청을 한 것이다. 충동적으로 가입했지만 소개글만 간략히 적고 방치해두었던 어플이었기에 더 의외였다. 대화를 신청한 상대는 J님이었다. J님은 내 소개글에서 '동물과 관련된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J님은 비건이고 유기견 봉사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마침 그 다음주에 열리는 개식용 반대 집회에서 처음으로 만나기로 했다. 집회에서 우리는 "Dog Meat Free Korea"라는 피켓을 들었다. 맞은 편에는 개식용의 자유를 외치는 육견협회의 맞불 집회가 있었다. 덥고 소란스러워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첫 만남을 집회 현장에서 가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후에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비건 식당과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새벽이와 잔디를 소개하며 새벽이생추어리 이야기를 전했다. J님은 흥미로워하며 후원도 하고 싶다고 했다. 무모 님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 김고은>을 선물하고 싶어서 가방에 챙겨갔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이미 구입해서 흥미롭게 읽었다고 했다. (책은 다시 고이 가져갔다.) 이후에 나는 <구조할 권리>라는 강연을 신청했는데 J님에게도 공유했다.
 
 
J님은 주말에 일이 있어서 나 혼자 다녀와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강연 후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전에 새벽이생추어리 모임을 했던 비건 식당에서 만나 깻잎페스토리조또와 뇨끼를 주문했다. 나는 강연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J님에게 잘 전하고 싶었는데 전문 용어가 많고 법적인 절차를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워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어떤 '구조'는 '권리'로 인정될 수 있고 새벽이와 잔디 역시 마땅한 권리로 구조된 것이다, '권리'에 대한 상상력이 훨씬 더 확장될 수 있다면 그만큼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바뀌게 되지 않을까, 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에 우리는 한동안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았는데도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가기>라는 행사에서 나란히 앉아있었던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어느 타이밍에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 보고 빵 터졌고, 이런 우연이 말이 되는 건가 싶어서 얼떨떨했다. 행사 패널은 '섭식장애인식주간' 때 만났던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박지니님과 <섭식장애건강권연대>의 이선민 님이었고, 사회는 <섭식장애건강권연대> 여름 님이 봐주셨다.
 
J님은 자기도 섭식장애 당사자라고 고백했다.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굳이 밝히지 않았는데 이런 데서 또 보다니요,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리블러썸 국화차 한봉지를 내게 선물로 건내주었다. "상큼한 레몬, 히비스커스 그리고 국화의 만남, 비타민으로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에너지 넘치는 하루를 시작해보세요."(제품 설명 중)  우리는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J님은 가방에 달려있는 무지개 고리를 보여주며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다고 자랑했다. 퀴어운동을 하는 어떤 분과 만났을 때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7월 1일에 있었던 퀴어퍼레이드와 노프라이드 파티에 대해 이야기했다. J님은 8월에 모집하는 비질에 혹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안그래도 가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다음 번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J님은 이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직접 보기 전과 후가 많이 달랐다고 했다. 나는 "도축장에서 돼지들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어떤 경험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아요. 가장 폭력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 새벽이와 잔디를 만난다면.... 구조되지 못한 돼지의 얼굴과 구조된 돼지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다면.... 하지만 새벽이와 잔디가 구조된 돼지라는 수식어 외에 더 많은 수식어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구조 이후의 삶을 통해 '죽여도 되는 동물'이라는 인식에 저항하고 있고,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남이 거듭될수록 불꽃이 튀거나 에로스적 관계로 가까워지기 보다는 느슨하지만 꽤 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상대로, 우연히 만나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서로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오래 만나왔던 친구들과 멀어지고 다양한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 만나는 친구에는 인간 비인간 할 것 없었다. 그 관계는 미래를 약속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기 보다 서로가 얽혀 있는 연결망을 통해 우발적으로 만나고,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언젠가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사이에 가까웠다. 그날에도 우리는 또 만날 날을 궁금해하며 기약 없이 헤어졌다.
 
 
돼지'들'
 
돼지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돼지는 틈만 나면 내 앞에 나타났다. 무심코 지나는 길가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식물이 보였다. 환삼 덩굴이었다. 생태계 교란종으로 찍힌 흔해 빠진 잡초를 보면서 나는 새벽이 간식이 지천에 깔려있네, 저걸 한아름 따다가 새벽이에게 주면 걸걸걸 하고 좋아하겠네, 하고 생각했다. 집 근처 정육점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앞에 세워져 있는 돼지 피규어 앞에서 멈칫한다. 빙긋 웃고 있는 돼지 피규어와 그 뒤로 늘어져 있는 고깃덩어리들 앞에서 또 멈칫. 인스타 스토리를 무심코 넘기다가 가까운 지인이 올린 스테이크 사진에서 멈칫. 새벽이 생추어리 활동가가 공유한 도살장의 돼지들 사진에서 다시 멈칫. 돼지를 만나지 않아도 도처에 돼지가 있었다. 그 때의 돼지는 새벽이와 잔디라는 개별 존재 뿐만 아니라 그들과 접촉한 존재들, 구조되지 못한 존재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들,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실천하는 '우리' 존재들이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는 새벽이와 잔디를 돌보고, 돼지와 밀접 접촉하고, 돼지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수치와 위협을 함께 느끼며, 돼지와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난잡한 돼지'들'이라고.
 
