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0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바보들의 행진(1975)> 한국고전영화_06
띠우
2023-05-28 16:48
321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대한 국내 영화인들의 시기와 질투도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한국영화사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사회질서를 비판한 데뷔작 <화분>과 전통사극 <수절>은 연이어 관객동원에 실패했다. <수절>은 전쟁과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성 묘사 때문에 토한 관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 이른 시도였다. 작가주의 정신을 발휘한 작품들은 철저히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다. 좌절로 인해 그는 술자리에서 자주 싸웠고 얼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술자리에서의 시비는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중반에 벌어졌던 ‘청년문화논쟁’ 속에서 하길종은 최인호와 손잡고 <바보들의 행진>을 발표한다. 시작은 1974년 3월, 동아일보 기자 김병익이 쓴 기획기사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었다. 이 기사에서 김병익은 최인호,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서봉수, 이상룡 등 6명을 젊은 우상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곧이어 역풍이 불어왔다. 이어령과 한완상은 서구식 표피만을 따라하는 청년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고, 당시 서울대 학보사 역시 민족주의적 세계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올라왔다. 서구에서는 진보의 물결이 문화 전반에 휘몰아치는 시기에 한국대중문화는 불행하게도 권위주의적 유신체제와 경제발전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성장해갔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태지가 등장하기까지 대중문화를 딴따라로 비하되는 경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젊은이들의 저항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다. 1974년 4월, 최인호는 논쟁의 당사자로서 한국일보에 직접 글을 발표한다. 그는 기성세대의 위선과 권위, 남녀차별 등을 철폐하려는 청년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때 솔직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은 존재 자체가 변화의 싹이 된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은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변되는 서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해갔고, 보수적이었던 문단과 대중예술계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도 변인식, 김호선, 이장호, 하길종, 홍파, 이원세가 모여 ‘영상시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청년영화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대중문화예술계의 경계를 허무는 한편, 한국영화의 예술화를 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바보들의 행진>은 완성되었다.
빛과 어둠, 그 속에서 스러져간 예술혼
영화는 중반이 넘어가도록 <고교얄개> 시리즈처럼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다. 여기에는 송창식의 노래도 한몫한다. 철학과 학생인 병태와 영철은 단체미팅에 나가 불문과 학생인 영자와 순자를 만난다. 주인공들이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있을 때, 대사 중에 ‘세상에 흔해빠진 게 대학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영화의 등장인물 소개에 실제 배우들의 대학이 기재되었다. 예를 들어 ‘「병태」윤문섭(성대), 「영철」하재영(중대), 「영자」이영옥(서울예대), 「영숙」김영숙(숙대)’라는 식이다. 마치 앞으로 사회를 움직이는 세대가 우리라고 선언하듯이. 이전에는 젊은 대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중점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거의 없었다. 영화는 그 나이의 젊은이들의 군대문제나 불문명한 (철학과의)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었다. 이는 유머와 재치가 넘쳤던 최인호의 영향이 분명해 보인다. 한 마디로 영화는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주제의식을 잊지는 않는다.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최인호는 과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에서 실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기로 흥겨워야 할 이 장면에서의 묘사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술 마시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보이는데, 검열로 인해 데모상황을 축제장면으로 대체했던 예술가들의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의 경쾌함은 사라진다. 어찌 보면, 당시 검열관들은 창작자들과의 머리싸움에서 결코 뒤처짐이 없었다. 데모로 강의실이 비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 상황을 어울리지 않게 바꾼 장면(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의 장면들)으로 검열에 통과시켜 준다. 검열장면, 학생들의 데모씬과 일본인과 벌인 싸움 장면들 대신 들어간 편집장면들은 일부러인지 모르지만 다소 기괴하다.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창작자들과 형식적인 검열관들의 머리싸움은 시작부터 불공평했다.
"최근 상당한 관객을 동원하여 화제가 되어온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류가 영화란 말인가. 단연코 아니다. 단지 영화에 접근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여 영화의 사회적 역할기능을 했는데 왜 영화가 아니란 말인가 …… 영화작가는 거시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눈(眼目)과 현실을 투시해야 하는 시혼(詩魂)이 깃든 견자(見者)로서의 냉철함을 절대적인 창작의 무기라고 확신해야 한다고 본다."
-- 《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 하길종
그나마 발랄한 최인호가 중재 역할을 해줌으로써 우울하고 공격적이었던 하길종의 작품이 완성되었으리라.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엄격했던 하길종은 결국 자기영화에도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다. 흥행은 성공했지만, 예술가로서의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병태 말고, 최인호의 원작에서는 없었던 영철이라는 인물이 감독과 겹쳐진다. 영화 맨 첫 장면,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장면에서 병태는 합격하지만 영철은 불합격이다. 마지막에 입대하는 병태를 배웅하는 영자의 태도는 그들에게 희망을 남겨두지만, 영철은 연애도 실패한다. 시대는 어수선하고 미래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어디로도(대학/군대/집) 갈 수 없는 영철은 고래를 잡겠다고 동해로 떠난다. 시대 혹은 기성세대와는 계속해서 반목하는 모습이 감독과 닮아있다.
