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감정5]참을 수 없는 식사의 무거움

김지연
2022-07-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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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함께 밥 먹으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다니는 회사 조이카드는 임직원에게 동호회 활동을 장려한다. 동호회 매칭을 담당하는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뭐 별거 없잖아요. , 무슨 일이든 6개월만 지나면 그 일이 그 일이고. 그래도 인간관계만 좋으면 다닐만하니까. 일의 능률도 오르고.”

 

조이카드는 인간관계가 회사 생활의 지속성과 업무의 능률을 높인다는 믿음이 굳건한 회사임이 틀림없다. 이 회사의 경영자는 1920년대 엘튼 마요(Elton Mayo)의 경영이론을 충실히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마요는 호손 연구(Hawthorn research)를 통해 노동자의 감정을 배려하는 노사관계가 생산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마요가 보기에 사내 갈등은 자원의 부족에 있지 않고, 헝클어진 감정이나 인성 요인 또는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에 있었다. 마요는 정서성의 언어와 생산 효율성의 언어를 뒤섞으며 직장에서 윤리적 자아를 정서적 자아로, 합리성을 인간관계로 대체했다. 즉 경영자가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다면 직원들의 감정과 인간관계를 심리학자처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요의 이론을 습득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측의 선한(?) 의도를 모든 임직원이 알아주지는 않는다. 조이카드는 친밥조라는 점심 행사를 통해 밥 먹을 사람들을 짝지어 임직원 간의 친목 도모와 소통을 돕는다. 무작위로 구성된 이 친밥조에서 불편하게 밥을 먹어야 했던 박상민 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밥 먹는 시간까지 사람 부담스럽게. 내가 회사 전 직원 다 알아야 돼?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하려고? 내 부서 인간들이랑도 힘든 판에... 학교 때 오락부장들만 모아놨나?”

 

내성적인 박 부장의 눈에는 친밥조에서 깔깔거리며 밥 먹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학교 때 오락부장이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도 19년 차에 접어든 직장 생활 동안 박 부장과 비슷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함께 먹기의 역설

인간관계와 밥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래된 관계에서든 새로운 관계에서든 밥이 있어야 만남은 자연스럽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는 헤어질 때 나누기 딱 좋은 말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사람과 공부가 있는 곳에 밥이 따르는 산 체험을 기반으로 사람 없이 먹는 밥의 위험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실제로 혼밥은 거시적으로는 식사공동체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이를테면 뮐러, 2007:154)가 나오게 하는가 하면,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신체적 건강(영양불균형, 비만)과 정신적 건강(우울증)을 염려하는 기사들(이를테면 <연합뉴스> 2017/07/30)이 언론 매체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 속 창희가 아버지와 부딪히는 컨텍스트는 항상 ‘식사 중’이다. 식사 시간은 농사와 공장 일로 바쁜 아버지를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밥상머리에서 정(情) 난다’는 말처럼 함께 먹는 것이 사람 간의 친밀성과 연대를 증대시킨다는 당연한 가정은 때로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집안 식사에서 정치적 견해를 둘러싸고 큰소리가 오가기도, 좋은 식사 모임에서 사소한 농담이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음식을 소재로 하는 초대 모임에서 음식 지식수준에 따라 분란이 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함께 먹는 자리에서 말없이 밥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경우에도 밥만 먹으며 침묵하는 것은 함께 먹는 사람에 대한 직무유기 같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밥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상사와의 식사에서는 부담이 더하다. 모인 사람들의 자리가 정해져 불편한 사람 가까이 앉아야 하기도 하고, 정해진 자리가 없으면 어디에 앉는 게 나은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식사가 시작되면 취미와 신변잡기, 일과 사람에 대한 수다에 이어 음식과 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넘실댄다. 부담스러운 사람들 속에 앉아있는 것도, 오가는 지적인(?) 대화에 끼기도 힘든 나는 웃음과 리액션으로 자리에 참여한 의무를 다한다.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처럼 경기도에 사는 나는 운전을 선호하지만, 적당량 이상의 음주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업무를 빙자한 식사만 불편한 건 아니다. 매일 보는 가족이나 오래된 연인과의 식사 시간을 채우는 정적은 내게 반드시 깨야만 하는 의무로 느껴진다. 이 정적의 원인이 사교에 능통하지 않은 나라는 생각에 초조하기도 하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일로 만난 사람이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식사는 이렇게 조용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나의 해방일지> 속 기정이에게 배우자를 지정해주는 조선 시대가 적합할 것 같듯이, 밥 먹을 땐 말없이 밥만 먹는 게 당연했던 과거가 내게 더 적합할 것만 같다.

 

그러나 식사라는 행위는 그 특성상 불편함을 반드시 수반한다. 식사는 테이블을 필요로 하고, 앉는 순서가 있고, 움직임을 제한하며, 식사하는 동안 함께 앉게 하며 모임을 틀 짓는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한하고 질서 짓는 규칙이, 식사 그 자체의 내적 질서를 통제하는 규칙이다. 특히 함께 식사하기의 특징 중 하나는 식탁을 둘러싸고 가까이 앉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탁에 같이 앉는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가까이 있는 상태”다. 해방클럽의 맏형인 박상민 부장은 첫 모임 장소를 각자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로 결정하는데, 이상하게 마주 보고 앉는 게 불편하더라고.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공백없이 말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라며 그 이유를 밝힌다. 박 부장과 같은 사람에게 함께 하는 식사란 식사하는 내내 전투태세를 갖춰야 하는 위기(?) 상황일지도 모른다.

