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평전>뉴턴은 뉴턴주의자가 아니다

여울아
2023-11-20 11:37
163

뉴턴 평전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읽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올 한해 17세기 과학자들을 이어서 다루면서 이들의 평전을 읽지 않고 지나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갈릴레이와 유클리드... 워낙 유명한 일화들이 많은 사람들이라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뉴턴 평전을 읽고 보니, 제가 평소에 뉴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좀 가지고 있었더라구요. 이 책의 저자 제임스 글릭이 뉴턴을 소개하는 단 한 줄이라면 저는 이 문장을 뽑겠습니다. "뉴턴은 뉴턴주의자가 아니다"

 

먼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의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혼한 어머니와 떨어져 살다가 의붓아버지가 죽자 다시 돌아온 어머니로부터 2번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뉴턴의 생각을 어찌 아나? 부자였던 의붓아버지가 남긴 유산 중 천 페이지에 달하는 노트에 뉴턴이 끄적거린 메모들과 그가 작성한 신앙고백에 남은 내용들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어린 뉴턴을 기숙학교에 보내버린 후 다시 농부가 되라며 집으로 데려오지만 적응하지 못하자, 그의 삼촌의 설득으로 대학에 입학합니다. 트리니티 칼리지 장학생이었던 뉴턴은 부자집 자식들 잡일을 도우며 학문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세미나에서는 뉴턴의 어린시절을 시대적 배경과 같이 봐야한다는 얘기를 주로 했습니다. 그가 어린시절 외톨이에 다른 사람과 교류가 없던 것도 맞지만.. 홀로 남은 엄마가 나이가 두 배 많은 부잣집 남자와 재혼하면서 자기 아들을 데려가지 못한 것이지 엄마가 뉴턴을 버렸다는 생각은 뉴턴의 자격지심이 아닐까? 왜냐하면 평전에서 소개한 엄마가 뉴턴에게 보낸 메모에서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의붓아버지가 물려준 재산 때문에 부자가 된 엄마는 그 이후에도 뉴턴에게 쓰는 돈을 최소한으로 한 것으로 묘사되며 엄마가 뉴턴에게 후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그러나 결국 그 많은 재산은 뉴턴이 물려받습니다!!! 이외에도 어린시절 보내진 하숙집이 하필 약제사였던 클라크의 집(연금술?)이었다는 것, 하필 무료해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해시계(시간과 공간의 결합?)였다는 것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돌던 시기, 스피노자는 자기가 살던 집에서 나와 2년 동안 다른 지역으로 피해있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뉴턴은 역시 1665년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1천 페이지 노트에 읽은 책에 대한 단상을 채우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차단한 채 홀로 고독하게 지내던 그는 결국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되었다.(45p)" ㅎㅎ 21세에 최고의 과학자라니... 그가 고향 울스소프에서 머문 25개월동안의 일입니다. 

 

이 당시 철학자고 수학자고 간에 몰두한 것은 기하학입니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꼼꼼히 읽어나갔고, 그의 수학적 정신에 불을 지핀 것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저기 "오류, 오류, 잘못됐다" 등 비판적인 메모를 남겼고, 이후 연구를 이어나갑니다. 갈릴레이가 "자연이라는 책"을 기하학으로 읽었다면, 뉴턴은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읽히며 "보편언어"를 구상하고, "가장 순수한 기호 번역은 수학"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대수학을 넘어 "무한급수"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무한급수는 무한소에 가깝다고 합니다. 0이면서 0이 아니기도 한 "무한소" 개념으로 곡선을 무한히 분할하고 그 분할을 더해서 넓이를 구하는 "미적분"을 창안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라이프니츠와 미적분 논쟁을 벌이게 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연구를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무한소 개념을 이용해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을 해결하게 됩니다. 어떻게? 

 

거북의 출발점은 100미터 앞서고 아킬레스가 그 뒤에서 출발합니다. 제논은 아킬레스가 거북을 무한히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 아킬레스가 거북의 위치만큼 올때마다 거북은 조금더 앞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논의 역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을 반박하기 위함이며, "운동은 없다"점을 주장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아킬레스가 아무리 달려도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어떻게 "운동은 없다"는 논지가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무한을 전제하지 않으면 펼칠 수 없는 논지인 만큼 고대인들에게 "무한원리"는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뉴턴은 골치아픈 무한의 문제를 피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한소(미적분) 개념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이로써 시간과 공간을 결합하여, 시간에 따른 거리(공간크기)의 변화를 측정하고, 또 속도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방정식으로 풀어냅니다. 미적분을 이용해서 속도(변화율)를 면적으로 풀어냄으로써, 기하학과 운동학을 결합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뉴턴이 왜 뉴턴주의자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뉴턴은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을 펼치는 연속적인 수학의 체계를 세움으로써 "자연은 수학화"되었습니다. 공간은 크기(차원)를 갖게 되었으며, 운동은 기하학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뉴턴의 수학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무한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질서정연한 수학의 체계 안에 무한이라는 무질서를 수용한  것입니다.

