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2회]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청량리
2021-10-10 17:41
365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영화대로 42길, 2]

 

멋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네 멋대로 해라 | À bout de souffle, Breathless

장 뤽 고다르 감독 | 1960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소개하는 책마다 언급되는 대표작으로 대개 비슷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영화형식’이라든가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기법의 교과서’라는 평가는 ‘영화사상 최초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어쩐지 형식과 기법의 한계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었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더 이상 혁신적이거나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다르가 누벨바그의 친구들과 함께 내세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낡은(?) ‘점프컷’과 ‘핸드헬드’는 버리고 이 영화 <네 멋대로 해라>도 '제로'에서 다시 읽어보자.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

 

 

 두 번의 유럽전쟁(이른바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주도권도 완전히 미국 할리우드로 넘어가 버리게 된다. 이때 등장한 누벨바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넓게는 유럽영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였다. 영화의 탄생지인 유럽이 불과 50년도 안 되서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 하기 바빠진 상황, 젊은 비평가들은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봉건 중세시대에 대한 반성으로 ‘르네상스’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재건과 부흥의 실마리를 찾고자했던 움직임처럼, 누벨바그 역시 1920년대 ‘러시아 몽타주이론’과 함께 영화 속 카메라 자체의 미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통해 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찾으려 했다. ‘무엇을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는 과연 가능한가? 늘 그렇듯,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낳는다.

 

그들, 누벨바그는 영화에 대한 비평 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도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에 적합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영화 두 번 보기, 영화로 글쓰기, (직접)영화 만들기. 국내 영화비평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인 정성일 평론가가 직접 찍은 영화 <카페 느와르>(2009)가 관객과의 만남에 성공했는지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그건 영화에 대한 정성일의 ‘사랑’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한 평가는 고다르의, 아니 어쩌면 누벨바그들의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러브레터인지도 모른다.

 고다르의 편지 내용을 보자면, 영화 속에서 공간과 시간을 조작하는 흥미로운 장면 둘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아파트에서 미셸(장 폴 벨몽도)이 파트리샤와 함께 머무는 장면이다. 미셸의 머릿속에는 파트리샤(진 세버그)와의 잠자리만이 가득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만, 화면은 며칠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이리저리 편집되어 나눠진다. 두 번째는 자동차에서 미셸이 파트리샤를 태우고 파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이다. 왼편에서 미셸은 목소리만 들리고 화면은 파트리샤의 얼굴을 고정해서 잡는다. 역시 차 안의 대화는 계속되지만 파트리샤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거리는 끊임없이 ‘점핑’한다.

소리(대화)는 현재진행형인 시간 속에 있는데, 화면(공간)은 그와 상관없이 편집, 나열되다 보니 머릿속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건 멀미가 일어나는 상황과 유사하다. 눈(화면)으로 인식하는 화면과 귀(공간감, 균형)가 느끼는 진동이나 움직임이 서로 다르게 뇌로 전달될 때 멀미가 발생한다. 앞의 두 장면은 일부러 시공간의 감각을 깨뜨려 관객의 편안한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중 총 맞은 미셸이 비틀거리는 장면

 

 

허나 이 영화에서 앞서 소개한 점프컷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에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어가는 미셸의 뒷모습이다.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넘어질 듯한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가 함께 흔들리며 따라간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장 폴 벨몽도의 ‘등’연기는 일품이다. 게다가 넘어질 듯 위태로운 두 다리는 관객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그러나 몇몇의 눈부신 장면을 제외하면, 자동차와 여자에 집착하고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미셸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날, 침대 위에서 파트리샤가 윌리엄 포크너의 글 <야생종려나무, The Wild Palms>을 인용하면서 미셸에게 묻는다. 당신은 슬픔(grief)과 무(無, nothing)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 슬픔은 어리석은 것이며, 이것저것 복잡하다면서 미셸은 무(無)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고다르에게 미셸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선택한 ‘nothing’은 바로 고다르의 선택이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대모이자 고다르의 친구인 80대의 아녜스 바르다가 30대의 젊은 아티스트 JR과 함께 만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서 그녀가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후반부 장면이 있다. JR과 함께 고다르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바르다는 고다르를 회상한다. “그는 고독한 철학자야. 그는 영화를 창조하고 영화계를 바꿔놨지. 창조자이자 탐구자야. 영화계엔 그런 사람이 필요해. 지금도 좋아하지만 서로 못 봐.”

