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8회] 불온함의 불온함 / <휴일(1968)> - 한국고전영화_04

띠우
2023-04-23 23:23
37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초기 시나리오와 현재 남겨진 작품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었다. 프롤로그는 주인공 허욱이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면서 죽은 허욱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에필로그는 시간이 흘러 부패된 허욱의 시체를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신원미상으로 처리되면서 끝난다. 현재 이 두 장면은 없고 허욱은 살아남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말을 바꾸고도 <휴일>은 끝내 심의에 통과하지 못했고, 결국 미개봉작이 되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의 전설로 기억되는 전옥숙(홍상수의 모친)이 기획했고, 백결이 시나리오를 썼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도 부모 세대의 인연은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이혜영이 연거푸 출연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 시계방향으로 감독 이만희, 제작자 전옥숙,  이혜영, 홍상수

 

<휴일>은 분실되었다고 알려졌다가 2005년 부산영화제가 주최한 ‘이만희 감독 회고전’의 준비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60년대 최고의 흥행배우 신성일이었다. <맨발의 청춘(1964)>에서 트위스트와 오토바이, 댄스홀을 무대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서구 사상의 자유로움을 표현했던 신성일이 이번에는 산업화에 적응 못한 우울한 청년으로 나타난 것이다(좀 새롭게 보였다). 안타깝게도 발견된 영화에는 삭제된 부분이 꽤 있다. 따라서 지금 관객들이 보기에 내용이 다소 불친절하지만 표현방식은 상당히 실험적이었다. 분명 젊은이들의 연애담을 다루고 있는데 프레임 속 세계는 생명력이 느껴지기보다는 시들어가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만희 감독은 자신이 1960년대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허욱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후 <휴일>은 초기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이 되었다.

 

휴일인가

 

줄거리는 어느 휴일에 만난 젊은 남녀의 하루, 그 시간에 대한 영화다. 청년 허욱은 연인인 지연(전지연)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돈이 없는 그는 택시기사를 속여 무임승차한다. 담배를 계속 얻어 피우지만 늘 성냥도 없다. 역시 가난한 지연은 약속 장소인 찻집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두 남녀는 어떤 가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황량한 남산을 배회한다. 이들에게 젊은이다운 패기나 밝음은 전~혀 없다. 흑백화면의 명암은 음울한 분위기를 더한다. 멀리서 애매하게 그들을 잡은 카메라는 회오리치듯 부는 흙바람 앞에 그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인물의 배치나 장면구조는 비현실적으로 배치되었고 빛은 어둠 때문에 알아챌 뿐이다. 대낮의 어두움을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연출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화면을 꽉 채우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감독이 흑백화면 속에 담은 이미지의 선택과 분위기의 설정은 영화가 스토리 중심이 아니어도 충분히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날 허욱과 지연은 낙태를 결심한다. 둘은 아이를 키울 능력도, 같이 살 여건도 안 된다. 지연은 흙바람이 휘몰아치는 남산에서 기다리고, 허욱은 돈을 구하기 위해 시내로 나선다. 허욱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무료함과 술로 휴일을 보내는 친구들에게 큰돈이 있을 리 없다. 허욱은 평소 무시하던 규제(김순철)의 돈을 훔쳐 낙태비를 마련하였다. 지연이 수술받는 동안 허욱은 술집에서 만난 여인과 애정행각을 벌인다(낮에 만난 친구와 하는 짓이 똑같다). 깊은 밤, 귓전을 때리는 교회 종소리에 정신이 돌아오지만 허약했던 지연은 이미 숨진 상태다. 뒤따라 온 규제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게 되자 미친 듯이 더 때리라고,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는 허욱. 그는 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던 과거를 회상한다. 지연과의 시간이 플래시백되면서 둘의 목소리는 보이스 오버되어 우리 귀를 때린다. 불빛 찬란한 서울 도심 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들의 대화는 울림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허욱은 휴일을 택시기사에게 사기를 치면서 시작했다. 또 도둑질한 돈으로 술집을 전전한다. 이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젊은 세대가 꿈꾸었던 혁명의 미래는 덧없이 사그라들어 버렸고 살아남은 자의 패배감이 가득한 휴일이다. 휴일은 일한 자들만이 쉴 수 있는 날이다. 이들에게는 독재화된 산업화와 발전을 위해 달려갈 일꾼이 될 생각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연명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평일에 일도 하지 않고 휴일에는 나와서 사기와 도둑질, 책임지지 못할 애정 놀음에 지쳐가는 젊은이들이라. 이는 너무나도 반사회적이다. 그런데 허욱에게 일주일이란 하루하루가 똑같은 휴일의 반복이 아니었을까. 언젠가부터 멈춰버린 현재의 시간, 허욱은 그 시간 안에 갇혀있었다.