 
 
 
다시, 돌봄
 
지난 주부터 다시 돌봄을 시작했다. 한 달 여만의 돌봄이어서 새벽이와 잔디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큰 차이는 없었다. 둘은 무더운 여름을 꽤 잘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생추어리 풍경도 많이 변했다. 여기 저기 풀이 엄청 자라있었고 사람 키만큼 무성한 곳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새벽이의 동선도 바뀌었고 똥을 누는 장소도 달라졌다.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렀고 갈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그럼에도 기분은 꽤 괜찮았다. 아, 다시 왔구나. 돌봄은 멈추지 않는구나. 새벽이생추어리의 많은 존재들이 지금, 여기 살아있구나. 쉬는 동안에도 사진과 일지로 소식을 확인했지만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이 되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우리가 얽혀있는 난잡한 그물망을 더 예민하게 감지할수록, 나란 존재도 안심이 되었다.
 
댓글 8
  • 2023-08-22 06:23

    돌봄은 멈추지 않는구나~~ 이 말이 훅 다가오네요^^ 나는 뭘 돌보고 있니? 생각해보게 하네요.

  • 2023-08-22 15:05

    오래 하셨지요? 이 어려운 일을... 느슨한 많은 연결.. 연대와는 좀 다르게 다가오네요.
    몸이 따라오지 않을 때 의욕도 약속도 다 부담이 되어버리더라구요.
    여름 바깥일은 만만히 보면 큰코 다치지요. 비타민B군... B12는 특히 챙겨드세요. 다른거 드시면 B12만 따로있는거 .. 조심스레.. 흡수율 좋은것으로 추천해봅니다.
    https://kr.iherb.com/pr/source-naturals-vegan-true-methylcobalamin-vitamin-b-12-cherry-1-mg-60-lozenges/64700

  • 2023-08-22 16:11

    난잡한 돼지‘들’로 살고 있는 경덕과 그 세대들이 보여 온다고 할까요?
    낯설은 지점이 없진 않지만 좋은 삶의 모습들입니다!

  • 2023-08-22 20:16

    책에서 새벽이가 환삼덩굴을 좋아한다는 글을 본 이후로 환삼덩굴을 볼 때면 제 옆에도
    늘 새벽이가 있었어요. ^^

    그나저나 이제 탈 난 속은 괜찮으신 건지...
    물론 제일 궁금한 건 이후로 J님을 다시 만나신 건지... (완전 궁금ㅎㅎ)
    그 이야긴 만나서 듣는 걸로!

  • 2023-08-23 09:44

    난잡한 돼지'들' 중 한명인 경덕님을 알아서 감사하군요.^^

  • 2023-08-24 08:21

    환삼덩굴로 페스토를 만들고 그걸로 스파게티를 해먹었어요.
    참 맛있더군요. 새벽이도 그 맛난 풀을 좋아하는군요.
    만난적은 없지만 식구 같네요. ㅋㅋㅋ

  • 2023-08-24 18:12

    환삼덩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한 새벽이인데...
    경덕님 자꾸 속이 탈나서 걱정돼요
    괜찮은 얼굴로 곧 보자요^^

  • 2023-09-09 10:59

    완전 꼰대 같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은 좀 멋지네요.
    제가 경덕님만 했을 땐 그저 못난 사람들만을 상대로 싸웠지,
    좀 더 다른 종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해봤었는데....

