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9회]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 <짝코(1983)> - 한국고전영화_05

청량리
2023-05-02 02:22
365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만난 곳이 하필 ‘갱생원’이었다는 점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참고할 만한 영화가 있다.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15년 동안 군만두를 먹게 된 오대수(최민식)가 이우진(유지태)과의 첫 비대면 대화(산낙지를 먹었던 횟집 전화통화)에서 묻는다. “누구냐, 넌? 왜 날 가둔 거냐?” 그러나 우진은 ‘질문’이 잘못됐다며 웃는다. “아니죠. 지금 오대수씨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죠.” 과거의 ‘응축’된 시간인 현재는, 동시에 끊임없이 미래로 흘러가는 ‘이완’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다가올 것들에 대해서다. 그러나 송기열의 질문은 여전히 과거의 층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영화 <짝코>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가 아니라, “오갈 데 없이 늙어버린 두 사람이 왜 30년이 지난 시점에 굳이, 다시 만나게 됐을까?”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갱생원에 갇혀버린, 늙은 두 사람에게 ‘지금’이란 무엇이며, ‘미래’란 무슨 의미인가?

 

 토벌대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선글라스가 부러진 안경테에 투명알로 바뀐 것 말고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송기열. 그가 갱생원에 들어올 때 갖고 있던 물건이라곤 백공산의 행적을 낱낱이 적은 수첩과 그를 잡을 때 사용할 포승줄이 전부였다. 백공산으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한 송기열은, 그러나 다리가 부러지고 노숙자 신세에도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아이러니하게 백공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백공산, 짝코는 자신의 본적을 영광에서 여수로 바꾸고, 이름도 ‘김삼수’로 개명하여 이미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백공산은 빨치산이 아닌 ‘김삼수’로 죽으려 한다. 그 동안 숨어 살면서 못 본 세상을 보기 위해, 죽은 뒤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하고 싶다는 김삼수. 백공산이 현재를 살기 위해 자신을 변화하는 인물이라면, 송기열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늘 과거 속을 헤맨다.

 

열혈경사 송기열은 빨치산 백공산을 잡아 특진을 하게 됐다. 그러나 결국 백공산은 도망치고 송기열은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만화영화의 대본을 쓰는 등 변변찮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송길한 작가에게 영화사는 이번에는 ‘반공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제안한다. 그 영화의 감독이 임권택인데, 공교롭게 임 감독과 송 작가 두 사람 모두 이념문제에 엮인 가족사로 연좌제(친족 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3페이지 분량의 단편소설(작가 김중희)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 <짝코>(1980, 대종상영화제 각색상)는 각색과 각본을 맡은 송길한 작가와 연출을 맡은 임권택 감독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그 둘의 인연은 <만다라>(1981, 대종상영화제 각색상, 감독상), <길소뜸>(1986), <씨받이>(1987,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등 굵직한 작품들로 이어진다.

 

왼쪽이 임권택 감독, 오른쪽이 송길한 작가. "그 양반(임권택)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말 없이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짝코>가 그랬어"

 

 

 영화 <짝코>는 ‘끈질긴 토벌대가 결국은 망실공비를 잡는다’는 얼핏 반공영화의 줄거리로 보인다(실제로 ‘반공영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제목부터 ‘백공산’의 별명인 ‘짝코’인 걸 보면 감독과 작가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가만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 그 두 사람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을 안 그릴 수가 없었다.” 30년 만에 두 사람, 두 이념은 늙고 병든 상태로 만난다. 그들을 통해 ‘이념’에 사로잡힌 사회를 비판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을까? 빨치산과 토벌대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프레임’ 너머를 보지 못하는 시각을 비판한다.

 

 “한국전쟁은 여러 강대국들의 대리전에 불과”했으며, 한국사회는 그런 이념대결의 희생양은 아니었는지 영화는 묻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과 대사가 담긴 영화 속 TV토론 장면은 ‘검열’에 의해 삭제된다. 같이 TV를 보던 백공산은 “결국 너나 나나 불쌍한 사람들 아니냐”고 말하지만, 송기열은 끝까지 부정하며 받아들이질 못한다.

 

 서로의 목적은 달랐으나,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제발 죽을 때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죽자”는 백공산의 말에 송기열은 “그게 뭔 개소리냐”며 백공산의 멱살을 잡아 자신의 고향 가는 기차에 태운다.

 

 과거, 백공산이 도망치자 공비를 일부러 풀어줬다는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친 송기열. 설상가상으로 백공산을 쫓는 와중에 아내는 죽고 만다. 그럴수록 ‘백공산’만이 자신의 결백함을, 그래서 그의 삶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수 있었다. 한평생 빨치산으로 숨고 도망치며 사랑했던 사람마저 보내야 했던 백공산. “네놈 하나 찾기 위해 온 신경 쓰다가 눈까지 병”든 송기열. 그러나 그들을 편히 쉴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향가면 반겨줄 사람도 많겄지? 나도(백공산) 고향에 가고 싶었는데 면목이 있어야지. 사람은 죄짓고 살면 못 쓰는 법이여.

 

 두 사람은 겨우 서울역에 도착해 간신히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송 경사, 몇 년 만에 가는 고향이여? 반겨줄 사람도 많겄제?”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백공산, 아니 김삼수의 머리가 툭, 송기열의 다리 위로 맥없이 떨어진다. 허망하다, 허망해. 송기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 얼굴 위로 무언가 스쳐지나간다. 끝내 두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 했을 것이다. 아니, 가야 할 고향조차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 결국 너나 나나 불쌍한 사람들 아니겠냐.

 

 

댓글 2
  • 2023-05-02 21:08

    허망하다. 허망해
    그럼 김삼수가 죽은건가요?

    한번 봐야겠는데요.

  • 2023-05-03 06:56

    앗, 나도 못 본 듯. 나도 보고싶네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띠우
2024.04.28 | 조회 6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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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7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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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8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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