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이 날씨에 일은 무슨 일

문탁
2023-09-11 07:07
357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접시 물에 망할 뻔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바쁜 4월을 보내고 노동절 다음날, 한 달 동안 만든 가구를 차에 가득 실고 납품 길에 나섰다. 핸드폰 어플에는 4~6일까지 빗방울 모양이 있었지만, 이미 4월에만 3번 정도 기상청에 속은 뒤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젖으면 안 되는 비설거지만 대충 해 놓고 출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치명적인 실수였다.

안동, 군위, 서울을 거쳐 가구들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오랜만에 여유로운 며칠을 보냈다. 밀양 목공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종일 비가 쏟아부었다. 날림으로 만들어진 건물에 목공소가 세 들어 사는 터라, 비가 오면 자꾸 바닥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저번에 비가 들이치던 곳에서 또 물이 들어왔겠다는 생각 정도를 하면서, ‘아 또 눅눅하겠네’ 투정을 뱉으며 내려왔다. 그렇게 도착해 목공소 문을 딱 열었는데, 상상도 하지 않았던 최악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 목공소가 침수되어 목재가 젖은 모습

잠긴 목재에 생긴 얼룩으로 물이 어느 정도까지 차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닥 면적의 절반 정도가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아니 잠겨 있었다. 잠겼다고 하기에는 고여 있고, 고였다고 하기에는 물이 너무 많았다. 콘센트와 목재는 둥둥 떠 다니고, 전선도 모두 물 밑에 있었다. 난생 처음 마주하는 물난리였다.

물에 잠겨 있는 전기선을 보고서는 본능적으로 고무 장화로 갈아 신었다. 작업대 위를 돌다리 건너듯 건너뛴 나는 분전함으로 가서 차단기부터 내렸다. 비는 세차게 내리는데, 전등도 켤 수 없었다. 컴컴한 작업장에서 바깥에 나가 배수로를 파 내고, 물통과 쓰레받기로 물을 퍼 내고, 축축하게 젖은 톱밥을 손으로 걷어 냈다.

목공 기계의 모터는 대개 안전성을 위해 낮은 쪽에 위치해 있다. 이런 특징을 가진 (내 전재산인) 목공 기계들이 고장났을까봐 마음이 너무 떨렸지만, 그렇다고 흥건히 젖어 있는 기계를 켜 볼 수도 없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3일 내 쓸고 닦고 기름칠을 했다. 기계가 말랐다 싶은 것부터 하나씩 돌려 보고, 고장난 것들은 따로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나서야 밀린 일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값이 많이 나가는 기계들은 괜찮은 듯하다. 이번에야 접시 물 정도였지만, 만약 서울에서 하루 더 놀다가 왔거나, 비가 조금만 더 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온 몸이 스트레스로 당긴다.

먹고사는 일을 위협하는  기후

목공소 앞에는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올해는 봄이 왔는데도 산의 색깔이 바뀌지 않았다. 작년 밀양에는 5월에 단 하루만 비가 온 데다가, 5월 31일에 시작된 산불이 일주일 넘게 온 산을 태웠기 때문이다. 여름의 시작에 난 대형 산불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생기가 한창 가득한 녹색 이파리들이 타면서 어마어마한 연기가 발생했고, 연기 때문에 헬기가 진입을 못해 진압이 더 늦어졌다.

그런데 올해 5월에는 1961년 기상 관측 이래 밀양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일강수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수로를 미리미리 청소하지 않은 내 잘못이 훨씬 크지만 어떻게든 다른 것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난생 처음 기상청 누적 강수량 통계를 찾아본 것이다. 이틀 동안 180㎜가 넘는 비가 왔다.

이제 과거의 통념은 쓸모없어졌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쌓아 온, 기후 통계나 전통적 절기 같은 것들은 모두 옛말이 되었다. 어떤 경험치와 데이터도 없는 새로운 시대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후 위기’라고 부른다.

 

▲ 2022년 5월, 밀양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

5월이라 한창 물을 머금은 나무들이 불타면서 엄청난 연기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독자 제보

 

나는 시커멓게 타 버린 채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조소했다.

“좌측은 송전탑 뷰, 정면은 산불 뷰, 우측은 아파트 단지 뷰…… 여기가 밀양에서 제일 경치가 좋다!”

