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Mamma mia ⃰ !! 딸의 결혼

먼불빛
2023-03-2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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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의 제목처럼 정말 머~~~얼고도 가까운 존재, 원수인가 싶으면서도, 친구 같고, 친구인가 싶다가도 철천지원수처럼 싸우며 얽히는 그런 이상야릇, 복잡 미묘, 통제 불능의 관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내 안의 절대 타자. 딸은 그런 존재다.

 

싸우는데 이유는 없다. 그냥 5분만 같이 붙어있으면 사사건건 시시각각 그 모든 것이 싸워야 할 이유가 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도 궁합이 있다고 했는데 딸과 나는 유독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성격, 옷, 음식, 스타일, 취향 그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긋났다. 성격상 그녀는 빨랐고 단순 직선적이었지만, 나는 매사 느리고 신중했다. 나는 데면데면하고 냉정한 데 반해 딸은 언제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공감해주길 원했다. 이런 어긋남이 아마도 우리가 가장 많이 싸운 이유일 것이다. 나는 모든 자식의 문제가 부모 문제라는 걸 인정한다. 수많은 날을 두고 반성했지만, 언제나 부족한 건 엄마인 내 쪽이다.

 

 

디어마이프랜즈 드라마에서 엄마(고두심)과 딸(고현정)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며 싸우는 장면 캡쳐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 캡쳐)

 

 

비교적 자유분방한 딸은 학교나 직장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엄마인 나와 떨어져 지낼 기회가 많았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의 충돌을 피해 보자는 이유도 없지 않았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한 번, 19살에 친구와 자취방을 얻으면서 한 번, 제주도로 취업하면서 한 번,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남친과 동거하겠다면서 한 번. 총 네 번에 마지막 한 번은 동거와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엄마인 나와의 동거에는 잠정적 마침표를 찍은 꼴이 되었다.

 

내가 딸과 심정적 분리를 하게 된 시기는 딸이 19살 되던 해 가을이었다. 딸이 친구와 함께 자취하겠다고 했고, 친구의 엄마와 나도 의논한 끝에 흔쾌히 승낙했다. 멀리 지방에 사는 친구 엄마의 각별한 부탁도 있고 해서, 이사 당일 이것저것 필요한 살림 도구를 챙겨 일찍 도착한 자취방에는 이미 딸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딸은 심드렁하게 “엄마~ 나하고 친구들이랑 해도 되니까 엄마는 돈만 주고 가~” 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딸의 눈빛, 친구들의 분위기에서 내 역할은 짐과 돈만 던져주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직은 엄마의 품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딸은 벌써 ‘엄마 없이 혼자 할 수 있다’고 내게 독립 선언을 한 꼴이다.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더니. 뭔가 가장 애착하던 어떤 것을 갑자기 일시에 빼앗겨버린 듯한 서운함이 몰려왔다.

 

“응... 그래... 여기...” 하며 돈을 건넨 후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온 나는 조조 영화관을 찾아서 들어갔다. 눈물 콧물 쏙 뺀다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서 내내 울고 또 울면서 마음을 달랬었다. 그렇다고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이 쉽게 끊어질까.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린 계속 끝없이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번 결혼식에서 전혀 울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그때 이미 너를 보냈고,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단다. 딸아….’

 

 

뭐가 그리 쉬울까?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냈던 딸이 집 밖에서의 개고생을 두어 번 겪더니 아예 집으로 들어왔다. 한 번씩 집을 들고 날 때마다 딸은 달라졌다. 송곳처럼 뾰족하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졌고 나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서른이 넘도록 한집에 있을 때는 이제 진짜 독립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잔소리에도 꿈쩍을 않던 딸이 절친으로부터 소개팅을 받은 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말 외출이 늘고, 외박이 잦아지더니 몇 개월도 안 되어 급기야 나에게 남친과 동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체 니들은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짐짓 언짢은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결혼 보단 동거가 낫지 싶었다.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대가 늦은 밤밖에 없고, 더 이상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다닐 체력도 안 되고 힘이 드니 서울에 있는 남친의 집에서 함께 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좋고, 결혼해도 괜찮을 정도의 사람이며, 동거하면서 천천히 지켜보고 결혼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인 나는 이렇게 빨리 결정할 문제인가? 얘들은 뭐가 왜 이리 쉽지? 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만가지 염려와 걱정이 앞섰지만 나는 노파심을 접고 동거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서른 중반이 넘는 딸년을 붙잡고 피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리고도 잔소리.

“술버릇 잘 봐야 해”

“엄마, 오빠 술 한잔도 못 마셔”

“아…. 그래...”

“많이 싸워 봐야 해”

“그래? 싸움이 안 되던데…. 오빠가 감정 고저가 거의 없는 사람이야.”

