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쿨미투를 지지한다 (아젠다 5호 / 20201020)
문탁
2020-08-20 20:32
105
모 대안학교 졸업생들의 미투(#Me Too) 보고서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다』를 읽었다. 그 학교에 한때나마 깊숙이 관여한 사람으로서 난 맘이 매우 복잡해졌다. 어떻게 대안학교라는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따위의 놀람이나 한탄은 전혀 아니었고, 이 일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과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더 묻고 싶었고 더 알고 싶었고 더 많이 듣고 싶었고, 더 많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칫 한마디라도 잘못 내뱉다가는 그 길로 엄청난 비판/비난 (2차 가해다, 젠더감수성이 떨어진다, 역시 올드팸이다...나아가 “제발 공부 좀 해라”)을 들을 게 뻔한지라 차라리 입을 다물고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리박빙(如履薄氷)’하면서 사태를 조용히 관전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글에 대한 응답의 의무는 과연 그 학교에만 있는 것일까, 그 밀려오는 파도를 맞이하는 곳이 과연 그 학교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주 오래 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
‘가리 늦게’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한 난, 덕분에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조교를 시키면 된다”로 요약되는 대학원 특유의 권위주의적 사제문화(師弟文化) 밖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성골’ 혹은 ‘진골’로 불리는 이너 써클 출신도 아니었고, 딱히 학맥을 형성할 의지도 욕구도 없었고, 지도교수한테 잘 보여 아카데미에서 출세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운동권 출신 쎈 여자’라는 꼬리표가 주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대학원생이면 으레 해야 하는 온갖 프로젝트나 관례처럼 맡겨지던 온갖 잡심부름에서 언제나 열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 수업 마지막에 열리는 ‘쫑파티’까지 제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늘 회식을 빙자한 음주 자리, 그리고 노래방에서의 2차로 연결되곤 했다.
그런데 당시 모 교수(남)는 회식 자리에서 늘 폭탄주를 제조해서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몇 바퀴씩 돌렸다. 석, 박사과정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 술잔을 받아들고 난감해했으나 교수보다 먼저 일어나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모 교수(남)는 노래방에서 역시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나 붙들고 블루스를 췄다.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많은 여학생들이 그 교수의 터치를 불편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놓고 교수를 무안 주면서 그 손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속해 있던 세부 전공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고 그 전공 교수들이 평균 이상의 인품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밖의 어느 장면에서는 늘 그 지경이었다. 나는 그 뒤풀이 문화가 ‘엿’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소한’ 일을 바로잡는데 내 에너지를 쓰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첫 번째 행동은 흑기사 노릇이었는데 폭탄주를 받아들고 당황해 하는 여자 후배들을 대신해 내가 마시고 (어느 해인가는 그런 식으로 근 열 잔의 폭탄주를 마신 적도 있었다.) “교수님, 저랑 추세요” 라면서 젊은 여자 후배들로 향하는 노교수의 손길을 내 쪽으로 잡아채는 식으로 말이다. 그 이후 나는 두 번째 행동으로 동기 남학생들을 “잡았다”. “너희는 (남)교수가 (여)학생들과 블루스를 추자고 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느냐? 그 상황에서 너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정말 모르냐? 이런 문화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냐?” 그 남학생들이 술을 권한 것도 아니고 춤을 추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 남학생들을 향해 있는 대로 욕을 퍼부어대면서 그 남학생들이 모종의 액션을 취하기를 종용했었다. (하지만 실효가 있었을까?)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헷갈린다. 혹시 내가 그 때 대놓고 아무 소리 하지 않아서, 바로 잡기 위해 직접 나서서 힘껏 싸우지 않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스쿨미투가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난 이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 보고서의 수없이 많은 개별 사례를 관통하는 패러다임은, 내 생각에는 몇 문장으로 요약되는데 우선 “우리는 00학교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다”라는 자신들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언명, 또 가해자에 대해 그도 맥락이 있다는 차원에서 혹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교육적 가치의 이름하에 어떤 단죄도 하지 않는, 나아가 피해자와 분리시키지 않는 “00학교 온정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아마 후자는 최근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표현하고 있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이런 문장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와 결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밖에도 그 보고서에는 (일부)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태도, 거의 제로에 가까운 성인지 감수성 등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있다.
