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훌륭한 문학 작품은 정의로 나가는 문이다’

스르륵
2023-05-24 11:39
328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1.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야할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난롯불에 고정하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생각에 잠겨 말했다. “루이자나 토모스가 그런 유의 글을 읽은 걸까? 극도로 조심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책이 집 안으로 들어 온 걸까? 어릴 때부터 규정대로 정확하게 실제적인 교육만 받은 아이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다니,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중에서 -

 

                                                         

 

 

그래드그라인드 씨의 걱정은 옳다. 문학은 단순한 장식용이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님을, 또 평소엔 관심없던 일에 뜬금없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게 하는 위험한 것임을 그가 이미 알고 있기때문이다. ‘문학은 인간 삶의 복잡함을 도표로 나타내는 정치경제학 텍스트들의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표현하며, 어떤 면에서는 합리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을 전복시키는 욕망과 상상력에 기여하는(26)’ 불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과 대결하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공리주의적인 경제적 모델은 생각보다 훨씬 막강한 상대다, ‘합리적 선택 모델들은 대체로 철학적 예리함을 내포하며, 아니 어쩌면 철학적 설명들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58)’ 왜냐하면 우리에게 경제적 모델들은 측정하기 어려운 질적인 차이들을 편리하게 양적인 차이로 축소해주고, 복잡한 개별적인 삶의 정보를 집합화해주며, 무엇보다도 불확실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말이다.

 

 

이 세상은 사실만을 원하오. 여러분, 누가 뭐라 하건 자와 저울, 구구표를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성의 어떤 쪼가리라도 무게를 달고 치수를 재고 그 결과를 여러분에게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건 그저 숫자의 문제이고 간단한 산술의 문젭니다.’                                                                           - 같은 책 -

 

 

우리는 이렇게 합리적인 모델들에 근거하여 도출된 ‘사실’을 편애한다. 그러나 사실을 ‘진리’로서 받아들일 경우, 경제학적 접근법은 반드시 의심해 봐야 한다고 너스바움은 강조한다. 왜냐면 정치경제학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상 환원주의적인 완전하지 못한 인식이며, ‘이성’은 빈번히 신뢰를 배반하는 독단적 작동(72)’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질적인 세계의 풍부함과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사랑, 두려움, 희망, 이런 복잡함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문학적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들이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폐기되어 버려선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너스바움은 어떤 소설이 이런 문학적 상상력을 재현하는지, 또 소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와의 생생한 소통 방식을 통해 생의 감각을 구현해내는 소설 ‘자체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어날 법한’ 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허구의 형식이지만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를 오가며 ‘평범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장르로서의 소설에 주목한다.

 

즉, 소설이라는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하게 만들고, 각각의 경험들과 마주치게 함으로써 주인공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또 미래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상상과 성찰’ 을 하게 만든다. 하여 타인의 행복이라는 아주 복잡한 가치를 수치화 하거나, 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합리적으로 판단해내야 하는 여러 공적 판단의 영역에서 문학적 상상력은 그 합리성의 지평을 더욱더 넓고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1. 감정(感情)을 감정(鑑定)하다

한편, 문학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눈앞에 없는 다른 것을 보게 해주는 트레이닝으로서의 문학적 상상력이란, 실은 작품 속 인물들과 자신이 연루(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경험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적 상상력의 공적 역할을 주장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감정 불신론’ 즉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수 백(?)가지 이유들’이다. 너스바움은 대표적인 네 가지 감정 불신론에 맞서 문학적 상상력의 핵심 주자 ‘감정’을 변호한다.

 

첫 번째는 ‘동물적 힘’으로서의 감정이다. 이는 감정이 이성적 사유와는 전혀 관련 없는 충동, 온전치 못한 맹목적인 힘이기에 비합리적 계열에 위치 시켜야 한다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 불신론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은 이미 인정되기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충동’(욕구)과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의 구분에 너스바움도 동의하며, 감정 변론은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는 ‘공평하지 못한’ 감정, 즉 편향된 애착으로서의 감정이다. 쉽게 말해 이는 흔히 우리가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개인적인 유대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있는’ 사실도 공명정대하게 보지 못한다는 일상의 비판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공평한 시각이 진정 무엇인지 묻는다. 빈곤률 3.4%로로 표기되는 수치적 공평함, 또는 그 포괄적인 시야가 진정 공평한 시각일까. 이러한 시각들은 사회적 관심 유발에 매우 불리하다. 모든 것에 공평한 자는 실은 그 어떤 구체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해결 방법을 말해주진 않지만, 감정은 관심을 유발한다.

