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3회]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 <도니 다코>(2001)

청량리
2024-03-20 08:55
491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도니가 벌이는 혹은 도니에게 벌어지는 ‘부분’의 사건들이 이 영화의 스토리임은 분명하나, 그것이 영화 ‘전체’를 보여주진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춘기 소년’이 영화의 주인공인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자체가 ‘사춘기’와 같은 그런 영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각 장의 동질성을 모자이크와 같은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고, 전체적 배치의 체계로 파악해야만 한다. 우리의 지각에 처음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오는 것은 전체이지 병치된 요소들이 아니다.

- 『사유 속의 영화』 중 「영화의 새로운 심리학(1945), 메를로 퐁티」(이하 같은 책) p.163

 

‘대면’수업시간에 ‘비대면’방식의 시청각 비디오만 준비하는 역발상의 ‘파머’선생. 그날도 자칭 사랑전도사 ‘짐 커닝햄(패트릭 스웨이지)’의 강연이 이어졌다. 비디오테잎이 끝나고 파머 선생은 복습차원에서 커닝햄의 강연내용이 담긴 메모를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읽기를 요구하자 결국 도니는 소리친다.

“모든 감정을 두려움(fear)과 사랑(love), 그렇게 간단하게 이분법으로 나눌 순 없다고요! 인간 감정 전체를 봐야죠! 이런 젠장, XXXXXX!!!!” 도니는 파머선생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고 교장실로 불려간다.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부모나 선생에게 심한 욕을 하고, 장난삼아 (아빠)총을 갖고 노는 도니는 소위말해 ‘부적응아’, ‘문제아’다.

 

 

학교에서도, 집안에서도 늘 겉도는 도니

 

오래 전 같은 반에 ‘도니’ 같은 부류의 친구가 있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싸움도 곧잘 했었고 당연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종종 ‘땡땡이’치고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었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그 녀석과 함께 놀 때면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곤 했었다. 그의 몇몇 태도를 안 좋게 보는 선생과 주변 아이들은 그를 탐탁지 않아했다.

 

이따금 그 녀석과 옆자리에 앉아 수업시간에 이어폰을 나눠 끼고 몰래 음악을 듣곤 했고, 소풍 때 밥을 안 싸온 그 녀석과 멀찍이 떨어져 김밥을 나눠 먹기도 했다. 별거 없었다. 그 녀석은 사회부적응이나 트러블메이커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마주하는 세계 속에서 단지 살아갈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니도 ‘실제 그렇다’기보다는, 몇몇 '사건'들을 통해 그를 ‘그렇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팩트’가 되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프랭크의 저음에 밤에 어디론가 이끌려 나갔다 온 다음 날, 어김없이 ‘사건’은 터졌다. 그리고 마치 예견된 것처럼 어떤 ‘인연’으로 연결됐다. 프랭크에게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밤사이 도니는 학교의 수도배관을 망가뜨린다. 임시 휴교된 다음 날, 그는 우연히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레첸(지나 말론)’을 만난다. 도니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그레첸은 자신과 부모의 관계 속에서 외로워한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

 

도니가 프랭크에게 묻는다.  도대체 눈은 왜 그렇게 된거야? 

 

그러나 그럴 때마다 프랭크는 자꾸만 얼마 남지 않은 종말에 대해 경고한다. 그레첸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깊어질수록 도니는 더 이상 프랭크에게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 28일 후 세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그레첸은 전혀 모른 채 나 혼자만 알고 있다.

"모든 존재는 혼자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로베타 스패로우’ 할머니가 도니에게 했던 말). 아니라고 믿고 싶긴 한데, 근거를 못 찾겠어요. 그렇다고 제 인생을 그걸 찾는데 써버리고 싶진 않아요. 전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도니는 심리상담사가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혼자 죽는 게 두렵다”며 눈물을 흘린다.

 

마침 과학 선생님으로부터 ‘시간여행’에 대한 책 한 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로베타 스패로우’ 할머니가 바로 그 책의 저자였다. 미국판 ‘고교얄개’를 찍는가 싶더니 감독은 갑자기 SF장르에도 욕심을 낸다. 프랭크의 분장과 어설픈 효과만 보더라도 저예산 영화인데, 시간을 다루기에는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도니 다코>는 웜홀, 평행우주, 시간이동 등을 효율적으로 담아낸다.

 

시공간에 관한 놀라운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의 후반부를 놀라울 정도로 짧게 쓴다면 이러하다. 쿠퍼(매튜 매커히니)는 ‘웜홀(우주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을 통해 우주를 헤맸지만 결국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는 데 실패한다. 지구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블랙홀’의 특이점을 통과하면서 5차원의 세계와 마주하게 되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의 딸이 머무는 서재에 도착한다. 그리고 책과 시계초침을 통해 딸에게 중력방정식을 풀 힌트를 전달해 준다.

