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감정5]참을 수 없는 식사의 무거움
김지연
2022-07-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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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함께 밥 먹으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다니는 회사 조이카드는 임직원에게 동호회 활동을 장려한다. 동호회 매칭을 담당하는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뭐 별거 없잖아요. 뭐, 무슨 일이든 6개월만 지나면 그 일이 그 일이고. 그래도 인간관계만 좋으면 다닐만하니까. 일의 능률도 오르고.”
조이카드는 인간관계가 회사 생활의 지속성과 업무의 능률을 높인다는 믿음이 굳건한 회사임이 틀림없다. 이 회사의 경영자는 1920년대 엘튼 마요(Elton Mayo)의 경영이론을 충실히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마요는 호손 연구(Hawthorn research)를 통해 노동자의 감정을 배려하는 노사관계가 생산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마요가 보기에 사내 갈등은 자원의 부족에 있지 않고, 헝클어진 감정이나 인성 요인 또는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에 있었다. 마요는 정서성의 언어와 생산 효율성의 언어를 뒤섞으며 직장에서 윤리적 자아를 정서적 자아로, 합리성을 인간관계로 대체했다. 즉 경영자가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다면 직원들의 감정과 인간관계를 심리학자처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요의 이론을 습득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측의 선한(?) 의도를 모든 임직원이 알아주지는 않는다. 조이카드는 친밥조라는 점심 행사를 통해 밥 먹을 사람들을 짝지어 임직원 간의 친목 도모와 소통을 돕는다. 무작위로 구성된 이 친밥조에서 불편하게 밥을 먹어야 했던 박상민 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밥 먹는 시간까지 사람 부담스럽게. 내가 회사 전 직원 다 알아야 돼?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하려고? 내 부서 인간들이랑도 힘든 판에... 학교 때 오락부장들만 모아놨나?”
내성적인 박 부장의 눈에는 친밥조에서 깔깔거리며 밥 먹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학교 때 오락부장이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도 19년 차에 접어든 직장 생활 동안 박 부장과 비슷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함께 먹기의 역설
인간관계와 밥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래된 관계에서든 새로운 관계에서든 밥이 있어야 만남은 자연스럽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는 헤어질 때 나누기 딱 좋은 말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사람과 공부가 있는 곳에 밥이 따르는 산 체험을 기반으로 사람 없이 먹는 밥의 위험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실제로 혼밥은 거시적으로는 식사공동체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이를테면 뮐러, 2007:154)가 나오게 하는가 하면,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신체적 건강(영양불균형, 비만)과 정신적 건강(우울증)을 염려하는 기사들(이를테면 <연합뉴스> 2017/07/30)이 언론 매체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 속 창희가 아버지와 부딪히는 컨텍스트는 항상 ‘식사 중’이다. 식사 시간은 농사와 공장 일로 바쁜 아버지를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밥상머리에서 정(情) 난다’는 말처럼 함께 먹는 것이 사람 간의 친밀성과 연대를 증대시킨다는 당연한 가정은 때로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집안 식사에서 정치적 견해를 둘러싸고 큰소리가 오가기도, 좋은 식사 모임에서 사소한 농담이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음식을 소재로 하는 초대 모임에서 음식 지식수준에 따라 분란이 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함께 먹는 자리에서 말없이 밥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경우에도 밥만 먹으며 침묵하는 것은 함께 먹는 사람에 대한 직무유기 같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밥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상사와의 식사에서는 부담이 더하다. 모인 사람들의 자리가 정해져 불편한 사람 가까이 앉아야 하기도 하고, 정해진 자리가 없으면 어디에 앉는 게 나은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식사가 시작되면 취미와 신변잡기, 일과 사람에 대한 수다에 이어 음식과 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넘실댄다. 부담스러운 사람들 속에 앉아있는 것도, 오가는 지적인(?) 대화에 끼기도 힘든 나는 웃음과 리액션으로 자리에 참여한 의무를 다한다.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처럼 경기도에 사는 나는 운전을 선호하지만, 적당량 이상의 음주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업무를 빙자한 식사만 불편한 건 아니다. 매일 보는 가족이나 오래된 연인과의 식사 시간을 채우는 정적은 내게 반드시 깨야만 하는 의무로 느껴진다. 이 정적의 원인이 사교에 능통하지 않은 나라는 생각에 초조하기도 하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일로 만난 사람이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식사는 이렇게 조용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나의 해방일지> 속 기정이에게 배우자를 지정해주는 조선 시대가 적합할 것 같듯이, 밥 먹을 땐 말없이 밥만 먹는 게 당연했던 과거가 내게 더 적합할 것만 같다.
그러나 식사라는 행위는 그 특성상 불편함을 반드시 수반한다. 식사는 테이블을 필요로 하고, 앉는 순서가 있고, 움직임을 제한하며, 식사하는 동안 함께 앉게 하며 모임을 틀 짓는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한하고 질서 짓는 규칙이, 식사 그 자체의 내적 질서를 통제하는 규칙이다. 특히 함께 식사하기의 특징 중 하나는 식탁을 둘러싸고 가까이 앉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탁에 같이 앉는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가까이 있는 상태”다. 해방클럽의 맏형인 박상민 부장은 첫 모임 장소를 각자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로 결정하는데, “이상하게 마주 보고 앉는 게 불편하더라고.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공백없이 말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라며 그 이유를 밝힌다. 박 부장과 같은 사람에게 함께 하는 식사란 식사하는 내내 전투태세를 갖춰야 하는 위기(?) 상황일지도 모른다.
