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게임의 미학

우현
2023-05-25 17:11
346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시간 낭비’라며 평가 절하하는가? 그래서 나는 『20세기 매체 철학』과 『게임 : 행위성의 예술』 두 책을 통해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 그중에서도 게임이 가진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보려 한다.

 

  1. 게임 : 무정형적 이미지들의 다발

 우선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이 어떤 것인지, 고전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정리해야겠다. 이에 대해서는 산업혁명과 디지털혁명을 거쳐 매체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노르베르트 볼츠(1953~)의 논지를 가져오는 게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볼츠는 디지털 미학과 전통 미학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다. 산업혁명 이후로 예술은 특권화된 계급과 그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가 아니게 됐다. 디지털혁명을 거치면서는 기계들의 디지털화, 전문 기술들의 대중화를 통해 더욱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고, 우리는 누구나 쉽게 무언가를 만들거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미학 내에서 예술을 둘러싼 담론이었던 ‘존재', ‘진리', ‘정신’, ‘아름다움’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디지털 매체 예술에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시점에 놓였다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가진 복합성에 따라 우린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지각 체험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볼츠는 ‘미학’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 등에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중요한 건 작품 분석이 아니라 각각의 수용자의 체험과 지각방식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해석과 관조를 기반으로 한 예술 이해 또는 미적 체험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과 이미지의 스펙터클 그리고 몰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수용자 사이에 있는 매체가 더욱더 중요해진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수용자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지금의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과 그 수용방식은 어떠한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볼츠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언급한 ‘아우라의 몰락’과 같은 맥락을 짚는다. 사진의 등장으로 원본성이 없어진 이미지들, 무한정 복제가 가능해진 이미지들. 여기에 더해 디지털혁명에서 추가된 특징은 “일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속성”이다. 이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반드시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만 나타나는 속성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현된 대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며 무대상적인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디지털 스크린의 광원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은 이미지적 재현과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인 것이다. 회화가 재현하던 대상은 해체되었고, 실제 대상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들만이 남았다. 여기서 우린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차원에서, 새로운 유희 공간이라는 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물질적 미학의 배경이 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볼츠가 설명하고 있는 맥락과 매우 맞닿아 있다. 게임은 실체가 없는 무정형적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특정 요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나는 캡콤사의 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는 ’게임의 스토리가 좋다’,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이 좋다’는 차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이 게임이 가진 규칙, 게임을 통한 경험, 게임이 가진 그래픽 이미지, 스토리 등등 전반 모두를 가리켜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회화처럼 특정 작품이 재현하는 고정적인 대상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게임은 무정형적 이미지 다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계를 뒤집었다고 평가받는 게임들. 여러분은 몇개나 알고 계신지?

 

2. 게임 : 디지털 환경을 통한 ‘총체적인 주의 집중’ 활동

 하지만 게임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집중과 침잠을 통해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선 그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된 주체는 직접 자신만의 게임플레이를 만들어 가며 각자의 행위성을 경험한다.

 볼츠는 벤야민이 언급한 ‘시각적 촉각성’을 가져오는데, 벤야민은 캔버스의 그림을 보며 ‘침잠적 지각'을, 반대로 영화관을 보며 '정신오락적/분산적 지각'을 얘기했다.

 

전통 회화에 있어 자발적 수용자는 이미지를 해석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이미지 앞에서 서서 관조적 침잠과 몰입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는 미처 그럴 여유 없이 이미지의 전환, 즉 장면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 속에서 수용자는 관조적 침잠과 몰입 대신에 분산적 지각과 촉각적 지각을 체험하게 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허나 볼츠는 디지털 세대에서는 다시 영상 속으로 함몰하는 집중과 침잠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환각 체험처럼 영상에 몰두하는 우리들. 밤을 새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새벽까지 게임에 빠져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예인 컨텐츠에 개입한다. 수용자는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플레이어가 되고, 실시간 채팅으로 방송 주체와 소통하고, 댓글을 다는 등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영상과 컨텐츠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문제 지점이다. 우리가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새벽까지 게임을 붙드는 모습은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가? 심하게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까지 게임을 붙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집중력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에 갔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은 과연 사실인가(?)