 

 의문의 할머니로 등장하는 로베타 스패로우가 쓴 '시간여행의 철학' (서점에서 볼 순 없을 걸?)

 

저예산 영화 <도니다코>에서는 훨씬 가성비 높은 방법으로 시공간을 이동한다. 로켓을 타고 우주 ‘밖으로’ 날아가는 대신, 마음 ‘안에서’ ‘웜홀’ 같은 구멍이 울렁울렁 뻗어 나온다. 도니는 이 ‘웜홀’을 통해 평행우주의 또 다른 세계를 오가며 ‘붕괴’된 세계를 구하려 한다.

도니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자동차 사고로 그레첸이 죽게 되자, 죄책감에 흥분한 나머지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을 총으로 쏜다. 그런데 손에 들려있는 일그러진 토끼가면으로 보고 그가 프랭크임을 깨닫는다. 쿠퍼가 자신의 딸 머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듯, 자신이 죽였던 프랭크가 밤마다 나타나 ‘28일’ 후 세계의 ‘종말’에 대해 알려줬던 것이다.

 

영화는 제작비 관계로 <인터스텔라>의 시각효과를 주진 못 했으나, 비눗방울 터널 같은 통로를 통해 도니는 28일 전 자신의 침대로 되돌아온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의 힌트로 중력방정식을 푼 머피가 ‘유레카’를 외치듯, 도니도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평행우주)에 대한 퍼즐조각을 맞추고는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음을, 그렇게 구해야만 함을 깨닫는다.

 

내가 지각할 때 내가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내 앞에서 조직된다.

- 같은 책, p.169

 

이윽고 영화의 맨 처음 자신을 빗겨갔던 비행기 엔진이 이번에는 도니의 침대 위로 떨어지며 마무리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사건을 도니의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 그레첸과 프랭크, 파머선생 등의 ‘삶’을 다시 보여주며 우리의 ‘죽음’은 결국 다시 삶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 무언가의 죽음은 끝이나 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 부분의 합으로는 전체를 알지 못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도니'와 <도니 다코>의 이야기. 알게 되면, 좋아하게 되면, 받아들이게 되면 '판단'하지 않는다.

 

왼쪽이 제이크 질렌할, 오른쪽이 감독 리처드 켈리, 가운데는 도니의 여자친구 역의 지나 말론이다.

 

이건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는 영화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결말이 열려 있다기 보다는 애초부터 결론에 관심이 없는 영화다. 그러니 <도니다코>를 보고나면 청춘로맨스, SF, 범죄스릴러 등 어떤 장르에도 넣기가 어렵다.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했고, 국내에서도 개봉 2주 만에 극장에서 내려간다. 그러나 이후 ‘비디오시장’에서 재평가되고(이런 영화들이 은근 많다) 지금은 매니아들 사이에서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한 마디만 더 덧붙여본다. 긴긴밤 안주거리로 곱씹을만한 영화이야기를 찾는다거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책상 위가 사춘기 아이들의 정신상태처럼 혼란스럽다거나, 팬심에 내용불문 제이크 질렌할의 리즈시절이 궁금한 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당신의 긴-밤은 지루하지 않을 것이고, 내 책상만 혼란스운 게 아니니 동질감의 위안을 얻을 것이고, 앳된 제이크 질렌할을 보는 기쁨은 굳이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댓글 1
  • 2024-03-26 09:10