 

중력의 발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중력(gravity)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떨어지는 사과나무 아래 앉아 있던 사람은 뉴턴만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뉴턴이 사과에 대해 한 번도 쓴 적 없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전설처럼 말해지는 이유는 그만큼 누구나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무거움"에 주목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운동성질을 수치화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케플러는 행성이 원이 아니라 타원 궤도를 그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뉴턴은 1666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력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중력 상수를 측정하고, "지구 자전이 밖으로 튕겨 내려는 경향보다 350배나 더 강한 중력으로 지구 표면의 물체를 아래로 끌어당긴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갈릴레이는 떨어지는 물체의 속도를 등가속도라고 했지만 뉴턴은 지구가 달을 끌어당기는 힘보다 사과를 끌어당기는 힘이 4000배 강하다고 어림하고, 이를 "거리의 제곱"으로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뉴턴보다 먼저 행성운동을 연구한 케플러는 왜 "중력"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케플러는 "중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와 같은 운동개념이 고대로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운동이란 직접 "충돌"을 통한 연쇄작용입니다. 뉴턴이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힘? 혹은 신비?로 운동을 계산해낸 것이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뉴턴은 뉴턴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믿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중력을 인정하고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은 그가 왜 자신의 연구 성과물을 그토록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는지에 대해서입니다. 페스트가 끝나고 그는 돌아와 여전히 자신의 연구 대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무한급수"에 대해 우연한 기회에 그의 수학과 지도교수?인 아이작 배로 교수에게 보여주게 되고 논문 초고를 작성하여 영국 왕립학회에 보내며 약간의 명성을 얻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더이상 자신의 연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와중에 배로 교수 후임으로 27살에 뉴턴은 교수직을 승계받고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연구하게 됩니다. 이 당시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대고 낡은 프리즘을 이용하여 광학 연구에 몰두하고 빛의 운동과 백색광은 혼합광이라는 것 등을 발견합니다.. 물론 모두 비밀리에. 

 

그리고 마침내 그의 비밀주의를 더욱 부추기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는 자신의 광학 연구를 왕립학회 회원과 교류하며 보냈는데, "훅"이라는 영향력있는 학회회원과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훅은 빛의 파동설을 주장하는 반면, 뉴턴은 빛의 입자설을 주장했습니다. <철학 회보>를 통해 무려 10여차례 각자 논박이 이어지면서 훅은 뉴턴의 연구를 "가설"이라고 지적했고, 뉴턴은 자신의 연구가 "가설"로 취급되는 것에 분노해서 자신은 증명했고 오히려 훅이야말로 실험하지 않은 것임을 여러차례 암시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설을 증명해서 노벨상을 받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가설>이라는 책을 냄으로써 자신의 반대파 주장을 다시 한 번 가뿐히 수용함과 동시에 뛰어넘는 시도를 합니다. 무한원리를 무한소 개념으로 뛰어넘어 무한급수를 세웠듯이 광학 관련 자신의 주장을 "가설"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가설>이라는 책으로 응수한 것입니다^^

 

그가 뉴턴주의자가 아닌데 뉴턴주의자가 될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회피하기보다는 그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었"(121p)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후대에 과학에서 신비주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제거한 사람으로 거론되지만 그에게는 그 "신비한 성질"이야말로 연구성과의 근본적 원리였습니다. 연금술에 빠지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루카스 교수직을 수행하려면 서품식을 받아야하는데, 그는 거짓 맹세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1975년 뉴턴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는 서품식을 면제 받았고 이후로도 이단적인 이론을 완성하는데 박차를 가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반대로 영어성경이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뉴턴이 태어나기 한 세기 전부터 평신도들이 자국어 성경을 읽게 되면서 각자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신학에서도 비밀주의를 이어나갔습니다. 1679년 봄 그의 어머니가 고열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다음 시간엔 11장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댓글 2
  • 2023-11-21 05:35

    우리가 얘기 나눈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후기로 올라왔군요.^^ 외롭고 고독한 어린시절을 보낸 천재의 삶. 자연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든 수학적 언어로 풀어보려했던 극단적 내성주의자의 생활을 살펴본 시간이었습니다. 나와는 조금 다른 결의 생각을 품고 있는 여울아님과의 토론은 다소 당황스럽고 다소 신선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많이 즐거운.^^

  • 2023-11-21 20:13

    앗, 그러네요. 제가 지난번에 책을 읽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네요. 아이고 ㅜ 여튼, 다시 잘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
    저도 뉴턴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많이 짠하더라구요. 마음이 너무 여린 뉴턴... 한편으론 이런 세기의 천재도 자신의 쓸모없음을 걱정했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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