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읽기/논어4] 지금도 공자님의 '효(孝)'가 유효한가요?

곰곰
2022-07-11 10:19
390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산지 20년이 넘었다. 타지에서 생활하면 자주 뵙기 힘든 부모님에 대한 ‘효’는 더욱 간절해진다. 나와 사정이 비슷한 남편은 혼자 계신 시어머니가 걱정되어 나에게도 안부 전화를 드리는지 자주 확인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일도 누가 시켜서 하려면 마음이 달아나는 법. 나는 미루다 미루다 마지못해 한 번씩 전화를 드리곤 한다. 아무래도 이건 ‘효’라고 말하기 좀 그렇다. 얼마 전 친정엄마의 칠순을 기념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왕이면 더 멋진 장소, 더 맛있는 음식, 기준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딜까 고민했고 그에 따라 여행 일정은 빡빡해졌다. 다행히 별다른 다툼 없이 여행을 잘 마쳤고 ‘고마운 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문득 그때 내가 ‘효’라고 믿고 행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효’를 말하다.

 

<논어>를 보면 여러 사람이 공자를 찾아와 효에 대해 묻는다. 당시에도 효를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명쾌하지 않다. 효는 구체적인 행위들로 드러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정한 형식(禮)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 행동이라도 마음이 빠져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효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한번은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합니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위정 6)

 

아마도 맹무백은 건강이 좋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공자는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자기 몸부터 잘 보살피라고 한 것이 아닐까.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효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자유가 효에 대해 묻는다. 공자의 대답은 앞서와 또 다르다.

 

자유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에 효는 부모님께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모두 잘 먹여 키우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이 다르겠느냐?”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 不敬, 何以別乎?” (위정 7)

 

날카로운 지적이다. ‘요즘’이라고 한 걸 보니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효를 형식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부모를 잘 봉양(奉養)하면 된다고, 즉 자식은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개와 말을 예로 든다. 사람은 개와 말에게도 먹이를 가져다 주고 집을 만들어 준다.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를 봉양한다고 해도 개나 말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아마도 공자가 보기에 자유는 부모를 모시는 데에 마음으로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마음으로 봉양해야 함을 강조한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가장 정성스럽되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효’에 대해 생각하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혼란의 원인을 도덕성의 타락으로 진단하였다. 그 혼란을 극복하고 올바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핵심요소로 ‘인(仁)’을 주장한다. <논어>에서 인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나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남을 배려하고 남과 함께 하며 나아가서 남을 위하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인을 실천하는 근본은 효이다. 공자는 늘 가까운 데에서부터 인을 실천한다.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수양하는 ‘극기’에서 시작한 인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경한다면 더 이상의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평천하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부모께 효도하면 백성에게서 효가 일어나고, 윗사람이 웃어른을 제대로 모시면 백성에게서 공경함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홀로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신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 보는 도가 있다.”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대학> 전10장 - 平天下章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평천하를 말하면서 효를 그 시작점으로 삼는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봉양하는 것보다도 범위가 훨씬 넓다. <논어,사람의 길을 열다>(배병삼)에서 저자는 부모가 내리사랑을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이 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을 알아채고 그것을 감사히 여겨 이를 되갚겠다는 동물은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그만큼 효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공자는 이 인간만이 가진 ‘사랑 되돌려주기’(치사랑-上愛無)에 깊이 감동 하였고, 이 되돌려주는 사랑을 확산시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작정했다.
효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운동을 하고 체력을 키우는 것은 땀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효를 실천하는 것은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되돌려주는 사랑’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는 결코 가족 안에서 머물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인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는 것이 공자의 믿음이다.

 

‘효’는 방법론이다.

 

자하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 앞에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일이 있을 때는 젊은이가 힘든 일을 대신하고 술과 음식이 있을 때는 어른이 먼저 드시게 하는 것,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위정 8)

 

공자는 부모를 위해 수고로운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한다. 이것도 효성스러운 태도는 맞지만, 효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얼굴빛(표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아마 자하는 효행을 실천하기는 하는데, 얼굴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빠져 있다면 당연히 행동의 효과도 반감된다. 효를 행함에 있어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이다.
최근에 어르신 케어 AI 로봇이라는 광고를 봤다. 로봇이 노인의 가장 친한 벗이라니 슬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미 고령화 시대는 시작되었고 노인을 책임지고 보살필 필요성은 점차 커지는데, 바쁜 자식은 부모를 챙길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독거노인을 살피는 반려 로봇이 자식의 미안한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난다. 남편 등살에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나도 결국은 이와 비슷한 것 아닌가? 공자의 효에 대입해 보면, 효성스러운 태도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공자의 ‘효’는 현재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공자의 말대로 부모님께, 나아가 시어머니께 진심에서 나온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효’를 행한다면 무척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정작 내 마음은 답답하고 불편해진다. 지금도 그런 효만이 마땅한 것일까? 과거의 사상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럼에도 옛날에 장착된 효의 마음은 그대로 남았고 그 형식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봉양도 제대로 못하는 시대에 어르신 케어 로봇은 효의 형식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일테다.

하지만 효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공자는 효가 구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마음을 중시했다. 마음은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고 행위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주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전통적인 효에 대한 생각만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직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공자는 도리어 역정을 내지 않았을까. 공자가 말한 효의 기본과 ’색난(色亂)’의 의미는 되새기되, 지금도 그것이 유효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얼굴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의미있는 효일지, 정체된 효의 자리에 머물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에 미치지 못함에 힘들어 하는 건 괜찮은지 말이다. 효가 살아 있으려면, 지금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효의 방법, 각자의 처지에 따른 맞춤형 효의 방식을 상상하고 계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여전히 ‘효’는 질문이다.

댓글 3
  • 2022-07-12 16:27

    시부모님께 효도하기  인생과제입니다.

    가부장 문화의 분위기가 여전한 상태에서  마음을 담는 효를 행하기

    아슬아슬 줄타기도 해보고 가끔은 반항도 해보고

    슬기로운 효도생활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는 수밖에

     AI는 좀 ......

    곰곰의 논어읽기 재밌습니다~

  • 2022-07-15 07:32

    효도와 관련  얼굴빛을 가다듬기 어렵다는  색난의 문제를 고민해 보게도 되는... 시간이었어요^^

  • 2022-07-19 18:48

    병원을 전전하는 친정엄마 때문에 막내동생은 오늘도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쁩니다. 동생은 동양고전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효'를 말할 때 절로 막내동생을 떠올릴만큼 엄마에 정성을 다합니다. 엄마의 지독한 고집과 아들만 좋아라하는 고약한 말에 눈물도 찔금거리고 '다시는 엄마 수발 안하겠다'고 선언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엄마의 보족기와 살살 녹는 복숭아를 사야 된다고 난리 블루스를 칩니다. 효의 사상이 바뀌었나요? '효도란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는 동생이 있어 엄마한테 덜 미안합니다....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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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26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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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8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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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8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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