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5회] 나는 멈추었다

요요
2022-03-18 17:16
429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떤 공포심도 없는 고요와 평화는 앙굴리말라에게는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앙굴리말라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붓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묻지마 살인’을 저질러 온 흉적이 뒤에서 쫓아가는데 붓다는 다만 고요히 걸어갈 뿐이었다. 죽고 죽이는, 쫓고 쫓기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앙굴리말라는 당황했다. 이미 앙굴리말라의 마음속에는 ‘이게 뭐지?’라는 강한 의혹이 생겨나고 있었다. 뒤쫓기를 단념하고 ‘멈추라’고 외치는 앙굴리말라에게 붓다는 마침내 입을 열어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살인자에서 수행자로 거듭나다

붓다의 답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가고 있는 것은 앙굴리말라가 아니라 붓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앙굴리말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자여, 그대는 가고 있으면서 ‘나는 멈추었다’고 말하고, 멈추어 있는 나에게 ‘너도 멈추어라’고 말한다. 수행자여, 나는 그대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어찌하여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

 

나는 앙굴리말라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낯선 상황에서 그의 내면에서 생겨난 의심과, 그로 인해 촉발된 하심(下心)으로의 전환이 『앙굴리말라의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 아닐까 생각한다. 앙굴리말라는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던 살인자에서 붓다에게 질문하고 간절히 답을 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신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하던 불신자에서 열렬한 전도자가 된 바울의 회심에 비견할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회심’이라고 하고, 대승경전에서는 ‘초발심’이라고 하고, 선승이라면 ‘화두’를 드는 것 같은 최초의 전환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앙굴리말라는 살인행각을 멈추고 붓다에게 귀의했다. 그는 머리를 깎고 걸식하며 유행하는 수행자가 되었다. 꼬살라의 국왕 빠세나디는 백성들의 거듭되는 청원에 군대를 이끌고 앙굴리말라를 처단하러 가던 길에 앙굴리말라의 회심 소식을 들었다. 국왕은 붓다와 함께 있는 앙굴리말라를 만났을 때 앙굴리말라를 살인자로서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공경하고 공양하였다. 그 장면은 앙굴리말라의 존재 전환을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징적 절차가 끝났다 해도 그가 한때 살인자였다는 사실이 지워질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탁발을 나갈 때마다 흙덩이와 몽둥이가 날아왔고, 다치고 발우가 부서지고 옷이 찢어졌다. 붓다는 인과응보는 피할 수 없다고 설하고 분노를 품지 말고 인내하라고 가르쳤다. 살인자에서 수행승으로 거듭난 앙굴리말라는 다음과 같은 시로서 화답했다.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립니다.(『앙굴리말라의 경』, 『법구경』 145)

 

나는 멈추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왜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 그 숨은 의미를 말해 달라’는 앙굴리말라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에서 그 힌트를 찾아보자.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뭇 삶은 중생이다. 중생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다. 동물,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포함한다. 나에게 내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다른 모든 존재들 역시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한다. 붓다는 무릇 생명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자신을 사랑하고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뭇 삶에 대한 폭력을 멈춘 사람이었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이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자제하는 자이다.

 

                                           바르샤바 버스터미널. 피난가방 위에 앉아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한겨레 신문에서 퍼옴)

 

하늘에서 내려다본 건물 양쪽에 '어린이'라고 쓴 흰색 글씨가 선명히 보입니다.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도시 마리우폴의 한 극장에 공습을 피해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는 표식입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건물을 폭격했습니다. 어린이와 여성들이 대피해 있던 시립 수영장도 폭격에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이번 폭격으로 최소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병원과 학교, 주택은 물론, 대피 중인 시민들까지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쉴 새 없이 병원으로 밀려드는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린입니다. 넘쳐나는 시신들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바닥에 방치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3월 17일, SBS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79868&plink=COPYPASTE&c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시대가 폭력의 시대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지금, 붓다의 말의 울림은 크다. 전쟁이야말로 국가의 힘에 기댄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살인과 파괴행위이다. 그런데 전쟁만이 아니다.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제적 불평등도 혐오도 차별도 모두 뭇 삶에 대한 폭력이다. 당장의 편리한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여 우리가 손 놓고 있는 기후위기도, 매일매일 내 밥상과 무관하지 않는 공장식 축산도, 수십만년 썩지 않는 방사능 폐기물을 쏟아내고 있는 핵발전도 뭇 삶에 대한 폭력이다. 아마존 우림이 초원이 될 지경에 처하고, 빙하가 녹고, 플라스틱 쓰레기 천지의 세상이 되면서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삶도 식물의 삶도 위협받고 있다.

 

너도 멈추어라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앙굴리말라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지 않았을 뿐,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는 것은 앙굴리말라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붓다는 우리 앙굴리말라들에게 모든 폭력의 멈춤을, 아힘사(ahimsa)를 설한다(아힘사는 앙굴리말라의 어릴 때 이름이기도 하다). 폭력의 관성을 멈추려면 그 힘보다 더 강한 힘을 우리의 내면에서 끌어내야 한다. 아힘사는 능동적 멈춤이다.

