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바램이 삶이 되려면

현민
2023-06-17 09:23
463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바램이 삶이 되려면

 

 

 

최근에는 집 재계약과 전기세, 정원 가꾸기로 매일매일 그룹채팅방이 시끄러웠다. 급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임의적으로 회의를 만들지만 회의 시간을 잡기란 굉장히 어렵다. 생각보다도 더 12명이 한집에 머무르는 때는 드물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도 금방 바뀌고, 매일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4년이 된 이 셰어하우스에 현재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알론소다.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한국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사는 코스타리카에서 온 그는 이 도시에서 현대무용 학교를 다닌다. 그는 댄서다.

 

최근 그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졸업하는 학년을 위한 공연을 열었다. 알론소는 셰어하우스 톡방에 공연 정보를 공유해줬는데, 티켓 값이 생각보다 비싸 못 가겠군 하던 차였다. 공연 오냐고 묻는 그에게 표 비싸더라 궁시렁대니 무료 티켓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알론소가 댄서라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한 번도 그가 제대로 춤을 추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입구를 못 찾아 공연 시작 10분 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머리가 아름답게 센 할머니를 만났다. 굉장히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할머니도 입구를 못 찾는 중이었다. 같이 입구를 찾고 우여곡절 끝에 입장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는 시야에서 없어졌다. 부랴부랴 좌석에 앉아 놓여있던 공연 순서표를 눈으로 읽다 보니 불빛이 어두워졌다. 공연이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첫 번째 공연은 1학년의 ‘imagine’ 이었다. 연습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음악 없이,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떤 음성이 시작되었다. 그건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니고 짐작하기론 이탈리아어 같았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목소리에 목소리가 겹치며 여러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의미의 텍스트가 여러 개의 언어로 말해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태어난 곳을 떠나 춤을 추러 온 이 댄서들의 목소리였을 것 같다. 한국어도 나와 들어보니 다양성의 대한 권리를 읊고 있었다. 소리가 끝난 뒤 어느 지점에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존 레논의 ‘imagine’ 이었다. 그들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적에 그 노래에 가슴이 웅장해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주가 나오며 이 노래가 ‘imagine’이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얼굴을 구겨버렸다. 너무 지루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Imagine에는 이런 가사들이 나온다.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발 아래 지옥도 없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살인도, 희생도, 종교조차 없는 곳이 있다면. 그래서 모든 이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40년 전 발매된 이 노래는 오래됐지만, 아직도 나는 의미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이 가사가 뜻하는 장소를 상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보다 있는 걸 더 잘 상상할 수 있다.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그곳이 어떤 모습인지 수없이 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국가가 없는 세상을, 종교와 살인이 없는 세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지금 내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1971년에 발매된 이 노래가 아직까지 인권운동 레파토리로 쓰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때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색깔 놀이를 자처한 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전혀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래서 세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채로 이런 감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어지는 공연을 보며, 나는 눈으로 계속 흑인이나 동양인들을 찾았다. 이주민이 많다는 독일의 이 국제 무용학교에 흑인 한 명 없던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봐도 되는 걸까? 나에게는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같이 자기검열도 시작되었다. 어차피 백인 나라에 백인 많은 건 당연한 게 아닌가. 피부가 하얀 그들 중에도 누군가는 퀴어거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서 왔을 수도 있고, 난민일 수도 있으며 가정폭력 당사자, 성폭력 당사자 일수도 있고, 자살을 시도해본 사람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가 저 몸들에게 담겨 있을텐데, 이런 생각하는 내가 나쁜걸까 번뇌에 빠지던 중 쉬는 시간이 되었다.

 

공연 전체가 마냥 답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다양했다.

몸으로 이렇게까지 전해질 수 있구나 점점 깨달아지며 현대무용의 장점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왔고 북적한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게 담배를 물었다. 그때 입구에서 만난 우아한 할머니가 내가 있던 곳으로 와서 담배를 꺼냈다. 그분도 혼자 오신 모양이었다. 담뱃불을 빌려드리며 대화가 시작이 되었다. 어떻게 오셨냐고 물으니 플랫메이트들이 오늘 공연을 한다고 했다. 나도 내 플랫메이트가 초대를 해줬다고 하며 우리는 그들이 같은 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 플랫메이트들이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그럼 당신도 이탈리아에서 오셨냐 물으니 본인은 미국인이며 독일에서 30년을 살며 의사로 일하신다고 했다. 그는 내게 첫 번째 공연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가장 불편한 공연이었는데 말이다. 나와 우아한 할머니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어째서 그는 커다란 아름다움을 느낀 걸까? 할머니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영영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낀 불편함의 기원을 헤아려볼 수는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다. 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다양성이 좋은 말처럼은 보이지만 어떻게 다양함을 존중하는지 모르는 시대에 종종 이 문장의 효력이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이 문장만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기에는 너무 무뎌졌다는 느낌 말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 중 가장 극단적 차별주의자인 나의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그는 목사 사모님으로서 종교에 어긋나는 이들을 열심히 배척하시지만, 내가 당신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실 테다. 하지만 할머니와 나의 결과적 행동은 다르다. 그는 추석날 쇼파 위에 동성애 반대 플랜카드를 올려놓지만 나는 동성결혼 합법화 플랜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것은 그와 나의 당연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모두’에는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없고, 내가 ‘모두’를 말할 때는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고도 미워할 수 있을까? 잘 알아서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모른 채로 미워하는 건 항상 더 쉽고, 세상에 많은 혐오들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안다.