 

세 번째, 감정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봉사하는 ‘낭만적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보다 큰 사회적 단위나 계급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감정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여타 정치적 사상가들의 주장이다. 감정이 계급과 정치 같은 거대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자유에만 기여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일 수도 있다고 너스바움은 말한다. 전통적으로 장르 속 개인들은 거대 제도들에게 자유를 침해 받는 개인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기에 말이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개별 이야기가 빠진 계급 운동 이야기는 늘 개별적 삶의 개선을 추구하는 계급적 행동의 핵심과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157)'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 주장되어온, '사유로서의 감정'이다. 일명 스토아적인 이 감정은 배고픔이나 갈증같은 충동과는 구분되는, 판단이나 믿음이 수반되는 일종의 사유적인 지각 방식이다. 그런데 사유, 혹은 지각 방식로서의 이 감정은 우리를 오직 스스로에게서 근원하는 지혜가 아닌 외부 세계와 대상에 지나치게 끄달리게 하는 원인이다. 즉 이 감정은 우리에게서 내면의 안정적 평정심을 빼앗고, 오류적 판단을 반복케하여 우리를 불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기에 제거되어져 할 것으로 호명된다.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관점 안에서 연민 같은 동정심은 우리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오류적인’ 믿음에서 야기되는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 버린다. 허나 너스바움은 이런 철학적 성찰이 연민의 동기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며,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사회 정의와 선행에 또 어떻게 연루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연결되는 감정의 이입이라는 이 '복잡한 마음의 경로' 를 힘들게 왕복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합리적 공리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1. 시적 정의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나라에서 시인은 한결 같은 인간이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열쇠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이다

그는 논쟁자가 아니다, 그는 심판이다

그는 재판관이 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그는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보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다

                                                                             -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중 -

 

플라톤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휘트먼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이 꼭 필요하다고 노래한다. 휘트먼이 보기에 시적 정의를 갖춘 시인은 그 누구보다 정의를 심판하기에 적격인 자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 이자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 . 그는 '(일반적인) 재판관이 판단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하는 자' 다. 그러나 햇빛과도 같은 시인 재판관의 시선은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을 구석구석 살피고 감싸 안는 따스하고 친밀한 시선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엄중한 시선이다.

 

다시 말해 시인 재판관은 어둠에 가려진 무기력한 자들의 상황을 따스하게 비추는 친밀함을 가지는 동시에, 모든 사물이나 특성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을 부여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지혜는 단순히 동일시의 감정 이입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사성을 두루 두루 살필 줄 아는 분별 있는 관찰자적인 인식을 장착해야 하기 떄문이다.

 

적당한 비율을 부여하는 공평한 인식에 근거한 이런 시적 지혜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법적 중립성과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시적 중립성은 규범적인 '일반성'이 아닌 '구체성' 즉 인간적 경험과 역사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고 특정 형태의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어떤 실천적 판단을 고민할 때, 초월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 인간 공동체를 위한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야 독서는 비로소 그저 자유로운 해석의 놀이, 낭만적인 공감과 공상의 놀이와는 다른 것이 되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당장 우리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수는 없겠지만 공감과 용기와 희망을 마음 속에 남겨둔다면(261)' 정의로 나가는 문은 적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 반론자들이 제기한 저 이유들을 대며, 또 숙제할 시간도 없는데를 외치며 '문학적 상상력‘과 '감정 이입' 이라는 영혼의 동요를 기피 하며 살고 있던 나에게 『시적 정의』는 그 영혼의 동요가 불평등과 돌봄, 빈곤, 기후, 전쟁 등의 전 지구적 문제들과 '나'를 복잡하게 뒤섞으며, 지금과는 다른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댓글 4
  • 2023-05-24 19:39

    상상과 성찰!! 감정을 통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5-28 14:59

    요즘들어 문학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는 합니다.

  • 2023-05-29 09:40

    시적 지혜를 기르려면 시를 읽어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법관도 아닌데도 재판관이 재판하듯 매사를 판단해버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재판관이 재판하듯 현실을 일도양단으로 재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세상과 만날 수 있을까요?

  • 2023-06-06 11:49

    얼마 전에 단편 소설집을 몇몇이 같이 읽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연결이 된다,
    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

    스르르르르르륵님, 잘 읽었습니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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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7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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