    와, 이 sf 봐야겠어요.
    마이너한 sf 좋을 것 같군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이 글은 2024년 1분기 '읽고쓰기1234'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읽고쓰기1234'는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1년에 4번, 3개월에 한번씩, 1박2일 동안 각자 읽고 공부한 책에 관해 쓴 글들을 발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회원들이 발표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이 코너를 유심히 보시면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어떤 분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문탁네트워크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타르드 사회학의 기본 골자 이해하기 - 가브리엘 타르드 『사회법칙』 리뷰       인간세계의 과학은 가능한가?  우리는 물질이나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불변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그를 토대로 ‘과학’을 수립해 왔다. 반면 사회에 대한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냐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행위는 자연계보다 훨씬 복잡해 보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다른 학문들은 연구의 대상과 주체를 분리할 수 있는 반면에, 사회학은 우리가 ‘사회 세계’에 포함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탐구가 더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들은 초창기부터 사회학이 ‘과학’과 같은 지위를 얻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오늘 다룰, 그리고 내가 <1234>를 통해 올 한해 동안 다룰 가브리엘 타르드(Jean Gabriel Tarde, 1843~1904)는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회학의 창시자’들 중 한 명이다. 타르드는 물질계와 생물계에서 형성된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계에서도 충분히 ‘과학’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르드의 사회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계와 생물계에서의 과학이 어떤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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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7.24 | 조회 115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3) 세란 무엇인가   한비의 법술세 중에서 내게 가장 친숙한 단어는 세(勢)이다. 법은 정작 자신이 위반하기 전까지 법령의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술 또한 평소에 나의 의중을 숨기는 데는 잼병이라 내 관심사 밖이다. 그에 반해 세는 집안의 장녀, 맏며느리, 아내이자 엄마 등 내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자리’이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한비의 세가 내가 생각하는 자리, 위치를 의미할까? 먼저 세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노자의 세는 필연이다 『사기』에서 한비는 「노장신한열전」에 속해있다. 사마천은 도가의 대표자로 노자와 장자를, 법가의 대표자로 신불해와 한비를 각각 소개하며, 이들이 공통적으로 도와 덕의 정신에서 출발한다고 평가한다. 한비는 왕필보다 500년 앞선 『노자』의 최초 해설자이다. 『한비자』에는 「해로」편과 「유로」편 두 편에 걸쳐 도와 덕에 대한 해석과 주, 그리고 사례를 싣고 있다. 이 때문에 한비가 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노자』로부터 세에 대한 단서 또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도(道)는 모든 것을 낳고(生), 덕(德)은 모든 것을 기르고(畜), 물(物)은 모든 것을 꼴지우고(形), 세(勢)는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成). 그러기에 모든 것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명령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입니다. (『노자』 51장, 현암사, 오강남 풀이)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 『노자』에서 도와 덕의 성격을 말해주는 유명한 문장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알면 만물의 생성 변화에 대해 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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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7.23 | 조회 9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반쯤 이해된 '느낌'이 주는 선물        어머니의 치매는 좀더 깊어진 듯하다. 요양병원에서 처방약과 재활치료를 하고 있어, 집에서처럼 나빠지는 것이 매일 알아 볼 정도의 진도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30분의 짧은 면회시간이지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식구들을 알아보는 듯 하고, 어떤 때에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다. 팬데믹 상황이 종료되었는지, 면회에 나이 제한이 풀렸다. 어버이 날에 어머니의 증손자 하빈이를 데리고 갔다. 녀석은 마스크를 쓴 왕할머니를 보고는 긴가민가 하더니, 마스크를 벗자 기억이 났는가 보다 꾸벅 인사한다. 하빈이 과자를 드시던 어머니가 그 과자를 꺼내서 하빈이에게 건낸다. 머뭇 거리는 녀석에게 어서 받으라는 듯, 과자 든 손으로 부드럽게 아이를 어른다. 하빈이가 받아 먹는다. 하빈를 기억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보인다. 그랬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혀 못하시지만 정상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의식’은 유지하고 계신다는 뜻이니까.   의식이란 무엇인가?       다마지오는 의식을 세 층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근저에 ‘원초적 자아(proto-self)’가 있고 그 위에 ‘핵심 의식(core consciousness)’, 맨 위에 주변으로 뻗어 나가는 ‘확장의식(extended consciousness)이 있다.      그는 진화 과정에서 정서는 의식이 출현하기 전에 나타났으며(p.64), 원시적 생물에도 정서가 있다고 한다. 정서란 유기체의 변화, 즉 생리적 변화나 행동변화를 유발하는 자극에 대한 복합적 반응을 말한다. 이 자극은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을 포함하는데, 이 자극의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을, 유기체가 ‘느낀다(feeling)’고 표현하였다. 한편, 생물은 항상성을 유지해야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생명현상이 가능하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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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4.07.20 | 조회 14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문장인데, 사람 좋아하는 나에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덕(德)이다. 반드시 외롭지 않으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 문장만으로는 너무 막연해서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소화불량이다. 『장자』의 「덕충부」편에는 덕이 충만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외로울 틈이 없다. 