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감정1]창희와 현아의 오디세이아

겸목
2022-07-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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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그의 삶은 ‘청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찌들어있다’.

 

“배터리가 0으로 날 소진시켜야 제대로 산 것 같아.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무거워. 되는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지만 어쨌든 죽을힘을 다했다”는 현아의 자기 위안과, “다 개쓰레기로 만들어” 버리고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는 존재로 나를 세워놓”는다는 미정의 뒤틀린 심리에서 요즘 청년들의 무력감과 분노가 리얼하게 느껴진다. 나태하거나 게으르거나 방만한 것이 아니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성과는 미미하다. 포스트산업사회 청년들은 예전 세대처럼 일자리, 연애, 결혼, 집장만으로 자신이 ‘성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계속 미성년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드라마에서 창희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만 먹었지 크질 않았다. 지겨울 거다. 애를 낳아 봐. 매일매일 황홀해. 애엄마를 누가 당해? 너희는 사이즈만 달라졌지…….”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쪽팔림’과 함께 많이 쓰이는 표현도 ‘지겨움’이다. 모두 지겹다.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도, 조직문화라는 명분 아래 관리되는 직장인도, 연애하지 못하는 싱글녀도, 아이가 딸린 이혼남도.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인 구씨마저 혼자 마시는 술이 지겨워 술잔을 바꿔가며 마신다. 쪽팔림과 지겨움으로 점철된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해방’은 가능한 일일까? 아니 ‘해방’은 무엇이었나?

 

 

  1. 커밍 업 쇼트, MZ세대의 성장 서사 혹은 치료학적 자아 서사

창희 친구 두환은 방과후 축구교실 코치와 카페 주인을 겸하고 있지만, 카페는 장사를 접은 지 오래고 친구들의 아지트로 사용된다. 서울에 직장이 있는 염씨네 삼남매와 달리 두환의 수입은 고정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두환이 짝사랑하는 초등학교 교사 곽선생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까닭은 외모와 매너 같은 매력자본보다는 정규직 교사와 방과후 교사라는 ‘사회적 레벨’의 차이 때문이다. 창희의 또 다른 친구 현아는 서울에 있는 반지하방에 살며 삼십대의 나이에도 주중 알바와 주말 알바자리를 구하려 다닌다. ‘프리섹스주의자’라는 현아의 닉네임은 연애지상주의자라는 그의 낭만적 지향을 보여주기보다는 결혼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위치를 표시해준다. 현아는 일자리, 연애, 주거의 측면에서 모두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두환, 현아보다 나은 입장이지만, 대기업 계약직인 미정은 직장 내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고, 전남친에게는 대출금을 뜯기는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미정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감수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데, 당했다는 사실보다 당하는 ‘등신’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더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국내에 2020년에 번역 출판된 『커밍 업 쇼트(COMING UP SHORT)』(제니퍼 M. 실바, 리시올)에는 ‘불확실한 시대에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청년들의 삶, 특히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노동계급 청년들의 삶을 인터뷰를 통해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일자리, 연애, 결혼, 집장만이라는 전통적인 성인 지표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 서사를 구축해가는 MZ세대 노동계급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인터뷰한 남녀 모두 성장이란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거듭 말했다. 이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관계를 맺고 제도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일방적이라는 사실만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성인이 되는 경험을 틀 짓는 노동 시장과 제도 모두에 배신당한 노동 계급 청년 남녀의 깨달음을 서술하려 한다. 이들은 자신이 철저히 혼자고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며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외부의 도움에 기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청년들은 타인을 의심하고 불신해야 한다고 배운다. 많은 이가 부당한 상황을 참고 견디며, 자립과 원자화된 개인주의를 자기 가치나 존엄과 동일시한다. 자기가 혼자 힘으로 살아남았으니 남들도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단기 유연성, 끝없는 유동성, 공허한 제도들의 시대에 성인기로의 이행은 뒤집혀 왔다. 성인이 된다는 건 사회 집단이나 제도로의 진입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의 노골적인 배제를 수반하는 과정이다. (『커밍 업 쇼트』, 160~161쪽)

 

 

『커밍 업 쇼트』에 수록된 미국 노동계급 남녀들은 타자와의 연대를 거부하고, 개인주의를 고집하는 방식으로 자진해서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리스크가 가져온 상처가 만들어낸 ‘경직된 자아’라고 명명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이들이 새롭게 구축하는 성장 서사이다. 이들은 “자기 안의 괴물을 발견하고 중독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한다는 서사”(213쪽)라는 치료학적 자아 서사로 성인이 되어간다.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는 세상에서 이들이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자아 변형이다. 자신의 고통과 잘못 관리된 감정들을 치료한다면, 이들은 그 자긍심으로 앞으로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진보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이들이 빈곤과 중독이 가져온 자신의 취약함을 상담, 자기계발서, 자조프로그램 등을 통해 극복할지라도 그것을 더 나은 일자리로 연계시킬 수 있는 사회/관계자본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실패가 반복된다. 이때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도 돌리는 자기폐쇄적회로만 강화될 뿐이다.