산불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기후 위기 집회에 나가서 이렇게 살면 다 망한다고 외쳤지만, 사실 나의 일상에는 조금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월의 물난리를 맞이하고 난 지금, 올해 여름에는 비가 엄청 올 거라는 뉴스들을 보면 아득한 두려움이 생긴다. 목공소는 올 여름을 무사히 날 수 있을 것인가. 시간당 100㎜의 비가 온다면, 나도 논에 농부처럼 밤새 목공소에서 워터 펌프를 들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어야 할 것인가. 그 전에 비를 뚫고 목공소까지 도착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올해는 서울이 잠기는 일이 없을까? 도시 홍수 대책은 작년과는 달라졌을까? 한여름 야외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을 보호할 강력한 법적 장치가 생겼는가? 예측 불가한 기후로 전세계에서 난생 처음 겪는 재난들이 일어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조차 관심들이 없다.

이미 많은 이들이 평생 살아온 삶터를 잃었다. 날씨가 악조건으로 작용할수록 사고는 많아진다. 여름에는 노동자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죽고, 겨울에는 몸이 얼고 감각이 둔해져 일하다 추락사한다. 사계절 내내 비닐하우스 안에서 농사를 짓는 외국인 노동자들, 긴급 보수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출동해 사회 유지 시설을 고치는 노동자들……. 세상을 지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 재난에 대비할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대비할 돈이 없어서 재난을 맞는다. 모든 것이 불에 타고, 물에 잠겨 버린 후에는 더 가난해진다.

산업 혁명 이후 탄소를 어마어마하게 배출하면서 인류는 줄곧 같은 기조를 유지해왔다.

‘기후? 환경? 그딴 게 내가 먹고사는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이제는 기후가 먹고사는 일을 정통으로 위협한다. 기후 위기가 돈벌이를 위협하고, 농부의 쌀농사를 위협하고, 목수가 지은 집을 부순다. 강릉 경포 해변의 펜션들이 산불로 한 순간에 다 타버렸다. 경제 성장도 최첨단의 기술도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없다. 이미 늦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세상은 망한 것 같다.

 

▲ 땀으로 젖은 작업복

작년 8월 한여름에 작업을 한 뒤 찍어 봤다. 물 한 방울 없이 모두 땀이다.

살아남기가 아닌, 살아 내기

세상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집회에 자주 가는 편이다. 집회가 지금의 삶을 당장 획기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래도 집회는 막막한 마음을 뚫어 주는 효과가 있다.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한창 열심히 하던 때에는 “핵 발전소 폐쇄하라! 송전탑을 뽑아 내자!”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그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핵 발전소 없이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요? 경제적이고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가능해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기분이 나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편하고 돈이 많이 들면, 사람이 죽어도 괜찮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던 내가, 그들과 같은 식으로 질문할 수 있다고는 생각치 못했다.

“기후 위기 그거 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데 기후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나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별일 없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송전탑 반대 운동과 달리, 기후 위기와 관련된 집회를 나가서 항상 구호를 외치기가 껄끄러웠다. 바로 위와 같은 질문에서 비롯된 마음이었다.

가구 제작 의뢰가 2주만 없어도 목공소 재정은 휘청거린다. 기후 위기 구호를 외치면서도, 덜 소비하고 작게 생산하면 가난해질까 두려워 마음 한 켠이 껄끄러웠던 것이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입은 상처가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한쪽에서는 오히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 화석 연료가 아닌 핵 발전을 계속하자는 주장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혼잣말을 흘린다.

‘어차피 내 생은 상처로 어그러졌으니, 너네도 다 망해 봐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별일’이 없을 가능성은 아주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목공소가 작은 수해를 입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행히 기술이 많은 인간이니, 이리 틀어막고 저리 외면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 속에 오는 고통과 불안이 제일 두렵다.

목공소가 망하면 안 된다. 목공소를 유지하고 삶을 살아 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은 혁명이 필요하다.

에너지원을 바꾸기 전에, 우선 에너지 수요부터 줄여야 한다. 현재의 전기 수요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충당하려면, 땅값이 싼 곳은 모두 태양광과 풍력 발전기로 뒤덮일지 모른다.

