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비상사태
요요
2023-09-21 21:18
385
그러니까 어제였다.
뚜뚜뚜뚜, 뚜뚜뚜뚜.. 여러 차례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만 들리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러번 누르는 소리가 반복될수록 딸깍하며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졌다.
결국 아버지는 집 현관의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아 문을 열지 못했고, 참다 못한 내가 나가서 문을 열어드렸다.
"아버지, 몇 번을 누르셨어요?"
"1**9 아니냐?" 아버지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
당연히 틀린 번호다. "1**2에요." 정확한 번호를 알려드렸지만 아버지 귀에는 가 닿지 않는 듯했다.
혼란스런 상태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셨다. "그렇지! 1**6이지."
몇달전에 동생이 돌봄할 때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 일은 빠르게 잊혀졌다
나도 언젠가 머리가 하얘지면서 집 비번이 기억이 안나서 땀을 뻘뻘 흘리다 딸에게 전화한 적이 있다.
그뒤로 집 비번을 무작위 숫자 배합이 아니라, 어지간해서는 잊어버리기 힘든 숫자로 바꾸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써온 아버지 집번호를 다른 숫자로 바꿀 수는 없다. 그건 아버지를 더 혼란에 빠뜨릴 테니까.
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아버지가 늘 휴대하는 지팡이에 네임펜으로 번호를 써 넣었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두꺼운 종이에 현관비번과 내 전화번호를 적어 아버지 지갑에 넣었다.
혹시 지갑안에 그게 있다는 걸 잊더라도 누군가 도우려는 사람이 아버지의 소지품을 확인하기를 바라면서.
지팡이에 번호 적은 걸 보여드리고, 지갑에 메모지를 넣었다고 말씀드렸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하신다.
이 주제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새벽에 잠이 깨서 나가보니 일찍 일어난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뭘 하시나 들여다 봤더니 친구분 전화번호를 종이에 옮겨쓰고 계셨다.
그런데 이 숫자, 저 숫자가 적혀 있는 게 도통 어느 것이 제대로 된 번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 무의미한 일을 하고 계신 것일까?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계셔서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 속 어떤 부분 역시 이런 모습인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치매는 마트에서 물건 살 때 돈계산을 못하게 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돈계산은 판매원들이 대신해주니까 큰 문제가 아니지만, 현관 비밀번호를 기억 못하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오늘은 다시 비밀번호를 잘 누르고 들어오셨다. 그래도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내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도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 건 아닐지 의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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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샘의 스피노자 에세이로 다시 만난 아버님 반가웠어요~~
아버님 화분 계속 이쁘게 키워주실거죠?!~~
다가오는 시간들...
지켜보는 마음이 더 무거워지네요~
일상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공부삼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밖에 다니시니 목걸이나 팔찌 필요할지도요.
전화번호부를 보니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 전화번호수첩이 생각나네요.
마지막엔 수첩을 열어볼 생각도 못하시지만
그저 몇장의 사진과 함께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고다니기만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시간이 가는 걸 함께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여러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