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용의 서경리뷰 2회] 도덕국가의 원형을 찾아서 - 요순(堯舜)의 덕과 정치

토용
2024-04-2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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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덕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덕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펼친 정치는 문명질서를 만드는 과정이었고, 그와 함께 역사는 시작된다.

 

『사기』는 중국의 역사를 「오제본기」부터 시작한다. 하‧상‧주 앞에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제왕을 배치한 것이다. 요와 순은 이 다섯 제왕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는데, 요와 순을 칭송하는 곳에 가 보면 풍속과 교화가 다른 곳과 확연히 달랐다고 말한다. 그런 것을 볼 때 『서경』의 내용이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니고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서경』에 없는 내용들도 보충해서 요와 순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요와 순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부터 5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어느 한 부족의 수장이 된다. 상상력을 보탠다면, 오래전 어느 부족의 수장이 매우 덕이 있고 지혜로워서 자신의 부족을 잘 다스렸을 것이다. 그 수장에 대한 칭송이 구전되면서 전설이 되고 누군가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서경』 「우서」의 <요전>과 <순전>은 바로 그 내용이지 않을까? 공자는 『서경』을 정리하고 편찬하면서 요와 순의 구전을 이상적인 통치자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신화 속 요순이 공자의 손에서 성인이자 통치자인 성왕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요순은 유가가 꿈꾸는 도덕정치의 원형으로서 신화에서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북극성은 그 자리에 - 요의 덕

 

덕(德)이라는 글자는 갑골문과 금문에 일찍부터 보인다. 갑골문의 치(徝)는 덕의 초기문자이다. 이 글자는 彳(조금 걸을 척)과 直(곧을 직)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또 척(彳) 없이 직(直)과 심(心)을 결합하여 덕(悳)이라고도 썼다. 덕(悳)은 『설문』에 밖으로는 타인에게서 얻으며 안으로는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운』에는 덕(德)을 덕행이라고 풀이했다. 문자적 해석으로 보면 덕은 행위와 관련이 있으며, 이 행위는 마음,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덕의 용법을 보면 덕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행위와 마음을 가리키기도 하고 도덕적인 의미를 지닌 행위와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덕행과 덕성은 각각 도덕적 행위와 도덕적 품격을 가리킨다.(『고대 종교와 윤리』, 진래, 572쪽)

 

덕과 덕행의 예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 바로 <요전>이다. <요전>은 요가 가진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경하고 밝고 문채나고 생각함이 마땅히 편안해야 할 바를 편안케 하시니, 진실로 공손하고 겸양하시어 덕의 광채가 사방에 끼치시며 하늘과 땅에 이르셨다.” (欽明文思安安 允恭克讓 光被四表 格于上下)

 

요가 가진 덕성은 흠(欽), 명(明), 문(文), 사(思)이다. 일을 할 때는 항상 경건하고 공경한 마음가짐으로 했으며, 매우 지혜롭고, 아름다운 광채가 있고, 사려가 깊었다. 이러한 사덕(四德)으로 힘써서 억지로 하지 않아도 천하가 편안했다는 것이다. 이 덕이 밖으로는 공손함과 겸양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요의 덕은 이제 사방으로 흘러넘쳐 천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공자는 “위대하다, 요임금이여! 드높구나! 오직 하늘이 위대하니, 요임금만이 하늘을 본받았네. 넓고 넓구나! 백성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네. 드높구나! 그 공적이여. 찬란하다, 그 문화여!”라며 요가 가진 덕을 찬미했다.(『논어』 「태백」)

 

내면의 덕성은 외적인 덕행으로 드러난다. 공자가 찬미한 요의 공적은 바로 요가 자신의 덕으로 베푼 정치였다. 요는 자신의 큰 덕을 밝혀(克明俊德) 먼저 자신의 친족을 화목하게 했다. 그러자 백관들이 스스로 덕을 밝히게 되고,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주변 제후국이 화합을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화목하게 된다. 잔잔한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동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간다. 요의 덕이 중심이 되어 동심원처럼 점차 넓게 퍼져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요가 만들어낸 정치질서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덕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관료, 제후, 백성까지 교화가 미치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요의 정치를 제자리에 있는 북극성을 향해 사방의 별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에 비유했다. 덕으로 하는 정치의 효과이다.