 

불온함의 매력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 아저씨, 하숙집 아주머니, 일요일 그리고 모든 것. 난 다 사랑하고 있지. 내가 사랑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어. 이제 일요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 커피값이 없어도 돼. 이제 곧 날이 밝겠지. 새벽이 오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아니, 이발관엘 가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영화 <휴일>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가난한 청춘 남녀의 비극적 삶을 파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즉, 당시 민주화를 향한 4·19 혁명이 실패하면서 한국 사회가 안게 된 신구 세대의 갈등이나 독재적인 체제를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뭔 내용인지 잘 들여다봐야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편집과 단순한 이야기의 전개만 있을 뿐이다. 헌데 의미심장하게도 심의관이 제안한 것은 허욱이 머리를 깎고 군대 가는 결말이었다. 실제로 영화의 결말은 허욱이 자살하지 않고 군대에 입대할 것처럼 말하며 끝난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국가 체제에 순응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정권은 이 영화를 굳이 상영금지했을까. 여기서 이만희 감독의 독창적인 전달력이 돋보인다. 다시 떠올려보자. 이 작품이 심의과정에 듣게 되었던 말,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 이는 영화 속 등장하는 존재들 자체에서 풍겨오는 저 불온함 때문이다. 쓸모없는 존재들,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 자체가 지닌 불온함 말이다. 그나마 작은 균열이라도 꿈꾸었던 지연과의 사랑도 끝나버린 허욱은 피투성이가 된 채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며 거리를 내달린다. 이 상태라면 앞으로 누구의 말도 들을 것 같지 않다. 입으로는 머리를 깎겠다고 말하지만 도통 그럴 것 같지도 않다. 방향을 잃은 채 넋두리하듯 상처뿐인 말들을 끊임없이 내뱉으며 달린다. 개봉금지의 이유, 쓸모없고 위태로운 존재인 허욱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추방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결말을 바꾸고도 미개봉된 것, 거기까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도 좋겠다. 그 완성작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  김진규, 문정숙 주연의 <마의 계단>은 시종일관 긴장감 가득 -

 

사회비판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었던 그의 날카로운 시선, 영화예술은 이만희 감독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영화는 단순한 대중오락이 아니라 예술행위였으며, 많은 작품들이 모더니즘 영화를 추구하고 있다. 고정화된 형식을 파괴하고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도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특유의 저항정신이 만들어낸 불온함의 매력은 늘 과거와 현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눈과 귀를 닫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놓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인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작품의 절반 이상이 분실된 가운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귀로>, <마의 계단>, <0시> 등 서스펜스가 곁들여진 스릴러 작품이다. 1960년대면 알프레드 히치콕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으니 그와 비교해봐도 좋을 듯하다. 장르물 안의 위태로움과 불안함은 사회적 맥락으로 읽어내려갈 때 더욱 흥미로워진다. 때문에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던 심의와 검열이 아니었다면, 이만희의 작품이 어디까지 가능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 7
  • 2023-04-24 07:31

    앗, <휴일>이다!!
    계속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영화인 듯~~

    • 2023-04-24 10:48

      우리 이 영화도 10년전에 문탁에서 본 영화지요?
      60년대 영화보기 모임?

      그때 이 영화 뮈지? 하면서 본 기억이 ㅋㅋ
      이렇게 의미 있는 거였군요.

      띠우님 땡큐!

  • 2023-04-24 07:49

    요즘 읽고있는 <더블린 사람들>에 두 부랑자(남자) 얘기가 나와요. 그들의 일상이 영화 '휴일' 속 신성일과 비슷하죠. 가난하고 일도 없고 도덕적로는 타락하고...여자들도 마찬가지죠.
    아주 암울합니다.
    근데 '휴일'도 '더블린'도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씁쓸합니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영화인문학에서 이 영화 같이 볼때가 기억나네요.
    제가 남주, 여주가 캐릭터를 못 살렸다고, 전혀 가난해 보이질 않는다고 부르르~ 했는데. 여전히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배우가 쓸데없이 잘생기고 옷 잘 입으면 안됩니다.ㅋ

  • 2023-04-24 09:48

    불온함이란 말이 드물어진 시대라 문득 시차를 느껴봅니다. 불온함이 아니라 혐오가 넘치는 요즘.... 휴일은 어떤가 싶기도 하고요.

  • 2023-04-24 11:32

    보지는 못했지만 띠우님이 느낀 영화의 매력이 저에게도 느껴지네요.
    이번주 토요일은 드디어 함께 영화볼 수 있습니다!

  • 2023-04-24 21:47

    문탁에서가 아니면 안 봤을 영화들.. 그중 이 영화도 있었죠.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의 행동들,
    답답함과 암울함,
    졸음과 피곤 속에서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영화인데...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 2023-04-26 18:21

    약간 박하사탕이 생각나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띠우
2024.04.28 | 조회 4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1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8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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