“흥…. 무슨 얼어 죽을 ‘오빠’는….‘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돈 씀씀이도 잘 지켜보고, 집안일은 잘해? 당연히 분담은 하는 거지?”

“엄마 한번 만나볼래?”

“아니 됐거든, 니네 연애에 엮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적어도 앞으로 1년이라는 기한을 이야기하며 그 이전에는 보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딸은 왜 1년이야? 물었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1년이라고 했을까? 그냥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관계에 신중을 기하기 위한 잠정적 유보 기간, 딸이 겪어내야 할 사람과 시간에 불필요하게 엮이지 않으면서도 잘 지켜볼 수 있는 그런 거리를 갖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내가 동거하는 것도 아닌데 참…. 딸과의 ‘멀고도 가까운’ 관계는 어렵다.

 

 

평범한 결혼식

 

 

해가 바뀌고 코비드-19가 서서히 진압되기 시작하자, 결혼 이야기는 상대방 부모님으로부터 먼저 시작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철 지난 옷을 갖다 놓고는 며칠 쉬어 가고 하는 식이었다. 가끔 보는 관계가 나쁠 리 없다. 어느 때보다 애틋하기도 했고, 우리의 대화 시간이 늘어났다 흐흐. 5분 정도면 말다툼이 시작돼 서로 휑하니 돌아 각자 방으로 가고는 했는데, 웬일인지 딸은 나와 있을 때보다 한결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평소에 내가 보지 못했던 딸의 모습이었다. 딸은 나와는 다르게 아이를 무척 좋아했고,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리고 단출한 식구보다는 대가족 속에서 북적대며 살기를 갈구했다. 정말 종자가 달라도 너무 다른 종자다.

 

‘결혼’을 반대하는 나의 시선을 딸에게서 거두어야만 했다. ‘어쨌든 여전히 결혼’인 딸을 위해 나는 동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딸의 남친을 보아야 했다. 첫인상은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강단 있어 보였다. 묻는 말에 구김 없이 대답하는 것으로 봐서 성품도 밝고 무던해 보였다. 서로 잘 어울렸다. 딸에게서 보였던 안정감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직관만으로 무엇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딸의 안목을 믿는 수밖에. 이럴 때 딸은 ‘그냥 좋다고 하면 될 것을’ 이지만 나는 ‘음…. 글쎄’ 거나 ‘나쁘지 않아’이다. 우리는 이래서 싸운다.

 

상대방(사돈) 또한 지극히 평범한 집안이라 아주 노멀한 결혼식을 원했다. 모든 준비는 두 사람이 적정선에서 합의한 대로 따르기로 했고, 일체의 혼수라던가 답례, 이바지 등등은 생략하자고 상견례에서 이야기가 되었다. 상견례, 사돈, 사위. 장모…. 세상 낯선 인간관계가 맺어졌다.

 

나는 결혼 비용을 굳이 소비하느니, 둘이 살 집을 좀 더 넓히길 바랐지만, 딸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로망’을 따라 결혼식을 치르겠다고 했다. 멋지고 우아한 드레스, 웨딩 카펫, 그리고 새로운 일가의 탄생 같은 것들. 여전히 굳건해 보이는 결혼제도, 약간의 형식이 젊은 세대에 맞춰 변형되었을 뿐 결혼 시장은 더욱 커지고 거대해 보였다. 딸의 결혼 준비를 위해 찾아간 강남의 결혼 컨설팅 업체는 놀랍게도 박람회 광장처럼 펼쳐진 대규모 공간에 책상마다 커플들이 상담하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소위 결혼 패키지 상품인 ‘스‧드‧메’를 둘러싼 웨딩플래너들과 결혼 커플들의 각축장. 결혼 커플을 보기 힘들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많은 젊은 커플들이 여전히 결혼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말이다.

 

 

 

(사진 출처: pixabay)

 

 

어쨌든 딸은 결혼했다. 모든 준비는 당사자 둘이 하면 되었다. 그 옛날 결혼식처럼 정신없이 혼수 준비에 바쁘거나 집안이 북적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청첩장도 온라인으로 돌렸고, 내가 한 일은 가까운 친구, 친지에게 전화 몇 통 돌리는 것과 결혼식 당일날 메이컵과 입을 옷 정도를 신경 쓰는 것이 다였다. 식에 초청할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자주 만날 일이 없는 4촌은 이제 친척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즘 문화는 결혼 당사자 친구들의 청첩장 모임이 중요한 관례처럼 보였다. 청첩장을 주기 위한 시간 투자와 음식비용이 만만찮았다고 했고, 삼십몇 년간의 자기 인간관계의 점수를 매기게 되더라는 말을 했다. 우리 때는 결혼식 전날 함을 팔기 위해 신랑 친구들과 흥정하며 실랑이하던 풍습이 있었는데(음…. 이게 언제 적 얘기인가...). 청첩장 모임 이것도 MZ들의 결혼 신풍속도 중 하나일까? 결혼식 사회는 딸의 절친이 씩씩하게 진행했고, 딸은 혼자 음악에 맞춰 입장했다. 둘이 작성한 성혼 선언을 읽었고, 바깥사돈이 축사를 유쾌하게 했다. 노래를 전혀 잘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삑사리를 내며 축가를 불러댔다. 사위가 내게 큰절을 올렸는데, 보통은 엄마들이, 가끔 아버지들까지 눈시울을 적시던데 나는 울지 않았다. 딸도 울지 않았는데, 사위가 울었다.

