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2회 춤 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2023-06-13 23:25
372

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길로, 몸의 중앙에 선 척추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기운의 길이다. 독맥은 아래에서부터 들이쉰 숨으로 위로 뇌까지 이른 후 내쉬는 호흡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도의 삶은 독맥을 타고 흐르는 호흡을 다스리는 삶으로 볼 수도 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리듬을 통해 터득된다. 이러한 리듬은 자연에서 낮과 밤, 사계절이 번갈아 돌아오는 리듬과도 연결된다. 자연의 리듬이 항상 하여 계절의 변화를 가져오듯이, 들숨과 날숨의 호흡처럼, 끊임없이 오고가는 가운데 일상의 중심을 잡는 삶이 곧 중도의 삶이다. 이때 중심은 양쪽에서 나뉜 평균점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균형점은 날숨과 들숨이 저절로 교차하며 생명을 기르듯이, 일상에서도 선과 악으로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은 채 일상에 응할 때 가능해진다.

 

 

춤추러 가다

 

 

  작년에 공동체 홈피에서 “몸에 힘을 덜어내면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는” 경험에 대한 글을 읽었다. 몇 년간 마을에서 주관하는 커뮤니티 댄스에 참가해 춤을 추면서 느낀 것이라고 했다. 춤에는 일도 관심이 없었지만,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에 솔깃해졌다. 몸도 마음도 평안한 경지야말로 내가 양생의 삶에서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글을 쓴 친구에게 언제 춤 강좌가 열리는지 물어보고 그 때를 기다렸다가 춤을 추러 갔다.

 

  춤을 배우러 간 첫 날, 바닥에 누워서 한 시간 정도 몸 풀기부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간 터라 따듯한 바닥에 누우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춤 선생님은 온 몸이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몸에 힘을 빼라고 했다. 그리고는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흐름에 집중하라고 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니 잠이 스르르 왔다. 잠을 쫓느라 몸은 뻣뻣해지는데다 누워서 점점 꿈지럭거리라는 자세도 영 어색했다. 선생님은 숨을 쉬는 리듬에 따라 그 숨을 손가락 끝까지 밀어보라고 했다. 우리 몸은 70 프로가 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호흡을 통해 그 흐름을 전신으로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온 몸으로 리듬을 타기는커녕, 어느 순간 잡생각을 좇아 생각 따로 숨 따로로 되돌아갔다.

 

 

 

  첫 시간의 어색함은 둘째 시간에도 이어졌다. 그나마 음악을 틀어 놓으면 그 음악의 리듬으로 몸을 꿈지럭거리지만, 누운 채로 한 시간이나 그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계속 호흡을 강조하는 샘의 말도 점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 번째 시간 다른 일정과 겹쳐서 춤 강좌에 못 가게 되었을 때 은근히 기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번 빠지고 다시 갔을 때는 또 어색하고, 좀처럼 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춤과 호흡의 상관관계

 

 

  『장자』의 「달생」편에는 헤엄의 달인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강을 유람하다 보았는데 어떤 이가 폭포아래 사십 리나 되는 급류를 타며 헤엄치고 있었다. 공자는 그가 죽으려는 줄 알고 제자들에게 구해 주라고 했다. 제자들이 쫓아가도 잡지 못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은 물에서 유유히 빠져나와 제방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공자는 그를 따라가서 헤엄의 비결을 물었다. 그 사람은 물의 길(道)을 따른 것뿐, 사사로이 따로 익힌 비결은 없다고 답했다. 소용돌이를 따라서는 물속으로 들어가고, 솟아오르는 물결을 따라서는 물 위로 따라 올랐다. 자연의 리듬은 따로 익히지 않아도 따를 수 있으니, 타고 날 때 따랐던 호흡으로 뭍에서만이 아니라 물에서도 편안해졌다고 했다.

 

 

 

  나의 경우 홈피에서 춤을 추며 ‘몸과 마음의 평안’에 도달했다는 문장은 솔깃했지만, 춤으로 그 상태까지 어떻게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막연했다. 더구나 내가 경험했던 춤은 대부분 막춤이라서, 온 몸을 있는 대로 흔들면서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호흡에 집중하라고 할 때마다 몇 번 리듬을 타기도 전에 이게 무슨 춤이냐 싶은 분별이 생겼다. 그러자 몸의 중심을 타고 흐르는 호흡의 리듬이 자꾸만 깨졌다.