 

 

 

 

혼밥으로 얻은 해방

 

밖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아는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혼자 먹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밥을 거르거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먹기도 한다. (OO, , 대학생)

 

나도 예전엔 회사에서 함께 점심 먹을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 많았다. 업무 때문에 중식 시간을 놓치면, 구내식당에서 덩그러니 혼자 밥 먹는 게 그렇게도 두려웠다. 혼자 밥 먹는 모양새가 남들 눈에 초라해 보일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혼밥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애처롭게 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고, 이들은 혼밥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극적’ 또는 ‘강요된’ 혼밥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소극적이고 강요된 혼밥족’일 뿐이었고, 차라리 끼니를 거르거나 샌드위치 또는 김밥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식사하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널리 전파된 혼밥 트렌드에 코로나 사태가 맞물려 함께 하는 식사를 “지양”하는 문화가 정착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 구내식당에는 창밖이나 벽을 바라보며 혼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생겼고, 테이블 위에는 감염 예방을 위한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었다. 달라진 환경 덕분에 나는 혼밥에 대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직원들의 밥 먹자는 권유도 사양하고 혼자 밥 먹는 횟수는 점점 늘었다.

 

혼밥을 즐기는 사람들은... 특히 혼자 먹을 때 함께 먹기에 요구되는 시간과 공간을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먹는 시간이 휴식 시간이 된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과의 식사에 따를 수 있는 불편함을 극소화하는 방식으로, 식사 중에 혹실드(Hocjschild, 1983)가 말하는 감정 작업-감정노동이 아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곳에서 요구되는 피곤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혼밥은 누군가와 소통해야 하는 의무, 즉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가 언급했던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 되고.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생각해 내야 되는 중노동”에서 나를 해방해 주었다. 적어도 혼밥을 하는 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자유를 갖게 되었다.

 

 

함께 먹는 자리에서도 내게 해방을!

 

혼밥은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은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친 자신의 몸을 위한 의례이며,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하는 시간이고,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과 위안을 주는 수단이다. (OO, , 대학생)

 

그렇게 혼밥은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기 찾기’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살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끼 마다 ‘편안한 자기 찾기’를 할 수는 없기에 혼밥을 통한 나의 해방은 반쪽에 불과하다. 박 부장이 자기 템포를 찾아 해방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식사의 부담에서 더 시원하게 해방될 수는 없을까?

 

사실 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함께 하는 식사를 강요받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함께 하는 식사를 강요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주로 후배들과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이 식사를 얼마나 자주 혹은 잘 해내는지를 통해 나는 (에바 일루즈가 지적한 대중심리학자들의 문화 모델대로) 소통에 기반한 사회적 능력, 즉 리더십을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도와줄 동료들에게 함께 참석해 줄 것을 다시 강요(?)하고, 낯선 후배들과의 대화 공백을 채우는 부담을 그들과 나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식사 이벤트를 통해 상사들이 자신을 알아채고 인정해주어 만족한다는 후배들의 비공식적 피드백을 듣게 되었다. 내가 상사가 되어가는 동안, 새로운 방식의 인정을 요구하는 후배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사실 후배들과의 식사도 상사와의 식사만큼 의무적인 소통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별말 없이 앉아있던 내게 되돌려준 그들의 인정(?) 덕분에 나는 도리어 그들과의 식사를 종종 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함께 하는 식사에서는 극히 개인주의적인 먹기 양식과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주의적 먹기 양식이 친교나 대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감정 동학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 함께 하는 식사가 어렵고 불편한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혼자 먹는 밥이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혼밥은 함께 먹기의 불편함을 해결하지만, 사회적 시선을 조절해야 하는 힘겨움과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 같은 또 다른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상당히 무겁다.

 

박형신은 짐멜이 논의한 희생, 감사, 신의의 감정을 통해, 함께 식사하기가 만들어내는 불편함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는 혼밥이나 소셜다이닝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공허함을 넘어, 식사를 통해 ‘연대적’ 자기 찾기와 자기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규정과 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고집으로 인해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 함께 한 식사로 얻는 실리적, 감정적 효과를 놓쳐왔기 때문에 내 식사는 더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해방클럽 송년회에서 미정은 “나의 힘겨움의 원인” 즉 “나의 문제점”을 짚었다는 것이 곧 해방을 위한 전부인 것 같다고 말한다. 원래 밥 먹기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당연히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식사에 임하면, 앞에 앉은 상대가 있건 없건 혹은 그게 누구이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겠다. 특히 함께 하는 식사를 내가 유독 불편해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짚어봤으니, 이제 실전에서 나의 해방 여부를 검증해볼 차례다. 다음 달에는 상사와의 저녁과 연구소 전체 회식을 계획해 두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 약속들이 전혀 무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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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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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05.25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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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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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5.24 | 조회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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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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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2.08.30 | 조회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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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문탁
2022.08.30 | 조회 53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먼불빛
2022.08.22 | 조회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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