그렇다면 덕을 몰라 답답한 나에게 어떤 팁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덕이 충만한 표시는 어떻게 드러날까.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그들의 매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1. 발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존하다    형벌을 받아 한쪽 발이 잘린 절름발이 숙산무지가 공자를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공자는 무지의 외형을 보고 이런 몰골이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이 무슨 소용인가 질책했다. 유가인 공자 입장에서는 형벌로 발목이 잘린 무지가 탐탁지 않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유가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을 불효로 여기기 때문이다. 불효도 모자라 형벌까지 받은 몸이라니 구제불능이 아니냐는 반문이 내포되어 있는 반응이다. 무지는 발을 잃은 후 자신을 깨우칠 새로운 배움을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말하다니 실망이라고 답한다.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안으로 들어오라 권했으나 무지는 그 자리를 떠났다.         신도가도 형벌을 받아서 한쪽 발이 잘린 절름발이다. 그가 정나라 재상인 자산과 함께 백혼무인이라는 스승께 배우고 있었는데, 자산은 신도가와 함께 스승의 방에 드나드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문장인데, 사람 좋아하는 나에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덕(德)이다. 반드시 외롭지 않으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 문장만으로는 너무 막연해서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소화불량이다. 『장자』의 「덕충부」편에는 덕이 충만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외로울 틈이 없다. 그렇다면 덕을 몰라 답답한 나에게 어떤 팁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덕이 충만한 표시는 어떻게 드러날까.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그들의 매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1. 발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존하다    형벌을 받아 한쪽 발이 잘린 절름발이 숙산무지가 공자를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공자는 무지의 외형을 보고 이런 몰골이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이 무슨 소용인가 질책했다. 유가인 공자 입장에서는 형벌로 발목이 잘린 무지가 탐탁지 않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유가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을 불효로 여기기 때문이다. 불효도 모자라 형벌까지 받은 몸이라니 구제불능이 아니냐는 반문이 내포되어 있는 반응이다. 무지는 발을 잃은 후 자신을 깨우칠 새로운 배움을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말하다니 실망이라고 답한다.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안으로 들어오라 권했으나 무지는 그 자리를 떠났다.         신도가도 형벌을 받아서 한쪽 발이 잘린 절름발이다. 그가 정나라 재상인 자산과 함께 백혼무인이라는 스승께 배우고 있었는데, 자산은 신도가와 함께 스승의 방에 드나드는 것이 아무래도...
기린
2024.07.13 | 조회 19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이 글은 2024년 1분기 '읽고쓰기1234'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읽고쓰기1234'는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1년에 4번, 3개월에 한번씩, 1박2일 동안 각자 읽고 공부한 책에 관해 쓴 글들을 발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회원들이 발표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이 코너를 유심히 보시면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어떤 분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문탁네트워크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텍스트가 현실을 창조하다 『맹자』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글쓰기     들어가기   “이 책은 정체政體의 이 텍스트적 대역代役, double, 즉 성인과 군주라는 대응적 형상 속에 구체화된 하나의 대역이 부상하는 과정과 그것이 국가 구조에 결속되는 방식을 다룬다.”(17쪽)   『고대 중국의 글과 권위 : 제국으로 가는 글의 여정』(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최정섭 번역, 미토)가 다루는 대상은 한자로 쓰여진 텍스트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백가의 텍스트나 『시경』, 『주역』, 역사서는 물론이고 행정 법률 문서, 호적부, 청동기 명문이나 묘비문 및 의학서적와 점술서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글의 유형들이 국가나 사회에서 어떻게 힘을 발생시키고 또 어떻게 힘을 행사하는지 역사적으로 밝히고 있다.   글은 정치적, 종교적, 지역 영역들을 아우르며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을 상호 교차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힘을 갖고 사용되었던 글자는 그것의 정치적 전유술을 통해서 행정 법률 문서나 호적부조차도 정치적으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제1장에서 이뤄진다....
 이 글은 2024년 1분기 '읽고쓰기1234'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읽고쓰기1234'는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1년에 4번, 3개월에 한번씩, 1박2일 동안 각자 읽고 공부한 책에 관해 쓴 글들을 발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회원들이 발표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이 코너를 유심히 보시면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어떤 분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문탁네트워크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텍스트가 현실을 창조하다 『맹자』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글쓰기     들어가기   “이 책은 정체政體의 이 텍스트적 대역代役, double, 즉 성인과 군주라는 대응적 형상 속에 구체화된 하나의 대역이 부상하는 과정과 그것이 국가 구조에 결속되는 방식을 다룬다.”(17쪽)   『고대 중국의 글과 권위 : 제국으로 가는 글의 여정』(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최정섭 번역, 미토)가 다루는 대상은 한자로 쓰여진 텍스트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백가의 텍스트나 『시경』, 『주역』, 역사서는 물론이고 행정 법률 문서, 호적부, 청동기 명문이나 묘비문 및 의학서적와 점술서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글의 유형들이 국가나 사회에서 어떻게 힘을 발생시키고 또 어떻게 힘을 행사하는지 역사적으로 밝히고 있다.   글은 정치적, 종교적, 지역 영역들을 아우르며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을 상호 교차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힘을 갖고 사용되었던 글자는 그것의 정치적 전유술을 통해서 행정 법률 문서나 호적부조차도 정치적으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제1장에서 이뤄진다....
자작나무
2024.07.07 | 조회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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