조은의 강정에서 살아남기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그동안 피하던 주5일 일을 단기로 하게 되어서 고단하고 부지런한 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다.         강정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강정에 처음 왔을 때를 빼먹을 수가 없다. 작년 4월, 3개월짜리 강정살이 프로그램인 피스파인더를 위해 강정에 왔다. 매일은 꽉 찬 스케쥴로 소화해내느라 당시에는 너무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시간들 중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은 그 순간들을 나누고자 한다. (*친구들의 이름은 아무말이나 가져다썼다)         1. 2022.6.12 pm 3:45   우리는 새방밧이라는 공간에 살았다. 2층짜리 컨데이너 하우스이고, 화장실, 주방, 사무실, 방이 다 다른 컨테이너에 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은 하루종일 화장실가기 참기 챌린지였다. 이런 공간에서 열명 정도가 함께 생활을 했다. 매일 저녁에는 당번을 정해서 밥을 같이 먹었지만, 주말은 자유였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밖으로 많이 나갔다. 평일에는 바빠서 가지 못한 맛집이나 관광지를 가기도 했고, 육지에서 온 친구와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주말의 새방밧은 조용했다. 주말에는 거의 나와 친구 둘뿐이었다. 비도 조금 왔던 것 같다. 어쩐지 분위기가 우중충했고, 몸은 새방밧 사무실 소파에 가라앉아있었다. 조용한 새방밧을 만끽하기에 사무실 소파만한 곳이 없었다. 한 친구는 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하루종일 밖을...
              조은 5년 동안 현민, 시윤, 민서, 동희와 함께 동천동에서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다. 10년을 살던 마을을 떠나, 2월부터 강정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그동안 피하던 주5일 일을 단기로 하게 되어서 고단하고 부지런한 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다.         강정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강정에 처음 왔을 때를 빼먹을 수가 없다. 작년 4월, 3개월짜리 강정살이 프로그램인 피스파인더를 위해 강정에 왔다. 매일은 꽉 찬 스케쥴로 소화해내느라 당시에는 너무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시간들 중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은 그 순간들을 나누고자 한다. (*친구들의 이름은 아무말이나 가져다썼다)         1. 2022.6.12 pm 3:45   우리는 새방밧이라는 공간에 살았다. 2층짜리 컨데이너 하우스이고, 화장실, 주방, 사무실, 방이 다 다른 컨테이너에 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은 하루종일 화장실가기 참기 챌린지였다. 이런 공간에서 열명 정도가 함께 생활을 했다. 매일 저녁에는 당번을 정해서 밥을 같이 먹었지만, 주말은 자유였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밖으로 많이 나갔다. 평일에는 바빠서 가지 못한 맛집이나 관광지를 가기도 했고, 육지에서 온 친구와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주말의 새방밧은 조용했다. 주말에는 거의 나와 친구 둘뿐이었다. 비도 조금 왔던 것 같다. 어쩐지 분위기가 우중충했고, 몸은 새방밧 사무실 소파에 가라앉아있었다. 조용한 새방밧을 만끽하기에 사무실 소파만한 곳이 없었다. 한 친구는 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하루종일 밖을...
조은
2023.08.26 | 조회 380
먼불빛의 웰컴 투 6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먼불빛
2023.08.24 | 조회 311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난잡함이 지나쳐 찢어진 가랑이를 수습하느라 하반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다.         난잡한 돼지'들'     돌봄, 중단   지난 한 달 동안 돼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돌봄 1주년을 앞두고 나는 무모 님에게 7월 돌봄을 쉬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7월에 많은 일이 몰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 나는 문탁네트워크 안팎으로 여러 세미나를 신청했고 소개에도 적었다시피 '난잡한 공부'를 '체질'로 선언하며 호기롭게 한 해를 시작했다. 몇몇 샘들의 응원, 격려, 경악, 걱정이 이어졌고, 문탁샘은 "경덕...2023은 빡세게 공부하는 해? 주역에 불교로 기본기를 다지고 양생프로젝트 당대철학으로 문제의식을 벼리고...아주 좋네, 좋아!!! (그런데 너, 연말에 가랑이 찢어지겠다. 크하하핫)" 라고 댓글을 남기셨다. 그런데 상반기를 결산하는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연말이 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피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했던가..?) 어떻게든 잘 수습하기 위해 발표가 몰린 7월에는 돌봄을 쉬고 일을 조정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상반기 공부를 마무리했다. (찢어진 나의 가랑이는 서서히 아물고 있다.)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하루에 두 번씩 밴드에 올라오는 일지로 돼지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 비인간 동물들은 폭염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더위가 극심할 때는 대형 얼음을 주문해서 진흙탕 옆에 두거나 조각 얼음을 간식으로 주기도 했다. "새벽, 잔디에게 큰 얼음을 배달받아서 줬어요. 새벽이는 좋아하는데 잔디는...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난잡함이 지나쳐 찢어진 가랑이를 수습하느라 하반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다.         난잡한 돼지'들'     돌봄, 중단   지난 한 달 동안 돼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돌봄 1주년을 앞두고 나는 무모 님에게 7월 돌봄을 쉬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7월에 많은 일이 몰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 나는 문탁네트워크 안팎으로 여러 세미나를 신청했고 소개에도 적었다시피 '난잡한 공부'를 '체질'로 선언하며 호기롭게 한 해를 시작했다. 몇몇 샘들의 응원, 격려, 경악, 걱정이 이어졌고, 문탁샘은 "경덕...2023은 빡세게 공부하는 해? 주역에 불교로 기본기를 다지고 양생프로젝트 당대철학으로 문제의식을 벼리고...아주 좋네, 좋아!!! (그런데 너, 연말에 가랑이 찢어지겠다. 크하하핫)" 라고 댓글을 남기셨다. 그런데 상반기를 결산하는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연말이 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피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했던가..?) 어떻게든 잘 수습하기 위해 발표가 몰린 7월에는 돌봄을 쉬고 일을 조정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상반기 공부를 마무리했다. (찢어진 나의 가랑이는 서서히 아물고 있다.)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하루에 두 번씩 밴드에 올라오는 일지로 돼지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 비인간 동물들은 폭염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더위가 극심할 때는 대형 얼음을 주문해서 진흙탕 옆에 두거나 조각 얼음을 간식으로 주기도 했다. "새벽, 잔디에게 큰 얼음을 배달받아서 줬어요. 새벽이는 좋아하는데 잔디는...
경덕
2023.08.22 | 조회 399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현민
2023.08.18 | 조회 514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문탁
2023.08.10 | 조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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