 

                                                      (전쟁 저항자 인터내셔널 로고)

 

폭력을 멈춘다는 것은 모든 불평등과 혐오와 갈라치기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며, 원한을 원한으로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는 것이며, 폭력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비폭력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폭력을 멈추려면 폭력 앞에 침묵하거나,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절제와 용기가 필요하다. 탐욕과 분노 대신에 자제와 자비로, 어리석음 대신에 통찰과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멈추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일상의 불평등과 차별 앞에서, 우리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멈출 수 있을까? 붓다는 말한다.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이 말은 2500년 전의 앙굴리말라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를 향해 던져진 말이다. 앙굴리말라가 멈추었듯이 우리도 멈추자. 멈추지 못하면 제대로 볼 수가 없고, 제대로 보지 못하면 멈출 수 없다. 그러니 멈추는 것과 제대로 보는 것은 둘이 아닌 듯하다. 멈추는 힘[止]과 제대로 보는 힘[觀]을 같이 닦아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 7
  • 2022-03-19 08:12

    나무아미타불

    • 2022-09-05 18:13

      진짜? 드디어?

  • 2022-03-19 13:23

    노자에도 멈출줄 알아야 위태롭지않다는 말이 몇 번 나옵니다. 무엇으로 앞으로만 내달리기 쉬운 인간의 욕망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우크라이나에 하루 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2-03-19 16:31

    잘 읽었습니다

     

  • 2022-03-21 09:35

    샘^^ 잘 읽었습니다

  • 2022-03-21 11:43

    폭력 앞에서 침묵도 아니고 되갚음도 아닌, "차원이 다른 절제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멈춤이다..어렵네요

  • 2022-03-21 12:25

    지금 당장 내가 멈춰야할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작은 습 하나도 멈추기 힘든 게 나의 상태구나…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요요와 불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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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01.16 | 조회 657
요요와 불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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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1 | 조회 448
요요와 불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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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8 | 조회 667
요요와 불교산책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이십여 년 전쯤 명상 수행에 입문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위기가 닥친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로 인해 마주하게 된 두 가지 사태 모두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 모욕감으로 가득찼다. 자의식 과잉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달마는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었다. 눈이 온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은 겨울, 혜가(慧可, 487년~593년)가 찾아왔다. 혜가는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랐다. 그제서야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달마를 찾아오기 전부터 혜가가 외팔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혜가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로 결연했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팔 하나쯤은 가볍게 여기는 선가(禪家)의 공부 가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자가 된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명상을 배우러 달려갈 때의 내 마음과...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이십여 년 전쯤 명상 수행에 입문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위기가 닥친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로 인해 마주하게 된 두 가지 사태 모두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 모욕감으로 가득찼다. 자의식 과잉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달마는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었다. 눈이 온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은 겨울, 혜가(慧可, 487년~593년)가 찾아왔다. 혜가는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랐다. 그제서야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달마를 찾아오기 전부터 혜가가 외팔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혜가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로 결연했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팔 하나쯤은 가볍게 여기는 선가(禪家)의 공부 가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자가 된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명상을 배우러 달려갈 때의 내 마음과...
요요
2022.09.13 | 조회 526
요요와 불교산책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숫타니파타』 『자애경』)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영주 부석사를 좋아한다. 산 중턱에 세워진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법당에 이르기까지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안양루를 통과하면 그때 무량수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만이 아니라 떠 있는 돌, 부석(浮石)이 있다. 그 돌과 함께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의상대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천년의 사랑 때문도 아니고,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국보급 보물인 무량수전과 아미타 여래상 때문도 아니다. 부석사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무량수전 앞에서 몸을 돌리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 풍경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세속의 번뇌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이제 법당으로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을 만나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인 아미타(am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무량한 수명[無量壽], 무량한 빛[無量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지복의 세계인 극락의 부처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 극락전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법장비구로 불리던 수행자 시절에 고통을 겪는 이가 단 하나도 없는 불국토를 건립하기를 서원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번뇌가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웠다. 무려 5겁 동안 용맹정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숫타니파타』 『자애경』)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영주 부석사를 좋아한다. 산 중턱에 세워진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법당에 이르기까지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안양루를 통과하면 그때 무량수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만이 아니라 떠 있는 돌, 부석(浮石)이 있다. 그 돌과 함께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의상대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천년의 사랑 때문도 아니고,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국보급 보물인 무량수전과 아미타 여래상 때문도 아니다. 부석사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무량수전 앞에서 몸을 돌리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 풍경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세속의 번뇌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이제 법당으로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을 만나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인 아미타(am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무량한 수명[無量壽], 무량한 빛[無量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지복의 세계인 극락의 부처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 극락전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법장비구로 불리던 수행자 시절에 고통을 겪는 이가 단 하나도 없는 불국토를 건립하기를 서원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번뇌가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웠다. 무려 5겁 동안 용맹정진...
요요
2022.07.25 | 조회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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