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머리카락 소동과 나이듦

먼불빛
2023-10-14 10:28
3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머리숱 많다”며 아이들도 놀라고, 미용실 원장님도 놀라 탄성을 지르던 탄력있고 윤기 넘치던 까만 머리. 엄청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생겼어도 높은 회복력으로 원상복구되던 머리. 그 머리가 세월에 닳고 닳아 다 사라지고, 가늘고 탄력없는 센 머리카락이 되어버렸다. 한 때 건강과 젊음의 지표였던 머리카락이 이제 늙음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내게는 이 머리카락의 늙음은 설상가상에 속하는 일,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폭풍 검색하여 가늘어진 머리카락을 보호한다는 이태리제 샴푸를 플랙스했고, 탈모 방지와, 머리카락을 보호하는 각종의 관리 기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모라던가 가늘어진 머리, 허옇게 세는 머리는 병도 아니요, 관리 부족도 아니요, 그저 모두 늙음, 나이듦, 노화라는 단어로 수렴되었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심을 일도, 돈들여 두피 케어를 받을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돈 좀 들이면 지금 보다 나으려나?.. 그런다고 왕년의 머리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나는, ‘염색은 하지 않는다’, ‘샴푸는 저자극성, 약산성을 쓴다’, ‘린스나 트리트먼트도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솔빗으로 살살 빗어준다’...같은 뻔한 결론을 정리하면서 머리카락 노화 대응에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 새로운 결심을 위해, 혹은 팍팍함에 지쳐 ‘에라 기분 전환이나 하자’며 미용실로 달려 갈 낭만이나 호기는 부리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메말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들 한사코 뽀글파마들만 하시는지 의아했던 것들이 가슴에 팍팍 와닿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 순간이 내 차례까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시간은 나의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공평하게도 말이다.

 

 

머리카락 참극

 

그러다 사단이 났다.

정년퇴직 후 생계형 취업에 성공하여 첫 출근을 준비하던 올해 어느 날 아침, 조금 이른 시간에 샴푸와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나는 오랫만에 잘 쓰지 않던 롤빗을 잡았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뒤통수와 정수리께 폭 가라앉은 머리카락들을 좀 살려봐야지... 하는 욕망에 이놈의 얇디얇은 머리카락을 롤빗에 찬찬히 자~알 말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뿔싸 너무나 잘 말은 탓에 머리카락이 롤빗에서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 머리카락을 살살 달래어가며 빼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정수리에 롤빗을 얹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1시간 동안 실삔으로 빗에 돌돌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빼보고, 트리트먼트도 해보고, 빗살을 가위로 잘라내며 엉킨 머리를 풀어내기 위해 온갖 실갱이를 다 해보았지만, 머리밑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고개도 아프고, 분명 슬픈데 내 꼴은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시트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않은가. 최악은 롤빗에 엉킨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내는 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미용실이 문만 열었어도 보자기로 머리를 싸매고 쫓아갔을지도 모른다. 머리카락만 온전히 사수할 수 있다면 부끄러움 따위가 문제랴. 그러나 야속하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결국 출근 마지 노선의 알람이 울리자, 다급해진 나는 눈물을 머금고 롤빗과 함께 엉켜있는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냈다. 젠장! 뭉툭하게 짤린 머리를 허겁지겁 감추고 쓰린 속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뛰쳐나갔다. 아, 오늘의 이 불행은 그놈의 싸구려 빗 때문인가, 내 얇은 머리카락 때문인가, 아니면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독거의 고독한 참상인가!

 

나이듦도 서글픈데, 머리카락 절단났네

 

다이소빗 싸서썼네, 롤말다가 사단났네

 

한올한올 소듕한데, 수백가닥 절단났네

 

애통하다 머리카락, 원통하다 머리카락

 

웃어야 할까나 울어야 할까나

 

위 두어렁셩 다링디리.... 얄라리 얄라...ㅠㅠ

 

 

퇴근 후 나는 욕실 앞에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욕실 바닥에는 검은 머리가 뒤엉킨 채 패대기쳐져 있는 빗,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들, 가위에 잘려 사방으로 튕겨져 나간 빗살들이 아침의 사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비디오 장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깟 머리카락이 뭐라고 그리 오랫동안 실갱이하며 시간을 허비했는지, 어이없고 슬프고 창피하면서도 쓸쓸한 마음을 쓸어내려 보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괜히 싸구려 다이소 롤빗 탓을 하며 욕실 바닥을 정리한다. 아, 품위없는 나이듦이여. 우아하게 늙을 수는 없는 거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슬프고, 때로 추접스럽고, 비참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구나. 