최근에 콩고에서 온 사람과 길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너무 못 알아들어서 어서 헤어지고 싶었다. 그도 대화 중간 나에게 왜 자꾸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냐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지난 뒤 생각해보니, 가장 큰 이유는 흑인 영어가 내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였다. 그의 말하기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그보다 더 영어를 못해도 유럽인들과 이야기하는 게 더 이해하기가 쉬웠던 걸 생각해보면 그랬다. 모르는 새에 나에게 익숙한 어느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언어, 돌이켜보면 무섭기도 하다. 어느 날은 살날이 너무 많이 남은 것 같다가도,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살날이 남아서 다행이었다. 배울 수 있는 시간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자주 생겨야 한다. 우리는 예쁘지 않은 몸을 더 많이 접해야 하고, 비슷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들도 만나보아야 하고, 마냥 귀엽지만 않은 동물과의 관계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 흘깃 보았을 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들이 더 자연스러워져서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지. 지금 기괴해 보이는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기쁠까?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존중이 신체화가 되려면 내가 스스로에게도 더 너그러울 줄 알아야 된다고 쓰고 싶다. 나를 무의식의 틀에 가두는 것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연결된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글 쓸 때마다 내가 뭐라고 이런 글을 쓰냐며 자격을 의심하는 것도, 한국을 떠나 전범 국가였던 부자 백인 나라 온 것에 종종 죄책감 가지는 것도. 사람이 갈등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슬픈 일일 테지만, 사람이 늘 갈등하고, 고민하며 사는 것도 너무 괴로우니 말이다. 나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내 친구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를 조금 더 용서해야겠다고 말하는 게 내가 다른 이를 사랑해 보이겠다는 최선의 마음이다. 누구 또 좋은 생각 있으면 내게 꼭 말해줬으면 좋겠다.

 

바램이 바램으로 남아있지 않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싶다

댓글 5
  • 2023-06-18 09:46

    오늘 아침에 어제 신문을 펼쳐서 읽은 것 중의 하나가 '김남희의 걷다보면' 코스타리카 편.
    그 글을 읽으면서 코스타리카, 음.. 코스타리카, 뭔가 친숙한데.. 라고 생각했는데, 알론소의 고향이었어요!!
    스쳐지나가듯 현민의 글에 단 한 번 등장한 그 나라의 이름이 일으키는 진동과 그 효과가 멋지네요.
    이렇게 이야기들이 연결될 때 뭔가 짜릿한 느낌이 있어요.
    "푸라 비다(Pura vida, 순수한 삶)!"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래요.
    지금 현민이에게 그 말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푸라 비다!!

  • 2023-06-19 09:43

    헐...나도 이 글을 읽으면서 코스타리카...김남희의 코스타리카?! 신기하군...이랫었는데....이번엔 콩고를 찾아봤어요. 아프리카 콩고가 어디쯤에 있었지? 하면서요.

    이매진...맞아요. 한 때는 전주만 나와도 가슴 뛰었는데
    어느새 클리세가 된 듯한 느낌도.

    이방인으로서, 1세대 백인나라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으로써
    현민은 '차이'와 '정의'에 대해 더 예리한 질문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하하

  • 2023-06-19 10:05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세상 진짜 기쁘겠네요 ㅎ
    모두 라고 하면서도 모두가 아닌
    다양성이라지만 별로 다양하지않은
    좁고좁은 세상에 갇혀사는 느낌인 나로서는
    현민의 경험들이 참 의미있어 보이네요
    이제 부러워하는건 안할라는데 ㅋㅋ

  • 2023-06-19 18:52

    남을 차별하는 마음이 나를 차별하는 마음이기도 하더라구요.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을 고민하는 현민의 마음이 지금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 2023-06-22 09:29