 

 

모녀가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딸의 결혼은 노년기에 접어든 내게 닥친 큰 변화 중 하나이다. 그동안 딸은 내 인생을 지탱해주는 가장 큰 이유이자 삶의 동력이었다. 이제 주민등록등본에는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한편으로는 쓸쓸함이 교차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딸의 결혼은 뭔가 마침표를 찍었다기보다는 또 다른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기울이고 있다. 나는 그 많은 엄마들이 갔던 길, 딸의 경력 단절을 염려하며 대신 아이를 봐주고, 살림해주면서 그렇게 노년을 보내버리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물론 딸에게 나는 아이를 전적으로 봐줄 생각도 없고, 그리고 내 노후를 기댈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다. 여전히 일 가정 양립이 어려운 시대, 허둥댈지도 모르는 딸을 내가 과연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혹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운명의 장난 같은 일들이 내 딸만 피해 가라는 법은 없으니, 나는 엄마로서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할 시대, 내 노년을 나는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까?

 

며칠 전 모처럼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간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딸은 또 달라져 보였다.

“다음 생에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뭐야? 이 반성 모드는? 나 또 태어나야 해?”

“아니 갚아주고 싶어서지..ㅎㅎㅎ”

아니 왜 다음 생일까? 이생은 망했다는 건가? 하긴 모녀지간이 아니면 그 지난한 우여곡절의 관계를 어떻게 짐작하며 헤아릴 수 있을까. 앞으로도 우리 모녀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엮일 것이다. 하지만 엮일 때 엮이더라도 이 질긴 모녀 관계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서로의 삶 안으로 미끄러져 허우적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내가 잘 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내가 계획하고 있는 ‘나의 노년 프로젝트’를 딸에게 이야기해야겠다. 나의 이름으로 살고,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나의 언어로 말하는 그런 노년을 살아가기 위한 프로젝트. 그래서 딸에게 말하리라. 우리는 이제 주어진 역할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생을 살아 보자고 말이다. 만날 때마다 우리의 이야기 시간이 더 길어졌으면 좋겠고, 내가 잘 서고자 하는 나의 노년이 딸에게도 좋은 기운으로 가 닿았으면 좋겠다.

 

“다 잘될 것이다, 그리고 다 잘될 것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 또한 다 잘될 것이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파커 J. 파머/247p. 노리치의 줄리안이라는 중세 영국의 여성 은수자가 쓴 <신성한 사랑의 계시>에서 인용)

댓글 14
  • 2023-03-27 19:39

    딸의 결혼식을 치르며 이런 느낌이셨군요^^ 큰일 치르셨네요!

  • 2023-03-27 20:59

    ‘나는 그때 이미 너를 보냈고,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단다. 딸아….’요 부분에서 찡했어요~예상밖에 사위가 울었다는 대목도 재미있었고요,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갈 두 여성의 앞날도 응원하게 됩니다~!

  • 2023-03-28 08:26

    애쓰셨네요. 공감가는 대목이 많은걸 보니 먼불빛님과 같은 시대 사는게 맞군요~~
    노년 프로젝트 다 잘되기를요^^

  • 2023-03-28 09:01

    '그래. 결혼보다는 동거가 낫지 싶다' ㅎㅎ

    가족의 구성에 대한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으면...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바라봅니다.

    늘 응원합니다. 먼불빛샘^^

  • 2023-03-28 09:28

    뭉클울컥 하며 읽게 되네요
    먼불빛샘 애쓰셨고 또 응원합니다!
    다음글도 설레며 기다려요^^

  • 2023-03-28 10:03

    10년 전 저 결혼할 때, 엄마한테 통보만 하고 제 맘대로 다 했을 때 엄마의 난처해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ㅎㅎ
    딸 입장에선 꽤나 파격적인 결혼식 (혼자 입장, 여사친의 사회, 혼수, 답례 생략 등)을 했다고 생각했을텐데 먼불빛샘 눈엔 오히려 다른 면에서 거대해보였다는 것도 너무 재미있는 부분이에요. 자식 입장에서 바라본 부모 이야기는 많은데 부모 입장에서 하는 성인이 된 자식과의 이야기, 소중합니다. 뭉클하게 읽었어요. 계속 기다릴게요!!

