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토용
2023-06-01 22:15
269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뜬금없는 행복

얼마 전 문탁 점심에 연잎밥과 장아찌를 비롯한 여러 반찬들, 디저트로 사과정과, 오디정과가 차려졌다. 동은이가 주방에 들어와 차려진 상을 보더니 “행복해!”라고 외쳤다. 순간 ‘별게 다 행복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꽤 무거운데, 동은이에게는 한없이 경쾌하고 가볍게 쓸 수 있는 말이라는게 신기했다. 동은이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와 좀 의아했다. 윤리학 책에 갑자기 웬 행복론?

 

행복은 보통 처한 현실에 비추어 결여된 것이 충족되었을 때 특별하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병이 들었을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 여기고, 가난한데 로또라도 맞으면 최상의 행복을 느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를 얻었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뭔가 얻기 힘들고 어려운 것을 해냈을 때 느끼는 최고조의 감정 상태가 행복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소확행’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행복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만족, 기쁨과 같은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뭐가됐든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단순히 감정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간의 삶에서 최종적인 목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를 묻는다. 인간에게 좋음은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 속에서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좋음이다. 좋음에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좋음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좋은 것이 있다. 부, 권력, 명예, 쾌락 등은 수단으로서의 좋음이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 즉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소유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성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지혜로써 사리를 비춰보고 고요한 마음으로 삶을 음미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관조의 활동이 가장 즐겁고 자족적이며 완전한 행복이다.

관조적 활동은 인간의 모든 활동들 중에서 신의 활동을 가장 많이 닮은 것으로 가장 행복한 활동이다. 그리고 행복은 신이 내린 최선의 선물이다.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eudaimonia인데, eu는 잘, daimon은 신적 존재를 뜻한다. 행복은 신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에우다이모니아에 그 의미가 그대로 들어있다.

 

행복은 미덕을 타고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알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식물, 동물과 공통적인 부분을 빼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 남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고유의 기능을 이성적인 원리를 따르거나 이성적인 원리를 내포하는 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미덕으로 행위를 잘 수행한다. 인간의 좋음은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며, 이러한 혼의 활동은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행복이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기 때문에 미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행복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미덕은 아레테(arete)로 탁월함을 뜻한다. 이정우 선생은 미덕의 일차적 의미가 영혼의 힘이라고 했는데, 행복을 영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영혼의 활동 즉 이성의 활동이라고 할 때 아레테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미덕은 “그것을 지닌 것이 좋은 상태에 있게 해주고 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덕에는 지적인 미덕과 도덕적인 미덕이 있다. 지적인 미덕은 교육을 통해서 또는 성장함에 따라 생기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미덕이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용기, 절제, 정의, 우애, 자제력, 자부심, 온유함, 진실성, 재치 등의 도덕적 미덕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받아들여 습관화해야 한다. 미덕들은 부단한 노력과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좋은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기술자, 연주자가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기술과 연주력을 연마하듯이 도덕적인 올바른 행동도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실천을 통해 습관화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동양의 쇄소응대와 굉장히 비슷한 것 같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아침에 또는 단기간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덕의 원리, 중용

행복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이며 미덕에 걸맞은 고상하고 훌륭한 활동이다. 그런데 이 미덕들은 모자람과 지나침에 의해 손상이 된다. 음식을 먹을 때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적게 먹으면 탈이 나듯이 절제와 용기 등과 같은 미덕도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손상이 된다. 한마디로 과유불급.

 

이 미덕이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 상태이다. 중용은 적정량, 적당함을 뜻한다.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예를 들면 두려움과 자신감에서 중용은 용기이다. 자신감에 지나치면 무모하고, 두려움이 지나치고 자신감이 모자라면 겁쟁이가 된다. 즉 무모함과 겁쟁이 사이의 중용은 용기가 된다. 재밌는 것은 돈에 있어서이다. 돈 거래에서 중용은 후함이고, 지나침은 방탕, 모자람은 인색이다. 그런데 돈에 관련된 미덕이 두 가지이다. 후함이 재물에 관련된 모든 행위라면 통 큼은 지출을 포함하는 행위들에만 적용된다. 비교적 규모가 큰 지출이다. 이런 미덕의 모자람은 좀스러움이고, 지나침은 속물근성・몰취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결코 재밌는 책은 아닌데 읽다보면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특히 여러 미덕들의 중용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세미나를 하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미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지만 중간이라고 해서 양쪽의 정 가운데가 아니다.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찾아야 한다. 중용을 알고 지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어려우면 두 악덕 중 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지나침 쪽으로 때로는 모자람 쪽으로 치우쳐봐야 중용을 지키고 좋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일단 뭐가됐든 미덕을 실천해라, 좌충우돌 고민하고 행동하면서 균형을 찾아라, 습관화 해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어려운 중용을 도와주는 미덕이 실천적 지혜이다. “건장한 사람도 시력을 잃으면 볼 수가 없어 돌아다니다가 크게 넘어지는데, 미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위자가 지성을 갖게 되면 그의 행위는 아주 달라질 것이고, 진정한 미덕이 될 것이다” 지성이 바로 실천적인 지혜이며,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이다.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아닌 중간을 선택할 때, 이 중간은 올바른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와 도덕적인 미덕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미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천적 지혜는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을 올바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행복은 공동체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폴리스라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를 중심에 둔다. 그가 말하는 개인도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자 자족적이라고 할 때, 자족은 혼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족은 “그 자체로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족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해당한다. 공동체 속의 개인이 미덕을 습관화하는 자기배려, 자기수양을 통해 공동체를 좋음의 상태로 만들고, 다시 개인의 좋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문탁샘 글을 보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꼴찌라고 한다. 만약 소확행 같은 행복이라면 행복지수가 이렇게 낮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개인중심 사회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따라서 행복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행복지수가 꼴찌라는 것은 공동체 속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우애이다. 그가 말하는 우애는 “인격체들 간의 상호적 태도”이다.(『서양철학사』 p.169) 우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우정이라는 좁은 의미부터 부모 자식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도 우애로 특징짓고 있다. 사실 우애뿐만이 아니라 정의 등 다른 미덕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덕은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기반이 된다. 그러고 보니 동은이의 “행복해!”라는 외침은 우애의 미덕에 걸맞은 영혼의 활동이었다.

 

댓글 2
  • 2023-06-03 06:51

    내년에는 그리스 고전 읽기 세미나를 만들고 싶다는 토용샘, 그 바램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고대중국과 고대그리스를 교차시키는 읽기와 쓰기도 기대해봅니다~~

  • 2023-06-03 11:55

    저도 토용샘의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를 쿄차시키는 글을 기대합니다~^^ 토용샘 홧팅!!!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타락시아를 향해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고   쾌락에 대한 오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은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니... 아마도 사람들은 쾌락이 고상한 철학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향락, 방탕함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의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도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피쿠로스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 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실제 에피쿠로스 당대에도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티몬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자연철학자 중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 사모스에서 온 문법학교 교사,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라고 평했다.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썼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떠난 티모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하루에 두 번이나 토했고,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철학 토론과 비밀 회합을 자신도 지긋지긋해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이유 중 매춘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난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의미를 알면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댄 이유는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원’을 꾸려 공동체생활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비주의는 때로 황당한 소문을 낳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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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3.08.28 | 조회 141
한문이예술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동은
2023.08.18 | 조회 54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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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08.17 | 조회 285
요요와 불교산책
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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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292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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