 

3. 게임은 왜이렇게 재밌는가? : 게임이 가진 미학적 가능성

 ‘왜 게임을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은 사실 게임을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무정형적 이미지들을 보며 다양한 지각 체험을 경험하는” 게임은 확실히 전통 예술과 구분된다는 걸 알겠지만, 그것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나,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게임 : 행위성의 예술』 을 통해 게이머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지, 그 경험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3-1. 행위성의 미학

『게임 : 행위성의 예술』의 저자 C. 티 응우옌은 게임만이 가지는 ‘행위성의 미학’을 분석한다. 일부 미학자들은 게임을 전통 예술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 게임의 가치를 강조한다. 게임을 픽션의 일종이라고 보며 해석과 관조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역시 게임이 가진 가능성임이 틀림없지만, 티 응우옌은 그런 분석은 게임이 가진 진정한 가치-행위성의 미학-를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게임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거나, 심지어는 논변을 제시함으로써 좀 더 친숙한 종류의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게임은 그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즉, 게임은 우리가 가진 행위성의 경험을 디자인하여 제공한다. 그리고 행위적 매체는 우리의 실천적 참여가 가진 성격을 형성하는 데 특히 적절하다. <체스>는 논리적 가능성의 연쇄를 따라 다음 수를 내다보는 일에 집중한다. <테트리스>는 매우 빠른 공간적 추론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렇게 디자인된 행위성의 경험은 미적일 수 있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워크룸 프레스

 

 플레이어가 직접 특정 행동을 수행하며 느낄 수 있는 미적 경험-행위성의 미학-. 이런 미적인 경험이 게임에만 있는 건 아니다. 며칠 동안 에세이를 쓰며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았을 때(사실 대부분 착각이다), 친구 손에서 미끄러진 접시를 완벽하게 잡아냈을 때, 처음 보는 이와 스텝을 척척 맞춰가며 춤을 출 때, 우리는 각각의 행위적 매체들을 통해서 일종의 미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은 그러한 쾌를 정제하고 농축하여 우리에게 그 참신한 면모를 제시한다. 게임 디자이너는 일상생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순간을 보다 쉽고 명쾌하게 경험할 수 있게끔 디자인하고, 플레이어는 그 디자인에 푹 빠져서, 때때로는 자신만의 방식-룰을 따르지 않거나 변경하는-으로 행위성을 경험하고 미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특히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더 다양한 규칙과 방식의 지각체험을 기반으로 행위성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즐겨하는 <에이펙스 레전드>(이하 에이펙스)라는 게임은 3명이 한 팀이 되어 총 20팀 사이에서 살아남는 ‘배틀로얄’ 장르의 FPS게임이다. 캐릭터들이 가진 특수능력과 맵 곳곳에 배치된 무기와 지형을 이용하여 마지막 생존팀이 되어야만 한다. 이때 플레이어에게는 같은 팀원들과의 소통, 캐릭터의 능력과 맵 지형에 대한 이해, 조준 능력,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 등이 요구된다. 1등을 차지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챔피언을 달성했을 때의 쾌감은 무척 크다. 이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1등을 차지하는 ‘주인공’을 보는 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직접 체험하고 그 ‘주인공’ 자체가 되는 경험이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 워크룸프레스

 

3-2. 분투형-플레이의 미학

 이때, 게임에서 제시하는 목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의 ‘목표’(goals)와 게임을 하는 ‘목적’(purpose)을 섬세히 구분해야한다. 에이펙스에서의 목표는 많은 처치 수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생존하는 것이다. 반면 목적은 스트레스를 풀거나, 재미를 느끼거나, 어려운 과제를 달성하거나, 상대나 자신의 능수능란한 플레이(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 등이 있다. 이때 목표와 목적이 동일시되는 플레이어도 있는 반면, 꼭 목표와 목적이 구분되는 플레이어도 있다. 티 응우옌은 이를 ‘분투형-플레이어’라고 하는데, 게임의 목표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여기서는 분투가 곧 목적이 된다- 자체를 즐기는 플레이어를 뜻한다. 게임을 즐기는 모든 이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티 응우옌은 많은 사람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꼭 승리만이 목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승리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러한 이중 목적성을 가질 때 비로소 분투형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에이펙스에서는 챔피언을 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랜덤으로 생성되어 점점 줄어드는 서클-이 서클 밖에 있으면 지속적인 데미지를 받는다-을 이용하여 전투를 최소화하며 ‘생존’에 집중하는 방식도 있고, 서클에 상관 없이 수많은 적들과의 ‘전투’에 집중하여 19팀을 전멸시키는 방식도 있다. 다 같은 분투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대체로 승리 자체가 목적이라면 싸움을 최소화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른 팀과의 격렬한 전투를 체험함으로써 겪는 분투와 그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플레이 경험, 승리 시에 느끼는 희열이 목적이라면 어디선가 들리는 전투의 소리와 흔적을 찾아다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할 때 이는 1등을 할 수 있는 확률을 스스로 낮추는 행동이지만, 1등을 원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전투에 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운이 좋아서 쉽게 차지하게 된 1등보다는 신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차지한 6등이 더 값지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내가 그렇다). 누구보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목표를 아무것도 아니게 바라볼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쉬운 예시를 들자면 문탁에서 점심식사 후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진행하는 설거지 내기가 있다. 이 게임은 3분의 1 확률로 결정되는 단순하고도 유치해 보이는 게임이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이겨 설거지를 피하겠다는 목표에 몰입할수록 재밌어진다. 이에 대해 친구를 위해서 설거지를 해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거지를 피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은 그 긴장감 속에서 재미와 승리의 기쁨-혹은 패배의 쓴맛-을 맛본다. 이들이 내기를 하는 목적은 설거지를 피하는 것이고 그에 몰입하지만, 분투형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의 진정한 목적은 목표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쾌감의 분투인 것이다.