    저는 나와 다르게 생긴 생명체에 대해서 유달리 신체가 반응할때가 있는데요, 현민의 글을 보니 "지금 기괴해 보이는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기쁠까? " 저도 그 순간이 기대되네요. 피하지말고 계속 봐야겠네요~~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현민
2023.08.18 | 조회 492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사진에서 누굴까요.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종종 외국에 나와 사는 여자애들을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다. 정처 없는 느낌.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떠도는 사람들의 정처 없음을 그들과 나로부터 느낀다.  가족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친구들의 화두였다. 우리는 만나면 처음엔 웃긴 얘기나 좀 하다가 결국 가족사로 가서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할 것 같은 얼굴들로 끝냈다. 자신의 상처를 바탕삼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의 원가족은 집이었는데,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아니었다. 가족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같이 기괴해서 웃겼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처량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는 자기 탓을 하기가 가장 쉬웠다. 이제는 그때처럼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지겹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핸드폰 녹음기에서 한 시간짜리 녹음 기록을 발견했다. 작년 베를린에서 모였던, 아무도 한국에서 살지 않는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우리는 대안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그 대화는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끝났다. 원가족에 대한 결핍을 대안가족으로부터 메꿀 수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안정과 현재의 혼란과 과거의 결핍은 그대로, 서로 뒤섞이지 않고 영원히 너와...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사진에서 누굴까요.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종종 외국에 나와 사는 여자애들을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다. 정처 없는 느낌.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떠도는 사람들의 정처 없음을 그들과 나로부터 느낀다.  가족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친구들의 화두였다. 우리는 만나면 처음엔 웃긴 얘기나 좀 하다가 결국 가족사로 가서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할 것 같은 얼굴들로 끝냈다. 자신의 상처를 바탕삼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의 원가족은 집이었는데,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아니었다. 가족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같이 기괴해서 웃겼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처량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는 자기 탓을 하기가 가장 쉬웠다. 이제는 그때처럼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지겹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핸드폰 녹음기에서 한 시간짜리 녹음 기록을 발견했다. 작년 베를린에서 모였던, 아무도 한국에서 살지 않는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우리는 대안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그 대화는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끝났다. 원가족에 대한 결핍을 대안가족으로부터 메꿀 수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안정과 현재의 혼란과 과거의 결핍은 그대로, 서로 뒤섞이지 않고 영원히 너와...
현민
2023.07.17 | 조회 44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바램이 삶이 되려면       최근에는 집 재계약과 전기세, 정원 가꾸기로 매일매일 그룹채팅방이 시끄러웠다. 급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임의적으로 회의를 만들지만 회의 시간을 잡기란 굉장히 어렵다. 생각보다도 더 12명이 한집에 머무르는 때는 드물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도 금방 바뀌고, 매일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4년이 된 이 셰어하우스에 현재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알론소다.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한국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사는 코스타리카에서 온 그는 이 도시에서 현대무용 학교를 다닌다. 그는 댄서다.   최근 그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졸업하는 학년을 위한 공연을 열었다. 알론소는 셰어하우스 톡방에 공연 정보를 공유해줬는데, 티켓 값이 생각보다 비싸 못 가겠군 하던 차였다. 공연 오냐고 묻는 그에게 표 비싸더라 궁시렁대니 무료 티켓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알론소가 댄서라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한 번도 그가 제대로 춤을 추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입구를 못 찾아 공연 시작 10분 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머리가 아름답게 센 할머니를 만났다. 굉장히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할머니도 입구를 못 찾는 중이었다. 같이 입구를 찾고 우여곡절 끝에 입장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는 시야에서 없어졌다. 부랴부랴 좌석에 앉아 놓여있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바램이 삶이 되려면       최근에는 집 재계약과 전기세, 정원 가꾸기로 매일매일 그룹채팅방이 시끄러웠다. 급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임의적으로 회의를 만들지만 회의 시간을 잡기란 굉장히 어렵다. 생각보다도 더 12명이 한집에 머무르는 때는 드물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도 금방 바뀌고, 매일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4년이 된 이 셰어하우스에 현재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알론소다.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한국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사는 코스타리카에서 온 그는 이 도시에서 현대무용 학교를 다닌다. 그는 댄서다.   최근 그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졸업하는 학년을 위한 공연을 열었다. 알론소는 셰어하우스 톡방에 공연 정보를 공유해줬는데, 티켓 값이 생각보다 비싸 못 가겠군 하던 차였다. 공연 오냐고 묻는 그에게 표 비싸더라 궁시렁대니 무료 티켓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알론소가 댄서라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한 번도 그가 제대로 춤을 추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입구를 못 찾아 공연 시작 10분 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머리가 아름답게 센 할머니를 만났다. 굉장히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할머니도 입구를 못 찾는 중이었다. 같이 입구를 찾고 우여곡절 끝에 입장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는 시야에서 없어졌다. 부랴부랴 좌석에 앉아 놓여있던...
