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3회] 덧없는 죽음의 시대/ 이장호 <바보선언(1983)>

띠우
2022-03-14 21:34
233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덧없는 죽음의 시대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1. 절망에서 실험정신이 피어나다

 

1960년대 활발한 르네상스 시기를 보냈던 한국영화는 1972년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로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갔다.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과는 반대로 영화소재는 제한되었고, 반공영화나 정책선전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져 국가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이 시기 상업영화로는 하이틴물이나 에로영화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도 허가없이는 불가능해졌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연출을 시작했던 이장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국문화예술계를 뒤흔들었던 대마초사건(1975)에 연루된다. 이를 계기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의식화 과정을 겪는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을 이어서 선보이면서 197,80년대를 관통해 한국영화의 전통과 현대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영화감독을 자리매김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영화적 실험이 돋보였던 작품이 바로 <바보선언(1983)>이다.

 

 

<바보선언>에서 그가 온갖 영화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있다. 이장호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혹독한 검열을 경험한다. 내놓는 시나리오마다 거부당했던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고소 직전에 이르렀다. 어떤 영화든 찍어야 했던 상황에서 엉망으로 쓴 시나리오로 우선 검열에 통과한다. <바보선언>이라는 제목도 당시 문화관광부 직원과 말하다 우연히 정해졌고, 시나리오를 무시한 채 떠오르는 대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훗날 이장호는 영화라는 것을 망쳐놓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영화 전반부는 실험정신이 가득하다. 뜬금없이 등장한 이장호가 고층 건물위에서 투신자살하고 ‘활동사진멸종위기’라는 소리너머 프로야구 중계소리와 관객의 박수소리가 뒤엉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세상에서 영화감독의 자살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대놓고 울리는 ‘새타령’은 자조적인 모습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이 넘도록 대사는 들리지 않는다. 당시 비디오테이프를 빌렸던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말을 하는데도 대사가 들리지 않자 망가진 줄 알고 교환하러 왔다고 한다. 편집이나 소리의 사용은 지금 봐도 실험적이고 세련되었다. 컨베이어 벨트같은 고가를 달리는 차들 행렬이나 이대 앞의 전경을 고속과 저속으로 편집한 장면들은 독창적이다. 청량리역 앞에서 즉흥연기를 했던 배우들은 간혹 카메라 초점에서 어긋나기도 한다. 한참동안의 무의미한 화면전개나 이야기구조는 의식의 흐름을 단절시킨다. 영화 속에서 시각적 단절은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데 최소화한 대사, 장르가 뒤섞인 음악의 사용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다. 감독은 마구잡이로 영화를 찍다가 차츰 새로운 에너지가 얻게 되었다. 찍는 과정에서 동시대적 문제와 마주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보선언>의 양식적 실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두 개의 죽음을 마주하다

 

똥칠(김명곤)은 자살한 영화감독(이장호)이 남긴 물건들을 훔친 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러다 이대 앞에서 혜영(이보희)에게 반했고, 카센터에서 일하는 육덕(이희성)에게 부탁해 혜영을 납치한다. 그러나 혜영은 여대생이 아니라 매춘부였고, 똥칠과 육덕은 혜영이 사는 집창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울역에서 포주에게 잡혀온 여성을 보고 탈출시키려다 들켜 쫓겨나고 만다. 혜영도 합류하여 함께 길을 떠나 바닷가에서 한동안 지내다 헤어지게 된다. 서울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된 똥칠과 육덕은 상류층이 연 파티에서 혜영을 다시 만나지만, 그곳에서 부자들에 의해 혜영은 목숨을 잃는다. 혜영의 장례를 마치고 똥칠은 맨 처음 감독이 자살한 곳에서 투신하지만 육덕이 몸을 던져 그를 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여의도 광장에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영화는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뉘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찍던 전반부는 영화 자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장호 감독은 사람들의 무관심속에서 혼자 죽어간다. 흔히 1980년대를 3S시대라고 할 때, 그 속에는 영화도 포함되어 있지만 국가선전물이나 액션 혹은 에로영화들이 영화관을 뒤덮은 현실 속에서 감독은 예술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산업을 부흥시킨다는 정부정책의 이면은 온갖 방법을 통한 검열의 강화였고 대부분의 감독들은 영화판을 떠나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관심이 강해지면 그것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는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우연히 혜영을 매춘부로 등장시키면서 검열관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감독은 차츰 모자란 두 인물과 희생당하는 혜영을 통해 시대를 비꼬며 반어적인 영화문법을 선보인다.