약속한 시간에 고다르의 집에 도착했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대신 바르다에게 보내는 암호만이 유리문에 적혀 있다. ‘카페 두아르네네즈에서. 그리고 <해변에서>’ 해석하면 이렇다. ‘바르다, 당신이 온 걸 알고 있어. 그리고 우린 아직 자크 드미를 기억하고 있지’ 먼저 세상을 떠난 자크 드미는 바르다의 남편이자 고다르의 친구였다. 노년의 친구가 어렵게 기차를 타고 찾아왔으나 고독한 그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새로운 영화이론의 정립과 함께 기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하며 스스로 영화가 되어야했던 장 뤽 고다르.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 역시 자신만을 위한, 한 편의 영화로 만들고 있는 듯했다. 제작, 각본, 감독, 그리고 관객 고다르. 허나 다르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영화적 집착이었을까?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 아녜스 바르다와 JR

 

 

미셸은 차를 훔치고 운전하고 도망 다니며 돈을 훔치거나 받으러 돌아다닐 때도 늘 혼자였다. 경찰이 쏜 총을 맞고 비틀거리다 거리에 쓰러져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눈을 감기듯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관계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고독에 가까웠다. 미셸의 죽음은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이 그 표면적 원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다르가 미셸의 고독한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부패한 기성세대, 알제리 독립전쟁이 드러낸 프랑스 사회의 추악한 이면들, 과거의 고전적 답습으로만 이어지는 영화계와의 결별선언이자 사회적 원인고발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인터뷰 장면에서 파트리샤가 어느 작가에게 인생의 목표를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불사조가 된 다음에 죽는 겁니다.”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만 생(生)·사(死)를 반복하는 고다르의 고독한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망설’ 루머를 뚫고 2018년 영화 <이미지의 책>으로 칸 영화제에서 깜짝 등장한 장 뤽 고다르. 스마트폰의 인터뷰 영상화면으로나마 그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글 : 청량리)

 

 

댓글 6
  • 2021-10-11 07:42

    1928년생인 아네스 바르다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났고

    1933년생인 장 폴 벨몽드는 지난 달에 세상을 떠났지요.

    그의 부고를 신문에서 접하면서 저도 <네 멋대로 해라>와 누벨바그와 아네스 바르다와  고다르를 떠올렸어요.

    그리고 나의 노년이 어떻게 될까, 도 생각해봤죠..ㅋㅋㅋ

     

    아주 잘 읽었습니다^^

  • 2021-10-11 08:04

    어렵지만, 이제 막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

  • 2021-10-11 08:40

    영화대로 42길 로고 이미지 멋집니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고다르가 하는 짓을 보면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참 괴퍅하고 기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그게 그의 삶이고 생각이고 스타일이었군요.

    바르다도 섭섭해하지 않고 충분히 이해했을 것 같네요.ㅎ

  • 2021-10-11 10:07

    얼마 전에 고다르를 만나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는 바르다의 모습을 보며 저런 노년을 맞고 싶다는 소화를 남긴 젊은 여성의 글을 읽었다. 그때 저런 노년이란 감정이 살아있는 노년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고다르보다 바르다가 더 생각나네. 이상하다. 왜 그럴까?

  • 2021-10-11 19:55

    저는 아직 이 영화를 선뜻 보지 못했는데,

    굉장히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관계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고독에 가까웠다.-

    미셸의 이야기지만 고다르를 설명하는 것 같은 이 부분이 유독  마음에 남습니다.

     

  • 2021-10-19 00:02

    젊은 친구와 전혀 이질감없이 친한 바르다, 먼 길 온 친구를 바람맞추는 고다르!

    두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5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0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7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0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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