  • 2023-03-28 12:35

    모든것이 다른 딸, 공감받기를 바라는딸과
    데면데면한 엄마~. 공감을 넘어 동감입니다^^.
    결혼시키며 오간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것 같아요~.
    축하드리며, 노년의 프로젝트도 잘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 2023-03-28 17:48

    뵌적은 없지만... 와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세요? 글이 너무 재밌고 생생하고 썜도 멋지시고. 앞으로 글만 쓰시며 지내셔도 내내 바쁘실 것 같아요. 글 많이 쓰시면 좋겠어요. 계속 잘 읽겠습니다^^

  • 2023-03-29 05:56

    먼불빛님^^ 이멀고도 가까운 모녀 관계~~ ㅋ 팔십 중반을 넘어가는 저의 모친이 떠오르는 군요^^ 먼불빛님의 노년프로젝트를 응원합니다~~

  • 2023-03-29 22:06

    집을 들고 날 때마다 딸이 달라졌다는 부분에서 울컥했습니다. 딸을 바라보는 먼불빛님의 눈빛에서 저희 어머니가 생각난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함께 살게 된 칠십대 후반이 되신 어머니를 보며 엄마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이제 제가 하게 됩니다. 아마도 노년 프로젝트에 언제나 딸은 연대자 중 한 명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2023-04-05 22:47

    물흐르듯 흐르는 샘의 이야기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는 질긴 모녀 관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먼불빛님은 질색이시려나요? ㅎ) 제 엄마도 제가 결혼하셨을 때 먼불빛님과 같은 마음이셨으려나..생각도 들고요.

  • 2023-04-08 23:45

    글을 읽으며 서로 다른 성향의 두분이 서로 용신 관계일 수 있겠다라 생각이드네요~^^;;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모녀의 관계가 재미있네요~~

  • 2023-04-12 20:26

    이리 글을 맛깔라게 잘 쓰시다니요.. 먼불빛님의 책 출판을 고대해봅니다.~~

  • 2023-05-08 23:49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따님이 굉장히 똑순이일 듯합니다. 오죽하면 동거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좋은 남자를 골랐을 거라고 믿음이 갑니다!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먼불빛
2023.10.14 | 조회 360
먼불빛의 웰컴 투 6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먼불빛
2023.08.24 | 조회 302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취업을 했다     작년 정년퇴직 후 8개월이라는 실업급여 수급의 막바지가 다가올 즈음,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재취업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나 내 나이와 경력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60이라는 -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축에도 못 끼는 - 나이처럼 절망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분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을 차일피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일하지 않겠냐는 전 직장 팀장으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조심스럽게 내 의향을 묻던 그는 주30시간(하루 6시간) 일자리라는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사실 퇴직하기 전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버거울 수 있는 나이라는걸 깨달은 탓에, 중‧고령 노동 시장에서 나이 많은 나를 헐값이 아니고서는 받아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달은 탓에, 나는 재지 않고, 그냥 넙죽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나랑 안 맞으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근무할 곳은 정년퇴직한 전 직장에서 이미 업무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곳이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K는 사무국장이면서(헐... 나이 차는... 비밀!) 작년에 입사하여 혼자 일해 왔다. 올해 경기도와  00 재단으로부터 프로젝트 예산을 받게 되면서 자신을 보조할 인력이 필요했지만, 신입을 받고...
먼불빛
2023.06.20 | 조회 404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먼불빛
2023.05.11 | 조회 407
먼불빛의 웰컴 투 60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맘마 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놀라움이나, 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세상에, 맙소사!", 직역하면 "우리 엄마"다.(엄마는 성모마리아를 의미)/위키백과, 나무위키 참조     지난 2월 나는 딸의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결혼보다 더 낯설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딸의 결혼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결혼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반댈세’라는 말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했고, 그런 이유로 나도 이혼했으며, 좌우지간 남녀를 떠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에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필수’였던 결혼이 요즘 세대에겐 ‘선택’이 되었다(억울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3포, 5포 세대(삼포:연애, 결혼, 출산/오포:삼포+취업, 주택을 포기)’처럼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 비혼과 동거족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다양하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금기어로까지 등장할까. 여하튼 그래서 내 딸만은 좀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혼 후 단출한 2인 가족이 늘 외로움과 결핍의 근원이었던 딸은 전형적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고자 했다. 내가 다르게 살지 못했는데 딸에게 다른 삶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결혼은 반대’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어야만 했다.     “돈만 주고 가~”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다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
먼불빛
2023.03.27 | 조회 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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