 

이러한 질서가 무사태평의 시대여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요의 시대에는 자연재해가 심해 생존의 문제가 중요했다. 이를 위해 요가 먼저 한 일은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역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이후 덕이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요는 역법 담당 관리에 자신의 아들을 추천하는 신하들의 말에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임명한다. 공공(共工)을 등용하자는 신하들의 말에는 공공이 공손하지 못하다며 거절한다.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관리를 임명하지는 않았다. 홍수피해가 커지자 요는 치수를 담당할 관리를 찾는다. 신하 사악(四岳)이 천거한 곤(鯀)이 탐탁치 않았으나 사악의 설득에 타협을 한다.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신하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모습에서 요가 지닌 덕과 화합의 정치를 볼 수 있다.

 

 

문명질서를 구축한 통치술 - 순의 정치

 

순은 효의 아이콘이다. 사악이 순을 천거할 때 언급한 순의 덕행은 효로 화합하는 능력이었다. 순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가족을 효행으로 감화시켰다. 이 때문에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를 비롯해서 공공, 환도(驩兜), 곤 등 권력이 있었던 사람들을 제치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가족의 화합을 이끌고,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관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효도와 우애의 덕은 통치자의 중요한 기본 자질이 된다. 공자도 『서경』을 인용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이 마음을 미루어 넓히는 것이 정치라고 하였다. 유가에서 강조하는 덕치의 시작은 효의 미덕을 발휘하여 가족(종족)을 화합하는데 있었고, 순이 바로 그 전형이 되었다.

 

<요전>이 요의 덕을 강조했다면 <순전>은 순의 통치술에 집중했다. 내용도 <요전>에 비해 <순전>이 3배쯤 많다. 요의 통치내용이 주로 역법제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순전>에서는 역법뿐만 아니라 <요전>에서 언급하지 않은 통치술이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순은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내고, 5년에 한 번씩 동서남북 사방을 순행하며 지방의 제후들과 화합을 도모했다. 그리고 하늘의 운행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농경생활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형벌의 사용도 매우 신중하게 했다. 순이 실행한 정치 중 인상적인 부분은 인재등용이다. 순은 적재적소에 알맞은 인재를 앉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곤이 실패한 치수를 그의 아들 우(禹)에게 맡겼고, 기(棄)에게 농사 기술을 가르치게 했으며, 설(契)에게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형벌과 법을 명확하고 공정하게 집행하기 위하여 고요(皐陶)를 중용했다. 산림과 조수(鳥獸)의 관리는 익(益)에게 맡겼고, 기(夔)는 음악을 관장했다.

 

공자는 이러한 순의 정치를 무위(無爲)의 정치라며 높이 평가했다. 군주의 성대한 덕으로 백성이 저절로 교화되어 특별히 애써 무엇을 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지는 나라,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한 도덕국가이다. 순은 그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

 

순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끈 신하들은 역사시대로 넘어가는 하‧상‧주의 시조가 된다. 우는 순의 후계자로서 하나라 시조가 되고, 설은 상나라 시조, 기는 주나라 시조가 된다. 『서경』 「우서」는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요와 순의 덕과 그 덕이 행하는 정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도덕국가의 완성

 