 

혹은 이들이 자기 극복을 통해 더 나은 계층이동을 이루었다면, 자신과 달리 개선의 의지가 없는 가족과 친구들과 엄격한 ‘선긋기’를 감행한다. 이들이 이룬 성과는 자신이 리스크(시간과 돈 낭비)를 감수한 대가인데, 이들에게는 타인을 위해 리스크 감수할 여유까지는 없다.

 

 

이런 식의 의미 형성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논리는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 즉 상식적인 현실이 되어 이들의 경험을 가득 메운다. 신자유주의는 추상적이며 독립된 경제 영역의 담론과 실천만이 아니라 감정 영역의 체험된 의미 및 가치 체계가 되어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경제 영역과 감정 영역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이 청년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라고는 자립과 견고한 개인주의밖에 없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지 않으며 “삶 전체에 걸쳐 모든 실천과 기대”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앞의 책, 185~186쪽)

 

 

 

 

  1. 감정자본주의, 치료학적 자아 서사와 감정자본

오늘날은 비단 노동계급뿐 아니라 계층과 무관하게 정신적 고통을 정체성의 한 특징으로 공유하고 있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돌베개, 2010년)에서 “아동기에 방치됐던 경험, 부모에게 과잉보호받던 경험, 남모르는 자존감 결핍, 일/섹스/음식에 대한 강박관념, 분노, 공포증, 불안은 계급적 자각을 분명하게 따지지 않게 되었”(89쪽)고 서술하고 있다. 에바 일루즈는 이 책에서 미국의 자기계발의 역사를 검토하고 있는데, 19세기 말의 자기계발은 ‘자수성가형’이 주를 이뤘다. 의지만 있으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사회적 운명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문화에서 자기계발은 자수성가형이 아니라 치료를 통한 자아실현이다. 오프라 윈프리로 대표되는 이런 유형은 부와 명예를 누리는 중에도 닥쳐올 수 있는 정신적 고통을 다루고 있는데, 이제 정신적 고통은 세속적 성공과 상관없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자기계발은 자수성가형과 달리 끝이 없는 고통의 서사가 반복된다. 에바 일루즈는 이렇게 자기계발과 밀착된 감정관리의 유형이 등장하게 된 것을 자본주의시대특유의 감정규범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규범은 ‘특화된 시장’을 창출한다. 자기계발서, 재활프로그램, 상담, 토크쇼, 최근에 한국에는 정신 건강 치료를 보장하는 ‘자녀보험상품’까지 등장했다. 이 상품의 광고모델은 TV에서 육아상담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신과 전문의이다. 감정관리는 소비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감정관리는 자연스럽게 감정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관리되는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 건강한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으로. 감정지능개념인 EQ는 직장 내 인성검사에 활용되고, 감정지능은 감정의 서열화/등급화/계량화를 가져온다. 관리된 건강한 감정과 높은 감정지능을 가진 사람은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이고, 이는 문화자본, 교육자본과 같이 ‘감정자본’ 또한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사회능력을 표시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감정도 매뉴얼대로 코칭을 받는 시대가 왔다(잘 사는 집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취향도 세련되고 멘탈도 건강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다!!). 그리고 매뉴얼의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알아챌 수 없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감정은 하나의 신호체계이다. 기쁨, 슬픔, 불쾌감 등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내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지표적 기능을 한다. 이를 통해 의식을 점검하거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독해하지 못하고 전문가에게 위탁하는 위태로움에 처해 있다. 늘어나는 TV 심리상담프로그램과 상가건물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심리상담소의 숫자가 이를 반증해준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입만 열면 직장동료에 대한 불만을 쏟아 붓는 창희는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직장 내 불륜커플의 모함에 의해 미정은 계약직 재계약에 실패하고 폭행에 대한 합의금까지 물어준다. 남자를 수시로 갈아치우는 현아는 수시로 데이트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경기도에 사는 청년들은 서울에 사는 청년들보다 출퇴근에 장시간을 써야 하는 노동 약자이며,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서울시내에 집을 구하지 못하는 주거 약자이며, 동시에 감정자본에서도 약자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쪽팔림’ ‘지겨움’ ‘열등감’으로 대변되는 감정자본의 약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취약함을 해결해나가는가 하는 서사인데, 이들은 오늘날 트렌드가 된 자기계발과 결합된 치료학적 자아서사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이 점이 이 드라마의 ‘해방’적 측면이다.