혼밥으로 얻은 해방
밖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아는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혼자 먹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밥을 거르거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먹기도 한다. (정OO, 여, 대학생)
나도 예전엔 회사에서 함께 점심 먹을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 많았다. 업무 때문에 중식 시간을 놓치면, 구내식당에서 덩그러니 혼자 밥 먹는 게 그렇게도 두려웠다. 혼자 밥 먹는 모양새가 남들 눈에 초라해 보일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혼밥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애처롭게 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고, 이들은 혼밥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극적’ 또는 ‘강요된’ 혼밥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소극적이고 강요된 혼밥족’일 뿐이었고, 차라리 끼니를 거르거나 샌드위치 또는 김밥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식사하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널리 전파된 혼밥 트렌드에 코로나 사태가 맞물려 함께 하는 식사를 “지양”하는 문화가 정착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 구내식당에는 창밖이나 벽을 바라보며 혼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생겼고, 테이블 위에는 감염 예방을 위한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었다. 달라진 환경 덕분에 나는 혼밥에 대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직원들의 밥 먹자는 권유도 사양하고 혼자 밥 먹는 횟수는 점점 늘었다.
혼밥을 즐기는 사람들은... 특히 혼자 먹을 때 함께 먹기에 요구되는 시간과 공간을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먹는 시간이 휴식 시간이 된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과의 식사에 따를 수 있는 불편함을 극소화하는 방식으로, 식사 중에 혹실드(Hocjschild, 1983)가 말하는 감정 작업-감정노동이 아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곳에서 요구되는 피곤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혼밥은 누군가와 소통해야 하는 의무, 즉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가 언급했던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 되고.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생각해 내야 되는 중노동”에서 나를 해방해 주었다. 적어도 혼밥을 하는 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자유를 갖게 되었다.
함께 먹는 자리에서도 내게 해방을!
혼밥은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은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친 자신의 몸을 위한 의례이며,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하는 시간이고,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과 위안을 주는 수단이다. (김OO, 여, 대학생)
그렇게 혼밥은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기 찾기’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살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끼 마다 ‘편안한 자기 찾기’를 할 수는 없기에 혼밥을 통한 나의 해방은 반쪽에 불과하다. 박 부장이 자기 템포를 찾아 해방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식사의 부담에서 더 시원하게 해방될 수는 없을까?
사실 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함께 하는 식사를 강요받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함께 하는 식사를 강요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주로 후배들과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이 식사를 얼마나 자주 혹은 잘 해내는지를 통해 나는 (에바 일루즈가 지적한 대중심리학자들의 문화 모델대로) 소통에 기반한 사회적 능력, 즉 리더십을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도와줄 동료들에게 함께 참석해 줄 것을 다시 강요(?)하고, 낯선 후배들과의 대화 공백을 채우는 부담을 그들과 나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식사 이벤트를 통해 상사들이 자신을 알아채고 인정해주어 만족한다는 후배들의 비공식적 피드백을 듣게 되었다. 내가 상사가 되어가는 동안, 새로운 방식의 인정을 요구하는 후배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사실 후배들과의 식사도 상사와의 식사만큼 의무적인 소통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별말 없이 앉아있던 내게 되돌려준 그들의 인정(?) 덕분에 나는 도리어 그들과의 식사를 종종 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함께 하는 식사에서는 극히 개인주의적인 먹기 양식과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주의적 먹기 양식이 친교나 대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감정 동학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 함께 하는 식사가 어렵고 불편한 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혼자 먹는 밥이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혼밥은 함께 먹기의 불편함을 해결하지만, 사회적 시선을 조절해야 하는 힘겨움과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 같은 또 다른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상당히 무겁다.
박형신은 짐멜이 논의한 희생, 감사, 신의의 감정을 통해, 함께 식사하기가 만들어내는 불편함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는 혼밥이나 소셜다이닝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공허함을 넘어, 식사를 통해 ‘연대적’ 자기 찾기와 자기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규정과 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고집으로 인해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 함께 한 식사로 얻는 실리적, 감정적 효과를 놓쳐왔기 때문에 내 식사는 더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해방클럽 송년회에서 미정은 “나의 힘겨움의 원인” 즉 “나의 문제점”을 짚었다는 것이 곧 해방을 위한 전부인 것 같다고 말한다. 원래 밥 먹기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당연히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식사에 임하면, 앞에 앉은 상대가 있건 없건 혹은 그게 누구이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겠다. 특히 함께 하는 식사를 내가 유독 불편해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짚어봤으니, 이제 실전에서 나의 해방 여부를 검증해볼 차례다. 다음 달에는 상사와의 저녁과 연구소 전체 회식을 계획해 두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 약속들이 전혀 무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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