 

난삽한 이야기로 전개되는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는 천민자본주의가 지닌 욕망과 그것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보여준다. 혜영은 스위트홈을 꿈꾸며 신분상승을 위해 애쓰지만 차가운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다. 개봉 당시의 포스터에는 ‘당신의 허위와 삿대질이 그녀를 죽였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혜영의 장례제의는 똥칠과 육덕에 의해 구슬프게 열린다. 상투적인 전개임에도 배우들이 보여주는 애도의 몸짓은 죽음을 소비하지 않는다. 전쟁 후 새로운 분위기의 사회를 꿈꾸던 한국 사회는 군부독재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져갔고 좌절감은 사회를 뒤덮었다. 또한 성장중심의 자본주의는 한국사회에 천박한 문화를 가져왔고 많은 이들이 그 속에서 희생당했다. 영화는 두 개의 죽음을 통해 그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똥칠도 자살을 시도하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육덕이 있어 실패하게 된다.

 

3.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이러다 전쟁 나는 게 아니냐는 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 엊그제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고 전염병의 시대도 끝나지 않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집도 한차례 코로나가 휩쓸리면서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립에 익숙해져 가고 감정은 둔화되어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게 죽어가는, 이런 시기에 똥칠과 육덕이 보여준 제의의 모습에서 기억과 애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죽은 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애도는 되돌릴 수 없는 상실에 대한 경험이다. 이러한 슬픔은 감정을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며 삶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낳는다. 이때 슬픔이라는 감정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다. 세상에서 사라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삶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찾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동시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영화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대표하는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는 바로 그 동시대성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속의 문제의식을 영화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응으로 이어진다. <바보선언>을 처음 보았을 때는 엄혹한 시대 속에서 보여주었던 감독의 독창적인 실험적인 영화기법에 눈이 갔었다. 그런데 요즘 기막힌 죽음의 상황들이 거듭되면서 영화 속에서 만났던 죽음들이 다르게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혜영의 죽음 앞에서, 전염병의 죽음 앞에서, 전쟁의 죽음 앞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바보 똥칠이와 육덕이같은 훌륭한 조상들이 계셔서 우리나라는 행복합니다

 

마지막에 선언하듯 울려퍼지는 아이의 나레이션이다. 이 울림은 사적 차원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나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이 있다. 이때 리추얼(ritual)이란 종교상의 의식 절차나 제의적 의례, 혹은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례적인 일을 뜻한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요즘 MZ세대가 추구하는 '리추얼 라이프'는 일상생활에서 일정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작은 행복들을 추구해가는 것을 말한다. 간단하게는 물 마시기나 계단 오르내리기부터 온갖 챌린지들도 해당된다. 소박한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의미있지만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소비 형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리추얼도 이런 맥락에서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타자의 죽음에 관심갖지 않는 시대, 슬픔이 사라져버린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듣는 이를 울컥하게 만드는 저 선언에서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연대에 대한 질문을 발견하게 된다.

 

 

댓글 3
  • 2022-03-16 09:04

    어제인가…장례식장을 찾지못해 어쩔 수 없이 4일장을 치루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슬픔과 애도가 살아진 시대에 육덕과 똥칠처럼 슬퍼하는 이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 2022-03-16 10:40

    바보선언....너무 오래 되었지만 ...몇 장면은 생각날듯도 해요.

    그런데

    갑자기 궁금증.

    왜 이장호 감독은 영화판의 조용필처럼 되지 못했을까? 

  • 2022-03-23 07:25

    <바보선언>을 어떻게 봤는지 어쨌든 본 기억은 나는데 

    그 때는 뭔 얘긴가 그랬던 기억만 남았네요. 영화에 대한 글을 읽고 있으니

    바보라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 무슨 말로 바뀌었을까... '시대와 불화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5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4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9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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