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8회] '짱어탕'을 끓이듯이 마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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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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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짱어탕을 끓이듯이 마감하기

 

 

몇 번이나?

 

목공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마감과 관련한 것이다. 가구의 마감은 보통 칠을 의미하는데, 경우에 따라 나뭇결을 덮는 페인트칠을 할 때도 있고, 나무 본연의 색을 살려주기 위해 오일을 칠하기도 한다. 나뭇결이 보이면서도 좀 더 진한 색상이나 다른 톤의 색상을 표현하고 싶을 땐 스테인을 칠한다. 이처럼 칠은 물론 미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원목 가구의 경우엔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다. 칠을 하지 않은 목재를 흔히들 ‘백골’이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잘 건조되어 허연 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백골 상태의 목재는 이물질을 바로 흡수해버린다. 칠을 하는 첫 번째 목적은 건조된 상태의 목재가 뭐든지 흡수하는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함이다. 식탁에 물 컵을 올려뒀을 때 컵 밑단의 자국이 그대로 남는다면 곤란하다. 뿐만 아니라 죽은 나무, 특히 겨울철 등산하다가 잘못 잡아 사고가 나기 십상인 바짝 마른 줄기처럼 나무는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된다. 칠은 이렇게 취약한 나무가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단단해지도록 한다.

 

칠이 어떻게 그런 효과를 가져 오는지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대부분의 물성이 그렇듯 목재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들이 있는데, 이 사이를 채우고 있던 수분들이 날아가며 목재가 변형을 겪는다. 수분이 충분히 날아가고, 또 충분히 변형을 겪은 목재를 가지고 가구를 만든 뒤에 하는 칠은 이 수분 구멍을 물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는 물성으로 다시 채워주는 일이다. 페인트는 막을 만들어 목재를 보호하고, 오일은 이 구멍들에 자리를 잡아 가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니스’라거나, ‘바니쉬’ 등의 마감재는 이 위에 한차례 더 막을 형성해, 외부 충격이나, 벌레, 균(곰팡이)의 침투를 막아준다.

 

이 작업은 그러나 이런 대단한 효과들에 비해 꽤 평범해 보인다. 작업을 위한 대표적인 도구는 두 가지인데, 붓과 사포다. 붓과 사포는 꼭 목공을 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신기하지 않은, 따라서 목공의 다른 공정들에 비해 특별한 기술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업이다. 그런데도 마감과 관련한 질문이 많은 이유는 뭘까? 학생들의 질문은 보통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몇 번이나 칠해야 하나요?” 혹은 “더해야 돼요?”

 

상황에 따라

 

‘강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집을 터는 강도robber말고, 힘, 단단함의 정도를 의미하는 강도strength 말이다. 투명한 오일을 백골 상태의 목재에 묻히면 나무가 살아있을 때에 가지고 있던 색깔을 회복하는 것이 선명히 눈에 보이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칠에선 그 이전의 상태와의 차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때부터 목재의 강도는 시각이 아니라 촉각의 영역이다. 물론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단단함의 정도 역시 꼭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서도 몇 가지 서로 다른 마감 상태의 나무를 만져보면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한 감각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정도의 칠이 가구의 마감으로 적정한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 혹은 그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 시행착오 끝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하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칠했을 때 가구가 충분히 방수를 하는지, 가구가 놓일 환경이 습할 때, 혹은 건조할 땐 어떤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지, 칠과 칠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로 조절하면 좋을지 등, 이런 문제들은 사실 한마디 말로 설명이 어렵고, 경우에 따라 너무 다른 답변들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의 질문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이고, 어떤 답을 해주어도 “1+1=?”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명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외우라” 했던가. 그럼에도 답변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선 페인트 혹은 오일 제조사가 제품에 써놓은 매뉴얼을 읽어준다. “프라이밍 오일 1-2회 도장, 하드 오일 1-2회 도장 후 동일 제조사에서 제작한 oo왁스를 사용하세요.” 물론 이 매뉴얼엔 언제나 단서가 붙는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하루 종일 떠들어도 모자란 이 ‘상황들’에 대한 설명은 내 몫이다. 물론 나는 이를 설명하는 일이 즐겁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상대가 듣고 싶은가는 논외로 하고 끝없는 무용담을 들려주는 선임이 된 것 같은 못된 기분으로… “예전에 어느 집에 테이블을 납품한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요약하자면 마감은 충분한 경험과 시간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만능 오일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이야기들이 너무 괴로웠는지, 한 학생이 그동안 내가 사용해본 적이 없는 칠을 가져왔다. “만능 오일, 상·하도 구분 없이 사용 하세요!” 미심쩍은 광고 문구와 함께 “2회 도장으로 끝”이라는 이 오일을 칠하겠다며 들고 온 것이다. 난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진 않았다. 10년 정도 나무를 다뤄 온 나에게도 마감과 관련한 경험과 시간이 충분하다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마감이 너무 많은 시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특히 날씨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아 기한을 지키지 못하거나, 이미 납품한 이후 환경에 따라 마감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생긴다. 그래서 더 간편한 소재가 나온다면 딱히 사용해보길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제품에 적힌 매뉴얼대로 사용해보길 권했고, 나 역시 시도해보았다. 칠은 어렵지 않았고, 그럭저럭 기존에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작업해야했던 제품에 비해 더 적은 횟수로 비슷한 상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찾아왔다. 가구를 완성하고 2-3개월이 지난 뒤에 학생이 문제가 생겼다며 다시 가구를 가져왔을 때, 칠이 하얗게 들뜨며 벗겨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내 경험상 첫 도장이 충분히 마르지 않은 경우나, 서로 다른 종류의 칠(유성과 수성)을 번갈아 칠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제품 제조사에 전화로 문의를 해보았지만 콜센터 직원은 환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 원인에 대한 진단은 없었다(당연하다. 그는 칠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가구 전체에 사포질을 한 뒤 재 도장을 해보았지만 동일한 문제가 반복해 나타났다. 결국은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가구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마감에는 워낙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꼭 새로운 제품을 사용해서 벌어지는 일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더 편리한 제품이 더 문제가 많다는 인과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조건에 따라 늘 해오던 제품을 가지고 늘 해오던 방식으로 칠을 해도 문제가 생길 때가 있고, 새로운 제품이 실제로 더 편리하게 좋은 효과를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게 되기도 한다. 위의 경우에서도 학생이 칠한 가구에선 문제가 생겼지만, 동일한 제품으로 내가 칠한 샘플은 특별히 이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우연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엔 분명히 생각해봄직한 점이 있다. 새로운 상품들은 더 자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내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칭했던 부분을 일축함으로써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것이다.