 

 호흡을 통해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몸에도 차츰 균형이 잡히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몸놀림에도 힘이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뭍에서든 물에서든 편안히 그 흐름에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규칙적인 리듬에서 몸도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게 될 때 춤이 시작될 수 있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으로 균형 감각이 터득되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지가 ‘연독이위경’ 곧 중도의 삶이다.

 

 

어쩌다 보니 평안의 순간

 

 

  네 번째로 춤 강좌에 갔던 날이다. 그날도 한 시간 동안 바닥에 누워서 호흡을 따라 꿈지럭거리던 몸 풀기 시간이 지나고 일어서서 춤을 추는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마주보고 있는 짝이 상대의 몸을 터치해 주었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불안할 것 같았는데 웬걸 상대의 터치를 따라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리듬을 타는 몸과 호흡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어느 순간 몸의 움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잡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짝이 터치해주는 감각을 따라 온전히 춤에 빠질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았다. 다음 시간 다시 꿈지럭거리며 몸으로 호흡의 리듬을 익히자니 여전히 잘 안 되었다. 그사이 또 다른 일정이 겹쳐지면 춤 강좌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게 퐁당퐁당 가자니 안 그래도 가기 싫은 마음이 더 극성을 부렸다. 결국 마지막 시간까지 흐지부지하다가 한 시즌이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춤을 통해 ‘몸과 마음의 평안’을 터득하고 싶었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춤 배우기는 포기했지만, 그 경험으로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는 살펴보게 되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몸과 마음의 균형 감각이 무너져서 혹시라도 실수를 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호흡을 의식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언젠가는 매사를 평안하게 맞이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우선 호흡부터 제대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거기서부터 리듬을 타보자. 들이마시고~ 내쉬고~.

 

 

댓글 5
  • 2023-06-14 13:46

    그렇지 않아도 커뮤니티 댄스 시즌2에 참여하지 않아 춤 수업 참여 소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도 기린님이 춤 수업을 계기로 일상에서 몸을 돌아보고 호흡을 의식하게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이번 춤 수업은 '컨티늄'이라고 하는 몸 움직임으로 저도 처음으로 경험하고 어려웠습니다. 저도 따라하기 쉽지 않고 초반에는 지루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춤 추면서 느끼던 환희를 이번 시즌에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시즌을 지나면서 천천히 약하게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뭉치거나 결리던 근육이 풀어지는 경험은 좋았습니다. 하기는 쉽지 않지만 노년의 몸의 일상의 몸 치유로는 효과가 좋았습니다.
    소감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린님 이글 컴댄스에 공유해도 되지요?

  • 2023-06-16 18:08

    커플댄스 하러가신게 아녔구나ᆢ 글을 읽으니 명상이 생각나네요. 춤도 호흡을 중심 삼아 일상을 살피는 기예라니 저도 뭔가 춤이 급궁금해집니다ㅎㅎ 그나저나 누워서 배우는(?) 춤이라니 ᆢ 저거....... 춤 맞죠~~? 😊

  • 2023-06-17 08:14

    들숨과 날숨의 리듬, 그게 참 오묘한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할 터인데
    저는 가만히 쉬는 호흡도 버거워하고 있네요ㅠㅠ

    그나저나 춤추러 간다고 할때
    제가 떠올린 그림이랑은 사뭇 다르네요ㅎㅎ
    막춤에서는 어떤 것을 쓸 수 있을까요? 기린님~~~

  • 2023-06-18 09:41

    숨이 중요하군요. 생각해보니 감정이 숨으로 다 나타나네요.
    머리가 아닌 숨으로 몸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경지가 또 하나의 양생법인가봅니다.
    그나저나 춤 계속 해보시지....

  • 2023-06-19 10:37

    기린님하고 나이트 가야하나했는데 ㅋㅋ 명상적이네요. 실패담이라고 하기엔 알아차림으로 충만한 순간들이네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기린
2023.12.11 | 조회 38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기린
2023.10.25 | 조회 378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기린
2023.08.17 | 조회 285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기린
2023.06.13 | 조회 37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기린
2023.04.11 | 조회 423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