 

 

  1. 창희의 오디세이아

“제 길이 아닌데 계속 떠밀려 달려갈 필요 없잖아요. 깃발 꽂고 싶은 데가 없어요. 돈, 여자, 명예, 없는 욕망을 만들어 달려갈 수도 없고.” 창희는 7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는데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근로조건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더 나은 직종으로 이직한다거나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라, “떠말려” 가는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퇴직을 선택했다. 이 장면에서 창희는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내비춘다. 형이 있다면 집안의 ‘아들’로서 느끼는 부담감으로부터 홀가분해질 수 있고, 형이 사는 모습을 곁눈질해 볼 수 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겠다는 아버지시대의 노동윤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에 창희는 ‘어른’이 되는 길을 참고할 모델이 없다.

 

창희네 집에 일꾼으로 들어온 구씨는 창희에게 ‘형’ 같은 존재인데, 그는 “자신의 멋짐을 숨질 줄 아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창희는 구씨의 놀라운 멀리뛰기 솜씨를 보며, 구씨가 어떤 사연으로 숨어 사는 대단한 인물일 것이라 추측한다. 마지막회에서 창희는 스스로에게 “나만 기억하는 나라는 인간의 멋짐”을 말하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자부심으로 간직한다. “이 말들이 쏟아지고 싶어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꾹 다시 밀어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라는 명언과 함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알지 못하지만, 드라마 시청자인 우리는 창희가 말하지 않는 ‘멋짐’이 무엇인지 안다. 중요한 사업상의 미팅을 앞둔 창희는 그 중요한 시간에 혼자 임종을 맞는 환자를 두고 갈 수가 없어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일로 창희의 사업은 실패하고, 이후의 세월은 그 빚을 변제하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그 시간은 창희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된 아버지를 ‘케어’하며 창희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은행 ATM기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순서를 양보한 창희는 그 사람이 떠난 화면에 ‘잔액이 부족하여 인출하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보고, 돈을 찾지 못한 그 사람이 버스라도 놓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창희는 자신이 “가랑비처럼 티 안 나게 여러 사람 촉촉하게 해”주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그 성향에 맞게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돈, 여자, 명예, 없는 욕망을 만들어” 떠밀려갈 뻔했던 창희는 자신만의 모험과 도전을 통해 겪어낸 시간의 힘으로 ‘어른’이 되고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선망 받는 직업이 아닌 것처럼, 창희가 걸어간 길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루트는 아니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창희가 걸어간 길이 ‘아름답다’고 생각만 할뿐 몸으로 겪어낸 창희의 모험과 도전을 엄두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는 판타지에 불과하고, 우리는 ‘판타지’라는 안전망 안에서만 ‘해방’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에서 창희는 자신의 일과 자리를 찾았지만, 한때 연인이었고 오랜 친구이기도 한 현아는 알바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현아의 오디세이아는 가능할까?

 

 

 

 

  1. 현아의 오디세이아는 가능할까,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이곳에서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처지에 서면 필연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처지에 서면 그런 일을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능력주의』, 146쪽)

 

 

박권일은 『한국의 능력주의』(이데아, 2021년)에서 한국 사람들이 못 견디는 것은 ‘불평등’이 아니라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불만, 곧 ‘불공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능력에 따른 차등보상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인천공항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문제를 비롯해서 조국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정규직이 자동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정규직으로 채용되기 위해 오랜 시간 투자해온 사람들이 ‘역차별’을 받는 것이고, 조국교수의 자식처럼 ‘아빠찬스’ ‘엄마찬스’를 써서 의전과 로스쿨에 입학하는 것은 그런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준다는 논리이다. 여기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학벌에 따른 불평등은 인정하고, 그 특혜에 진입할 수 있는 과정의 공정함만을 따지겠다는 교묘한 계산법이 작동하고 있다.

 

이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의 욕망은 ‘서울대와 강남 아파트’로 집약되어 있으며, 그런 점에서 한국은 욕망의 민주화와 평등을 이룬 셈이다. 그래서 이런 구조가 가져오는 소득격차와 불평등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 과정의 공정성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를 박권일은 ‘소비자 정체성’이라는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예시로 이화여대 장애인 학생의 계단식 강의실 변경요청 사건을 들고 있다. 이때 대다수 학생들이 “죽어라 공부해서 천문학적 등록금까지 내고 들어온 대학교에서 내가 누릴 권리를 다 누려도 시원찮을 판에 왜 내가 그런 ‘희생’(강의실을 바꾸는)을 감수해야 하”(165쪽)는지 모르겠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하는 소비자주의 앞에 환대와 연대 같은 사회적 가치는 힘을 잃는다. 더 나아가 능력에 따른 차등 보상을 원칙으로 하는 능력주의는 차별과 혐오의 죄의식을 경감시키고 나아가 차별과 혐오를 공정하다고 믿게 만들기까지 한다. 인터넷이나 SNS에 공정성담론만큼이나 혐오담론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능력주의가 가져온 부대효과이다.