현민
2023.06.17 | 조회 463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어젯밤의 이야기   어제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면서 초콜렛을 찾으러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에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두 달 전쯤 이사 온 이탈리안이자 독일인이다. 내 윗방에 사는데 내가 늦게 자기 때문에 레오가 얼마나 늦게까지 안 자는지 그의 발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레오는 늦은 밤에 꼭 담배를 한 대씩 피러 나온다. 문을 열어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쇼파 위에서 자고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레오는 그 고양이와 같이 찍은 셀카를 보여주었다.   나와 레오가 같은 물건을 산다면 나는 설명서를 아예 읽지도 않고 무작정 끼워보는 편인 반면에 레오는 침착하게 읽은 뒤 하나씩 맞춰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레오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물리적인 평안도, 마음의 평안도 주는 사람이다. 마주친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나는 레오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레오는 약간 피곤하다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요새 나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떻게 해야 더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니 정말 내가 독일에 머무르고 싶긴 한 건지. 나는 누가 묻지 않으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데, 레오에게...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어젯밤의 이야기   어제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면서 초콜렛을 찾으러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에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두 달 전쯤 이사 온 이탈리안이자 독일인이다. 내 윗방에 사는데 내가 늦게 자기 때문에 레오가 얼마나 늦게까지 안 자는지 그의 발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레오는 늦은 밤에 꼭 담배를 한 대씩 피러 나온다. 문을 열어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쇼파 위에서 자고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레오는 그 고양이와 같이 찍은 셀카를 보여주었다.   나와 레오가 같은 물건을 산다면 나는 설명서를 아예 읽지도 않고 무작정 끼워보는 편인 반면에 레오는 침착하게 읽은 뒤 하나씩 맞춰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레오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물리적인 평안도, 마음의 평안도 주는 사람이다. 마주친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나는 레오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레오는 약간 피곤하다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요새 나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떻게 해야 더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니 정말 내가 독일에 머무르고 싶긴 한 건지. 나는 누가 묻지 않으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데, 레오에게...
현민
2023.05.17 | 조회 530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좋은 이별 나쁜 이별     나의 집은 오래된 3층짜리 주택이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허물어 새집을 지어야만 하는, 12개의 방과 12명의 사람들이 있는 집. 5년 전 레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 집을 찾고 사람을 모아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이 필요에 의해 이 곳에 모이고 떠나가 지금 내가 이곳에 산다. 각자 사느라 바쁘면서도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서로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내가 이사 온 이후로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 비싸게 세놓으려 했던 집주인이 치솟는 물가 탓에 집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당분간 우리 12명은 집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넉넉한 기간을 재계약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았던 미키와 캐시가 이사를 가 가일과 레오가 들어왔고, 나와 앞, 옆방을 마주하는 쿠쉬와 필리페는 본국으로 장기 휴가를 가 그 기간 동안의 단기세입자 다니와 발렌티나가 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A가 쫓겨났다.   최근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내가 임시로 만들었던 우체통 이름표   A는 영화를 공부한다고 했다. 내가 이사를 온 직후, 한동안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애들에게 A가 어디에 갔냐고 물었는데, 그의 개인적 문제 때문에 잠시 집을 비웠다고...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좋은 이별 나쁜 이별     나의 집은 오래된 3층짜리 주택이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허물어 새집을 지어야만 하는, 12개의 방과 12명의 사람들이 있는 집. 5년 전 레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 집을 찾고 사람을 모아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이 필요에 의해 이 곳에 모이고 떠나가 지금 내가 이곳에 산다. 각자 사느라 바쁘면서도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서로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내가 이사 온 이후로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 비싸게 세놓으려 했던 집주인이 치솟는 물가 탓에 집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당분간 우리 12명은 집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넉넉한 기간을 재계약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았던 미키와 캐시가 이사를 가 가일과 레오가 들어왔고, 나와 앞, 옆방을 마주하는 쿠쉬와 필리페는 본국으로 장기 휴가를 가 그 기간 동안의 단기세입자 다니와 발렌티나가 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A가 쫓겨났다.   최근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내가 임시로 만들었던 우체통 이름표   A는 영화를 공부한다고 했다. 내가 이사를 온 직후, 한동안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애들에게 A가 어디에 갔냐고 물었는데, 그의 개인적 문제 때문에 잠시 집을 비웠다고...
현민
2023.04.16 | 조회 52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