처음에 나는 그 보고서에 드러난 것과 같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문화 혹은 성을 손쉽게 쾌락의 도구로 삼는 문화 (성적인 희롱은 남학생과 남학생 사이에서도 벌어졌다)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인지, 아니면 최근 몇 년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된 사실인지가 궁금했다. 나는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들을 종합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이것은 우리 사회 전반이 그런 것처럼 학교가 생긴 이래 늘 만연했던, 하지만 수면 위로 잘 올라오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리고 이제야 일부 학생들을 통해 이 문제가 전면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모든 미투가 그렇듯이 이것은 어제까지 잘 알고 있던 교사와 동급생 남성들에 대한 안면을 바꿔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존중되고 지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이들의 논의가 생경할 수도 있고, 이들의 말투가 불편할 수도 있고, 이들이 복잡한 맥락을 거세하고 모든 문제를 일도양단한다고 볼 수도 있고, 이들의 결론에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꼼꼼히 읽은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점은 이 두터운 미투 보고서 어디에서도 감정과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화풀이를 하고 있지 않았고 감정을 배설하고 있지 않았고 감성에 호소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경험 (불편했고, 불쾌했고, 위축되었고, 빡쳤고, 울고 싶었고, 뛰어내리고 싶었고, 학교 가기 싫었고..등)을 객관화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했고, 그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려 분투 중이었고, 언어를 통해 비로소 정념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경험을 하고 있었고(주체화),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모험을 감행 중이었다. 오히려 생경하다고 하면서 공부하지 않고, 불편하다고 하면서 귀 기울이지 않고, 이들의 논의가 일천하다고 생각하면서 논쟁을 제기하지도 않는 것은 어쩌면 교사, 그리고 나를 포함한 어른들 아닐까? 우리는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응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 응답의 태도는 공감과 지지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응답, 즉 성을 손쉽게 쾌락의 도구로 삼고 여성을 상품화하거나 대상화하는 문화를 손톱만큼도,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는 어떤 가이드라인을 자신의 공동체 안에 세우려는 각고의 노력일 것이다.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모르고 그랬다는 변명으로, 맥락이 있을 것이라는 사정으로 쉽게 무시되지 않는 어떤 가이드라인!!
난 그리고 나서야 세 번째 응답,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공동의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 선의, 감수성 성찰로 환원되면, 듣기의 윤리, 환대의 실천, 타자에 대한 책임은 과도한 조심성과 죄책감을 키우게 될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스스로의 태도를 점검하는 것으로는 타자에게 나아갈 수 없다. 불가피한 오해, 충돌, 갈등조차도 이해, 책임, 환대를 향한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잘 듣기 위해서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듣기에 머물 수 없다. 타인의 존재에 다가가기 위해서,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을 수 있어야 하고 기꺼이 물어야 한다.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보태고, 때로 이견과 충돌까지 감수하지 않는 한, 우리가 듣고 응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p265)
하여 어느 날, 너무 멀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이 미투 보고서를 쓴 친구들과 생산적 토론을 하기를 희망한다. ‘피해자 중심의 서사’가 처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대해, 해석은 늘 새로운 해석에 열려 있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여성)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주짓수를 배우는 것, 대놓고 싸우는 것, 슬쩍 피하는 것을 포함하여 n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학교가 계몽의 모델과 법정의 모델 사이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 대해, 혹은 지금은 나도 모르는 수많은 미지의 쟁점에 대해서 말이다.
하여 나는, 이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환대와 정의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길을 젊은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진정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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