통치자가 지닌 덕과 그로부터 드러나는 도덕적 행위가 이상적인 정치질서로 펼쳐지는 모습을 「우서」는 보여준다. 요와 순이 가진 덕은 그들의 정치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 정치는 통치자의 독단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깊은 통찰력과 지혜, 공경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위의 의견을 경청했다.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며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훌륭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우서」에 따르면 통치자는 유덕자여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자격은 덕이며, 천하를 물려주기 위한 조건도 덕이다. 천하를 경영하기 위한 인재선발 기준도 덕이다. 덕은 통치자의 내재적 역량이며, 통치자가 가진 내면의 덕성은 결국 외적인 덕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일은 유가의 정치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내성외왕(內聖外王), 내면에 성인의 덕을 가진 왕이 덕의 정치를 펼칠 때 유가에서 말하는 덕치국가가 완성된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역사적인 근거와 자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전이 『서경』이다. 「우서」편만이 아니라 『서경』의 다른 편에서도 끊임없이 통치자의 덕을 강조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우서」에서 보이는 요순의 덕과 덕행은 분리되지 않는다. 덕치는 군주 개인의 덕행에 근거한다. 그러나 점차 덕이 내면의 수양 문제로 확장되면서 도덕적 의미로서의 덕 개념이 강화된다. 맹자는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누구든지 ‘요임금의 옷을 입고 요임금의 말을 외우며 요임금의 행실을 행한다면 요임금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본성으로서 요순의 덕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전제로 한다. 그 덕을 잘 함양하면 되는 것이다.

 

내면의 덕을 함양하는 수신과 통치의 문제는 유가의 수신학 텍스트인 『대학』으로 이어진다. 『대학』의 첫 번째 강령인 명명덕(明明德)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다. 즉 수신이다. 올바른 통치는 수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요가 자신의 덕을 밝혀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룬 과정이 그대로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이어진다. 『대학』의 내용은 『서경』의 요약이고,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의 실천버전이다.

 

댓글 5
  • 2024-04-30 23:55

    얼마전부터 우응순샘의 <대학연의>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딱! 토용샘이 이야기한 <서경>의 <요전>부터 나옵니다.
    '흠명문사 안안(安安)'이라고 요임금의 덕을 자연스럽게, 편안히 하셨다고 하네요.
    <대학연의>는 남송말의 학자 진덕수가 지은 것으로 '대학을 자세히 풀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장은 어렵지 않은데 워낙 인용문이 <상서>부터 좔좔 나오는데 인용표시도 없이 알알이 박혀 있어서... 쉽지 않습니다. ^^;;
    토용샘이 짚어 주는 상서의 내용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2024-05-01 07:50

    제가 처음 고전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나마 재미있었던 것이 바로 그 '先王之道'였지요.
    요와 순의 아름다운(?) 효행과 백성들을 향한 진심에 대한 일화가 여느 소설 못지않게 흥밋거리였어요.
    토용샘과는 좌전강독도 함께 하고 있지만, 애매하게 읽어내는 것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그 꼼꼼함이 글에서도 잘 드러나네요.
    저는 '德'은 밖으로 드러나야 덕이라고 생각했어요.
    '덕을 쌓는다' '덕을 발휘한다' '저 사람은 후덕해보인다' 등등의 표현은 모두 외부로 나타나는 덕을 가리킨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툐용샘 글을 읽으니 새삼 알게 되는 것이, 그 덕을 덕성과 덕행으로 표현할 수 있네요.ㅎㅎ
    오랜 공부의 흔적이 드러나는 단단한 글, (부러워하면서 ^^)잘 읽었습니다.ㅎㅎ

  • 2024-05-01 09:29

    '도덕국가'라.....
    지금은 공화제와 민주주의인데, 이것과 도덕국가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고민이 많이 되네요.

  • 2024-05-01 23:46

    읽었다는 기억만 남고, 언제 읽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 <서경> ㅠㅠ 가끔이라도 되새김질 해보는 작업을 토용샘의 연재글과 함께 해봐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해요.

  • 2024-05-04 19:23

    글이 글쓴이를 닮는 걸까요? ㅎㅎ
    꼼꼼하게 되새겨 주는 토용샘 글이 참 좋네요
    윤리는 곧 실천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요 ㅠ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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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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