사실 영철은 아버지와 사이는 안 좋아도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 뒷길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하면 미래는 있다. 또 군대에 못 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떠났던 영철은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감독은 왜 그를 죽였을까. 아마도 <바보들의 행진>의 흥행을 바라보는 하길종의 심정이 영철과 같았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거시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눈과 현실을 투시해야 하는 시혼’을 영화 속에 담고자 했던 감독의 열망, 이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 대신 타협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사그라든다. 창작의 무기를 들고도 휘두를 수 없는 그의 절망적인 마음이 영철에게 투영되어 슬픔이 겹쳐진다. 죽고만 싶다. 그렇게 보니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그의 처절함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었으니
영화에서 당구장 이야기는 작위적인 면이 있다. 철학과 학생들은 당구를 치다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학생들은 다들 돈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뜬금없이 그들을 향해 ‘사람 사이의 믿음’이 가장 소중하다는 영철. 이를 비웃으며 친구들은 신문팔이 소년(얄개 이승현역)을 두고 내기를 벌인다. 소년에게 신문값으로 큰돈을 주고 거슬러오라면 돌아오겠느냐는 것이다. 영철만이 온다고 믿는다. 우여곡절 끝에 한참 지나서 소년이 돌아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병태의 회상장면이다. 그런데 그 앞뒤 전체 내용과는 연결성이 떨어진다. 원작대로라면 검열로 잘려나간 부분에 들어가 있는데 병태의 상상처럼도 보인다. 순수한 친구 영철이 신문팔이 소년을 보며 해맑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는 듯하다.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향한다. 함께 가자는 병태에게 학교로 돌아가라며 혼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영철, 혼자가 된 병태에게 남은 것은 무기한 휴강과 암울한 대학 분위기다. 이 장면부터 울리는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은 대학 캠퍼스와 동해를 향한 영철의 모습을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노래는 계속 흐르고 ‘지금 내가 할 일은?’이라고 크게 적힌 대자보가 우리를 향해 있다. 이어 교내 방송국에서 마이크시험을 하는데 점점 소리가 커지다 나중에는 고함을 치듯 묻는다. “하나, 둘, 셋, 들립니까? 들립니까? 들립니까…”. 감독이 응답없는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영철은 낭떠러지에 이르자 바다로 뛰어든다. 몰락, 이때 쩌렁쩌렁 울리는 <고래사냥>으로 영화는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입영열차를 사이에 둔 병태와 영자의 그 유명한 (흥행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키스씬으로 마무리된다.
<바보들의 행진>의 성공은 하길종에게 다시 영화를 만들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여자를 찾습니다(1976)>와 <한네의 승천(1977)>은 또다시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다. 이후 다시 최인호와 만나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 <병태와 영자(1979)>를 연출했지만, 그는 매일같이 술로 시간을 보냈다. 1979년 2월 28일, <병태와 영자>가 한창 흥행에 성공하고 있던 그날에도 어김없이 술자리에 앉아있던 하길종은 급작스레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작품이나 사람들을 향해 적나라한 비난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작품이나 사람들을 ‘피고’라 지칭했던 모양이다. “살아남은 당신들은 모두 피고야”, 이 말에는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1970년대는 암흑기였다. 그런 시대에 하길종의 작품들은 영화라기보다는 영화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영화에 접근하려는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찍을 기회를 겨우 잡았건만, 그 작품들은 실패를 거듭했다. 한국에서 그가 남긴 작품은 겨우 7편이다. 그중 흥행작과 실패작 사이를 오가다 보면, 타고난 재능으로 시대를 앞서갔던 인간의 고뇌가 전해져 온다. 천재적인 젊은 예술가는 자기혐오와 좌절로 인해 얻은 병으로 요절했다. 아니, 시대와의 불화 끝에 그는 세상에서 버려졌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토용
2023.08.28 |
조회
141
한문이예술
동은
2023.08.18 |
조회
54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기린
2023.08.17 |
조회
285
요요와 불교산책
요요
2023.08.17 |
조회
292
요요와 불교산책
요요
2023.07.20 |
조회
464
영화라기보다 영화에 접근하려는 시도! 하길종감독을 이렇게 정리해봅니다. 잘 읽었어요.
오랫만에 들어보는 하.길.종.
잘생긴 감독에 배우.
청소년기에 눈에 확 들어왔던 분이 셨 습니다 ㅋㅋ
야만의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자유로운 영혼의 고뇌가 느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