 

 

주름살 기여분

 

충격이 조금 누그러진 어느 날 나는 딸에게 “글쎄.. 이런 일이 있었단다...세상에...블라블라블라...휴..죽는 줄 알았다...나 덕분에 3분 지각했잖아, 첫 출근에..”하며 그날의 참상이 담긴 사진을 날렸다. 딸은 당장 내게, “헉...엄청 잘려나갔네..머리 괜찮아?” 하더니 “그러게 내가 그놈의 다이소 빗 버리라고 했잖아...엄마!!! 어휴, 안돼겠다. 내가 당장 D사의 에어랩을 사줄게. 엄마, 그걸로 머리도 말리고 손질도 해, 롤빗 없어도 돼. 아주 좋아~~”. 딸은 성격대로 위로와 빈축과 대안까지 원스톱으로 내놓았다. “아니 괜찮아, 이번에 롤빗 좋은 걸로 샀어..그 비싼걸...뭐하러 그런데 돈을 쓰니?.. 사지마!” 했더니 “안그래도 어버이날 선물 뭐할까 했는데, 그걸로 하지 뭐” 하면서 보기에도 품위 있어 보이는 D사의 그것을 어느날 사위와 함께 사왔다. 물론 내 얼굴에 생긴 번뇌의 팔자 주름 기여분을 따져 보자면 딸 몫이 50%(?)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니 받아도 돼.

 

처음엔 얼떨떨 했다. ‘저걸 내가 쓸 수 있을까?’ ‘자주 쓸까?’ 싶었다. 그런데 써보니 신기하게도 절로 머리카락을 롤에 말아주면서 컬이 살아나 없던 숱도 생긴 것처럼 머리가 풍성해졌다. 일순간 잘려나간 머리카락의 비통함과, 세월 앞에 장사 없다며 늙음에 한탄하던 쓸쓸함이 사라지는 듯 했다. ‘신기한 기술일세...’ 이제 머리숱과 탄력있는 머리카락 대신 값비싼 D사의 최신 제품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게는 이게 보톡스 같고, 상하안검 수술 같은 것이랄까? 하하. 제품 덕인지, 효심 덕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울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머리카락 소동극을 겪으며 늙음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던 나는 왠지 이제 한가운데로 쑥 들어온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노화란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일이고, 나이듦의 지혜란 몸과 마음의 협응을 천천히 조율해 가는 일일 것이다. 분명 어느날 갑자기가 아닐진데, 어느날 갑자기 배신처럼 느끼며 맞게 된다. 그리고는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대해 분노한다. 아주 단순한 동작으로 몇초만에 해결될 일이 그놈의 몸과 마음이 어그러지면서 느려지는가 하면 엎지르고, 떨어뜨리고, 삐긋거리고 한탄하면서 비로소 늙음과 마주서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나는 애써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야. 운이 좋았어. 60이란 나이를 온갖 위기를 넘겨가며 살아왔잖아. 머리카락 소동 덕에 한 고비 얼렁뚱땅 넘긴건지도 몰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늙어가지 뭐. 아직은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고. 행운이지 이만하면. 딸 덕에 D사의 제품도 가졌고, 까짓 화장으로 주름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때? 난 늙었잖아. 그럴 나이잖아. 안그래? 하하 하하하....

D사의 제품으로 조금은 풍성해진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며 거울을 본다. 양손바닥으로 볼을 탁탁 두둘기며 속삭인다. ‘됐어, 괜찮아 좋아!’

댓글 5
  • 2023-10-15 04:11

    ㅋㅋㅋ 웃으며 읽었어요~

  • 2023-10-16 09:11

    웃프다는게 이런거군요 ㅋㅠ
    저도 풍성하고 윤기나던 머리카락이 다 어디로간건지
    아마 세월따라 날아갔나봅니다 ㅎㅎ

  • 2023-10-16 19:13

    '생각해보니 노화란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일이고, 나이듦이란 몸과 마음의 협응을 천천히 조율해가는 일일 것이다. 분명 어느날 갑자기가 아닐진데, 어느날 갑자기 배신처럼 느끼며 맞게된다' 저는 노화와 나이듦을 비교한 이 부분이 좋았어요. 저는 아직 실감은 안나지만... 저도 어느날 갑자기 맞이하게 될까요.? ㅎ

  • 2023-10-25 13:25

    영업 성공하셨어요!! 저희도 D사 A제품 구매하렵니다ㅎㅎㅎ

  • 2023-10-25 20:53

    ㅋㅋㅋㅋ 😆 샘, 구루프 만 머리하고 공부하러 오시길~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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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불빛
2023.10.14 | 조회 360
먼불빛의 웰컴 투 6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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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불빛
2023.08.24 | 조회 301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먼불빛
2023.06.20 | 조회 403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먼불빛
2023.05.11 | 조회 407
먼불빛의 웰컴 투 60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먼불빛
2023.03.27 | 조회 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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