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無用之用)의 시간, 빅마마스 테이블 (아젠다 3호 / 20200820)

문탁
2020-08-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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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한 번 문탁을 오가는 젊은 청년들과 밥을 먹는다. 이름하여 <빅마마스 테이블(Big Mama’s Table)>! 다섯 명 정도가 고정 멤버이고 열 명쯤 모일 때도 있다. 문탁 혹은 길드다에서 세미나를 하거나 했던 친구들, <달밤더치>라는 커피사업팀에서 일을 하거나 <새초롬>이라는 디자인팀에서 포스터를 만드는 친구들이다. 연령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 대부분 대학을 안 가거나 중도에 그만 두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작파한 친구도 있다.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달은 뭘 먹지?”이다. 어떤 때는 길드다 스토아에서 배달음식을 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탁 식구들의 최애식당 <어장>에서 회를 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타이 음식점엘 가기도 한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수다 떠는 일 이외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모임은 보통 근황토크로 시작한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잠시 먹는데 집중한다. 그러다가 다시 근황토크로 돌아가는데 ‘샤이’한 친구들이 많은지라 이야기는 잘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긴다. 그러면 주로 내가 묻는다. 요즘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프로가 재밌는지, 유튜브에선 주로 뭘 보는지. 운이 좋으면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유튜브의 어떤 프로그램을 말하면, “어, 그거 나도 봐” 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이후 오가는 이야기 대부분을 난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좋은 정보를 줍는다. <굿 걸>(엠넷)이라는 프로그램이나 ‘슬릭’이라는 여성페미니스트 래퍼에 대한 소식 같은 것이다. 이후 난 <굿 걸>을 본방 사수했고, 덕분에 두어 달은 <굿 걸>과 거기 출연하는 이영지, 슬릭, 그리고 ‘플렉스’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 나도 강점은 있다. 최신 영화 소식은 주로 내가 전한다. 하지만 이 친구들, 영화 별로 안 본다. 그러니까 이 모임, 미스매칭이 기본인, 느슨하고 별 볼일 없고 무용(無用)한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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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모임을 만든 이유는 청년들과 일을 하려면 (혹은 청년들이 일을 하게 하려면) 이런 시시껄렁한 시간들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길드다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진 청년프로그램들, 1년 넘게 지속된 푸코 세미나, 기타 다종다양한 단기 프로젝트들이 길드다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그것들의 자잘한 성공과 잦은 실패들에 힘입어, 또 뭐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무용한 시간들이 쌓여 겨우 소수의 청년 ‘주체’가 만들어졌다. 우리 중, 장년들이 청년 사업에 대한 빵빵한 비전이 있다고 해서, 어떤 선의를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다고 해서, 아이디어를 내거나 판을 깐다고 해서 청년들이 엮여지진 않는다. “지갑은 열고 입은 닫는” 무수한 시간들이 하릴없이 흘러야 슬금슬금 청년들이 엮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빅마마스 테이블>에서 내가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잽을 날리듯 작은 뭔가를 툭툭 던진다. 예를 들어 아무개한테는 청년영상프로젝트를 권한다.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시간을 두었다가 또 권한다. 다른 아무개가 요즘에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면 슬쩍 문탁 꼬마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 보라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좋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기획서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다음에 또 이야기하면 된다. 매번 내가 밥을 사다가 지난 번 모임에는 ‘포트락 파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모두 즐겁게 음식을 만들어왔다. 이번 달엔 아무개가 알바를 하는 닭갈비집에 가기로 했다. 맛집이라니 직접 확인도 할 겸 우리 알바생 사기도 올려줄 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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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이번 모임엔 한 때 문탁에서 공부 했지만 요즘엔 발걸음이 뜸한 한 청년이 나온단다. 나도 한 명을 초대했다. 얼마 전부터 문탁에 접속해 공부를 하고 있는 10대 중반의 홈스쿨러이다. 그런데 이 친구, 나이에 비해 지적수준이 높은 모양이다. 주로 푸코/바타이유를 읽는 세미나, 칸트 강좌, 영화 인문학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청년들과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는다. 지난달은 해외파들이 합류해서 재밌었는데 이번엔 뉴페이스들이 출현하여 모임이 신선해질 것 같다.  

 

   이 모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글쎄~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하다간 온 동네 청년들 다 불러 밥을 사 먹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진짜 더 바랄 나위가 없지 않을까? #동네_소셜_청년_밥상! 말 그대로 #빅마마스_테이블!! (밥값은? 돈 워리! 난 돈 만드는데/모으는데 일가견이 있다) 물론 전혀 반대로 진행될 수도 있다. 비슷하게 소소하게 반복되는 모임이 지루해진 누군가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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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렇게 긴가민가한 시간들이 이어지면, 어느 순간 우리의 관계도 오크통 안의 포도주나 옹기항아리 속의 막걸리처럼 알게 모르게 숙성되지 않겠는가. 귀 밝은 사람은 포도주나 막걸리가 숙성되면서 내는 미세하게 보글보글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내 귀가 그렇게 밝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씩 나도 우리 관계가 보글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가장 맛있게 관계가 빚어질 그 시간까지, 난 ‘놀멍쉬멍’ 기다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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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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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 조회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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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5 | 조회 449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호기롭게 무모한 도전을   공동체로 출근하는 일상에서도 일주일에 이틀 오후와 토요일에는 학원 일을 계속했다. 당시 학원 일로 백이십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걸로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려니 차츰 몸이 힘들어졌다. 학이당에서 하는 공부의 양은 점점 늘어나는데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학원이 인천에 있어서 일주일에 이틀을 120키로씩 운전 하는 일도 부담스러웠다. 학원 일을 그만둘 핑계는 점점 늘어났지만 공동체 안에서 먹고 살만한 일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도 난 일단 학원 일을 접고 문탁 안에서 백만 원을 벌어 보겠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은 나의 선언에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새로운 실험이 공동체에 주는 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선언을 하게 된 데는 매달 이십만 원 정도의 임대비용으로 국민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주거 상황도 한 몫을 했다. 2년마다 오르는 집세를 감당해야하는 형편이었다면 아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문탁네트워크 홈피 대문에 달려있던 ‘자본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삶’ 같은 문구도 내 마음을 들썩였다.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삶이 고달픈 것은 다 그 탓이라고 핑계만 대다가 뭔가 ‘도전’해 볼만한 거리가 생긴 설렘이었달까.   당시 마을 경제 세미나를 했던 친구들이 마을 작업장을 만들었다. 화장품도 만들고 정기적으로 반찬을 생산하는 찬방도 있었다. 세미나를 통해 익힌 것들을 실제로 실천해보자는 활기찬 분위기에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자누리 화장품에 일꾼을 신청했다. 더치커피 사업단을 꾸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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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 | 조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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