 

읽고쓰기 1234 현장에서 동은과 <가위바위보>를 겨루고 있는 모습. 분투의 열기가 느껴지는가?

 

 이러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게임에서 차지한 ‘1등’이라는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1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 속 분투는 분명 ‘현실’의 일이고 가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실재 세계에서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행위의 미학을 느끼는 일은 무척 드물다. 게임은 보다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와 구조를 제시해 주면서 더 폭 넓은 지각체험을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린 미적 요소들의 경험을 보다 뚜렷하게 지각한다.

 지금까지 게임이 가진 미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지점 이외에도 게임은 이미 멀티플레이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미학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은 명확히 (새로운 의미에서)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다. 그를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댓글 6
  • 2023-05-28 15:29

    뭔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게임을 잘 못하는 저에게는 어려운 세계인 듯 합니다.

  • 2023-05-29 09:26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다!!
    음.. 그렇지만,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공부 충실히 하고 쓴 책이지 않을까요?ㅎㅎㅎ

  • 2023-05-31 09:49

    볼츠로 비물질적 미학을 가져오고, 그것이 체험형이며 몰입형이라는 특성에서 게임을 연결하고 있는거지요?
    분투형 플레이는 목표지향적인 경쟁자의 논리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고요.
    게임은 예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세우는 것 같군요.

    게임의 가치가 저평가된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예술로 넣었다면 다음에는 이런 것도 해보는게 어때요?

    오늘날 예술은 윤리성의 고양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하잖아요?
    영성이 사라진 시대에 충만한 행복감의 경험과 그를 통한 윤리적 통찰 등을 예술에 부여하는 경우가 꽤 있는것 같아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과
    살생을 주로 하는 게임때문에 폭력성이 커진다는 인식 등에서는
    게임은 스스로 고립된 존재자, 윤리성의 부재 등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해보실?
    이를테면 설겆이 가위바위보를 매번 할 필요가 있다던가하는...

  • 2023-06-06 11:38

    게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왜 이리 시간은 빨리 지나갈까요?
    게임이 끝나면 밀려오는 멍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게임을 하는 동안 발생되는 엄청난 집중력은 무엇일까요?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승부욕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요?
    왜 오프라인 게임보다 온라인 게임이 더 좋을까요?
    진짜로 축구를 하는 것보다 축구게임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임을 만들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게임을 안 하려는 건 왜 일까요?

    게임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에 여전히 유효한 매체인 듯합니다.

    게임 한 판?? ^^

  • 2023-06-15 16:42

    행위성의 미학이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인지가 궁금해집니다. 본문에서는 체스와 테트리스가 언급되었는데, 가량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가챠를 돌릴 때의 몰입과 흥분 같은 것들도 미학적 요소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인가요?

    • 2023-06-20 13:50

      행위성의 미학과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을 구분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행위성의 미학은 어떤 예술에 대해 관찰자의 영역으로 남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술의 행위자가 된다는 맥락이 포인트인 것 같고요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걸 알고, 실제로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정된 규칙과 역할에 몰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주체적 가능성을 포인트로 짚고 있습니다.

      따라서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의 긴장감을 미학적이라고 포착하기 보다는 포커를 치는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분투적 플레이의 미학으로써 포착할 수도 있는 거라고 봅니다. 가챠든 포커든 행위성의 미학이 깃든 게임이라고 볼 수 있고요.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2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5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6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