 

한 꼬집 넣어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는 책에서 ‘현대화된 가난’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동사가 명사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화된 가난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겪게 되는 절망들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가난이란 꼭 화폐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화된 가난은 창조성이나 주체성, 즉 우리가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삶을 스스로 가꾸는 능력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배우다’가 ‘교육’으로, ‘낫는다’가 ‘의료’로, ‘움직이다’가 ‘교통’으로….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행위들에 질문하기를 멈추고 서비스의 구매자가 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제도에 의존하게 된다. 단호한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물론 일리치의 말이 꼭 정답은 아니다. 지난 세기의 철학자인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명사화되고 전문화된 영역들의 순기능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그의 말에 공감하는 대목은, 우리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경험들의 가치를 회복해야한다는 점이다. 만능 오일은 분명 ‘마감하기’의 수많은 변수와 가능성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응의 경험과 능력을 명징한 광고문구와 ‘만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에 비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경험들은 너무 쉽게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오면 칠이 늦게 마른다는 사실, 유성과 수성 칠을 섞어서 쓰게 되면 때로 하얀 자국이 생기고, 어떤 칠들은 마르는 데 몇 주씩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건조되었을 때 발휘하는 놀라운 효과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나 칠해야 하나요?” 혹은 “더해야 돼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난 이 질문과 대답의 장면이 어떤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설프게 요리를 하다 간을 못 맞추는 상황이나, 어떤 재료를 어떤 크기로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를 모를 때 할머니나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이들은 “한 꼬집 넣어”라거나 “한소끔 끓이라”거나 “나박나박” 혹은 “숭덩숭덩 썰어 넣으라”거나, “팍팍 치라”거나 하는,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은 말들을 한다. 그것이 몇 그람인지, 몇 센티미터, 몇 분인지를 알려주면 쉬울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 그러한 보편적 단위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요리는 재료의 상태나 크기, 불의 세기나 팬의 강도 등 더 많은 변수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그들의 경험과 내 고유의 경험들이 합쳐지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아 “한 꼬집은 이정도지!”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정리하자면 할머니의 ‘짱어탕’이나(할머니는 절대 그것을 ‘장어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엄마의 가자미 미역국 같은 칠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학생들에게도 그런 것을 알려주고 싶다.

 

 

댓글 6
  • 2021-08-25 12:26

    ‘칠’에도 온갖 경험과 오묘함이 깃들어 있군요~

    근데 옛날엔 옻칠, 기름칠을 했다는데 서양에선 무슨 칠이 있을까요? 급궁금…

    • 2021-08-26 09:56

      서양에도 동양과 비슷한 것들이 많습니다. 식물이나 곤충에서 채취한 오일, 동물이나 광물, 꽃에서 착색을 위한 도료를 만들기도 하고, 이를 소젖과 혼합해 사용한 밀크페인트 등 다양한 종류들이 있어요!

  • 2021-08-25 13:16

    몇 년 전,  막 쓰던 긴 백골(?)목재들을 뜯어 상판으로 연결해 철재다리달아 큰 테이블을 만들었었는데ᆢ 바로 그 상판에 저런 일이 일어났었어요.

     

    먼저 올리브오일을 발랐었던가ᆢ 여하튼 그위에 바니쉬도 몇번 발랐던거 같은데 더운 날이 오자 허옇게  ㄱ각질이 ㅎㅎ

     

    대충 그대로 쓰기를 몇년째 하면서, 나중에 싹  밀고 다시 이쁘게 칠해야지 하고 있었는데ᆢ  무각질 얼짱이 될 가능성이 없는건가요?

    한번 저렇게 되면? ㅜ

    • 2021-08-26 10:01

      혹시 식용 올리브 오일을 바르셨나요? 올리브 오일은 경화되는 속도가 상당히 오래 걸리는 것이라, 바니쉬를 칠하기 전에 (생각보다 아주 긴) 충분한 건조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백골상태에서 '막 쓰던(?)' 시간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자국들이 누적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어떤 제품을 쓰셨는지, 어떤 상태인지 보아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2021-08-26 11:07

    한 20년 전 거실 탁자를 구입할 때, 무지 탁자에 동백오일을 발라주고는 기름병을 주고 가더라구요.

    나중에 또 바르라며.. 그런데 또 바르진 않았어요.

    동백 기름은 코팅된 느낌보다는 흡수된 느낌인데,

    손 때가 타서 점점 더 진해지는 느낌도 있고, 전 나름 좋더라구요.

     

  • 2021-09-09 13:35

     현장과 연결되서 인가요? 그냥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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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17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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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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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4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9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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