 

시민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은 한국은 현재 가계소득격차가 OECD 36개국 중 32위에 위치한, 매우 불평등한 나라이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또한 이를 반증하는 또 다른 통계자료이다.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이곳에서 현아는 ‘알바와 반지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집을 셰어하우스로 바꿔서 주거비를 낮추고, 유튜브 고수들을 따라 주식투자를 하고, 심리상담을 받으며, ‘로맨틱코미디’의 여주인공처럼 씩씩하고 사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로맨틱코미디’ 장르 안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커밍 업 쇼트』의 저자 제니퍼 실바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 대한 다른 이야기-희망, 존엄, 연결을 약속하는-를 말할 수 있으려면 이들은 생활임금, 기초적인 사회적 보호, 미래와 대면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자식을 보장받은 상태로 성인기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친밀함을 찾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신뢰와 확신을 위한 지속적인 헌식이나 자기 충족 때문에 평등주의적인 젠더 이상을 희생하도록 강제하지 않는 문화 모델이 필요하다. 끝으로 노동 계급 청년 남녀는 존엄과 진보의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청년들은 성인이 된 이야기를 감정 관리로 환원하지 않고 불안전 및 상실과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공동체가 건강하고 활력을 유지하려면 경직된 자아들이 아니라 연결과 상호 의존을 발전시키는 존엄의 관념들을 창출하고 육성해야 한다. (『커밍 업 쇼트』, 286쪽)

 

 

미정의 ‘추앙’과 창희의 ‘다정함’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정주행하게 한 미덕이었다. 미정과 창희는 추앙과 다정함이라는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들에게는 알바가 아닌 일자리와, 남매끼리 모여살 수 있는 집이 있었다. 현아의 오디세이아는 우선 주중, 주말 이중 알바를 뛰지 않아도 되는 생활임금이 필요하다. 안정적인 주거대책도 필요하다. JTBC <나의 해방일지> 페이지에 올라온 현아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어마어마한데 자기혐오도 어마어마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둘러엎기, 도망가기, 깽판치기가 주특기. 항상 안정적인 삶으로 접어들 수 있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비켜간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건 ‘현아’라는 드라마 속 인물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노동계급 청년의 불안정한 조건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갑작스럽게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의료보험비를 체납했고, 신용카드 돌려맞기로 위기를 넘기다보니 신용불량자가 되기 쉽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어렵고, “안정적인 삶으로 접어들 수 있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비켜”가는 일이 반복되면 자기혐오가 켜질 수밖에 없다. 드라마 초반에 현아는 경험이 많고 자유롭고 솔직해서 친구들에게 현아의 말이 영향력을 가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찬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 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그런데 드라마 후반에 가면 이런 현아의 성찰이 성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를 거듭하고 있는 모습만 그려진다. 이게 현아의 잘못일까? 고쳐야 할 건 현아가 아니라 불평등을 재생산하며 불공정에만 관심을 갖게 만드는 시스템이고, 그 리스크를 오롯이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가능할까?

 

 

 

 

미국의 승자독식의 정치학을 분석한 제이콥 해커와 폴 피어슨은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21세기북스, 2012년)에서 “개혁 활동을 지속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현 경제 체제의 최대 수혜 계층과 중산층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개혁 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자금력의 불균형”(471쪽)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의 해법은 “특권층이 누리고 있는 이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정치개혁이다.”(490쪽) 저자는 현재와 같은 극심한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정치권력이 거대한 금융자본과 결탁해 최상위 부유층에 유리하도록 정치활동을 펼치고, 그들이 부를 독차지하도록 승자독식시스템을 교묘하게 구축해왔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빌런은 ‘찌질한 내가’ 아니라 ‘부자’다. 그럼, 이제 이렇게 말해보자.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라고. <나의 해방일지>가 우리에게 알려준 해방의 기술은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것이었다. 문제를 분명히 하자. 부동산과 주식과 가상화폐로 자산을 늘리고 있는 부자들에게 장기하처럼 “부럽지가 않아”라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주눅 들지는 말자. 그리고 우리도 ‘해방클럽’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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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겸목
2022.07.04 | 조회 35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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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26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26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김지연
2021.12.06 | 조회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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