또 서울 같은 대도시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서울이 있는 한, 서울로 전송(電送)되는 초고압 송전탑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프면 병원에 바로 접근할 수 있고, 적당한 일거리와 적당한 놀거리가 있는 작은 도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여기에 사회 안전망이 튼튼히 마련돼야 한다. 일터가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우면 당연히 안전한 곳에서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쉬더라도 생계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안전망이 필요하다. 집이 물에 잠겨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한다. 강남이고, 밀양이고 더 많은 안전한 공공 임대 주택이 필요하다.

써 놓고 보니, 돈 버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이미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떼돈을 벌자고 목공소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가구가 필요한 곳에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만들고 싶다. 대통령도, 국회, 기업도 다들 돈놀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완전히 다른 정치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살아 내려면 싸워야 한다.

마지막에 와서 ‘싸우자’니, 독자 여러분은 불편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차피 싸움을 혼자 할 순 없다. 즐겁게 싸우면 투쟁도 즐거운 삶이다. 적게 일하고 신나게 싸우자.

지난 5월 16일 강릉의 한 친구가 제로 웨이스트 가게를 만든다기에 손을 보태러 갔다. 그 날 강릉 최고 기온이 34도였다. 5월에 34도라니.

“이 날씨에 일은 무슨 일이냐!”

댓글 7
  • 2023-09-11 10:22

    정말 발등의 불인데
    산불에 지진에 폭염에 폭우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저는 참 심란하네요 ㅠ
    재생에너지가격이 더 비싼 나라는 전세계에서 4% 밖에 안된다는데 한국이 거기에 속한다고 하니 그것도 심란하고
    뭐라도 하긴 해야겠죠

  • 2023-09-11 12:29

    살아남기가 아니라 살아내기 라는 표현이 맞는 말이네!! 이번 글도 속쓰리게 읽었습니다...

  • 2023-09-11 15:09

    '별일' 속에서 살아내기, 어진의 일을 읽으며 나는 어떤 일을 '별일'이라고 여기는가 생각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09-11 18:15

    서울 같은 대도시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어진사람의 어진 글을 보면, 용인도 별 다를 게 없어보인다. 인구 100만 특례시에서 공부하는 문탁은 어떨까? 문제는 삶의 속도가 아닐까? 이 날씨에 공부는 무슨 공부냐! 어진사람의 어진 글을 읽으니 어지럽네요. ㅎㅎ 늘 잘 읽고 있습니다.

  • 2023-09-11 21:52

    밀양가면 어진이의 목공소도 꼭 가보고 싶다!

  • 2023-09-12 12:47

    작업복.....너무 두껍네. 여름용은 없남? 얇으면 보호가 안되서 ?
    목공소에는 누전 차단기를 좀 민감한 것으로 달아야 하겠네..... 바닥에 물이 흥건한데, 차단기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정격감도전류가 높은가벼 ~~~
    정격감도전류 15 mA 이하, 동작시간 0.03초 정도?

  • 2023-09-13 13:15

    읽고 잠시 머물다 갑니다..
    글 고맙습니다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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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20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심장병은 응급실 1순위 ​ 두해 전 즈음, 2020년 12월 초 겨울이었다. 11월부터 바깥에서 데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손도 얼고 드릴도 어는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감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날도 종일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 종일 바깥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몸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진다.   겨울에 바깥에 오래 나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는데, 부었던 몸이 녹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자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길래 ‘어 몸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니 2ℓ짜리 생수가 거실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있는 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서야 무서웠다.   “아…… 나 죽을 뻔했네?”   나는 보통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외상이 없으면 병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느낀 적 없던 공포가 찾아왔다. ‘혼자 사는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쓰러지다가 재수없게 머리를 박았거나 심장이 멈췄더라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동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부정맥이 의심된다며 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의뢰서를 받았다. 뭘 대학 병원까지 가냐,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 쫄아 버린 나는 결국 응급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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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1.13 | 조회 283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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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0.10 | 조회 340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 ​ ​ 접시 물에 망할 뻔 ​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 ​ ​ 접시 물에 망할 뻔 ​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문탁
2023.09.11 | 조회 357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문탁
2023.08.10 | 조회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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