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이 남긴 숙제 (아젠다 17호 / 20211020)

문탁
2021-10-20 13:05
387

 

  *영화 <노회찬 6411>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회찬 6411>이 개봉되었다. 볼까 말까 망설였다. 봐야 하는 이유는 많았다. 한때 몸담았던 진영과 옛 동지들에 대한 의리, 그와의 개인적 인연, 노회찬 재단에서 애쓰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걱정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과 관련된 것. 이것은 어떤 영화일까? 회고? 애도? 질문? 회고라고 하기에는 그를,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다룰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공적 애도와 관련해서도 그의 죽음 직후의 거대한 애도 행렬, 신문과 방송에서의 각종 특집이 이미 있었다. 혹시 이 영화가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라는 손석희의 그 유명한 앵커 브리핑 4분53초를 127분으로 늘려놓은 것이면 어쩌지? 이런 것들과 연결된 것이지만 노회찬 지지자들에 의한 노회찬의 재현이 노무현 지지자들에 의한 노무현의 재현, 혹은 박정희 지지자들에 의한 박정희 재현과 정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라는 영화적 질문도 있었다. 나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나는 그 영화의 수많은 인터뷰이처럼 그와 일정 기간 사적으로, 공적으로 깊이 연루된 관객이다. 회고와 애도 없이 그를 이야기하는 게 애당초 불가능하다. 울지 않고 그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추억과 감성을 소비하지 않는 영화 보기가 가능할까? 그런데 울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간다는 건,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  그러나 그 모든 사려(思慮)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봉 당일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움이 모든 걸 압도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려한 만큼 나쁘진 않았다. 영웅서사나 신파를 배제하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뚜렷했고 그에 따라 영화도 그의 ‘공적인 삶’, 특히 2000년 이후의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의 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이미 알려진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와 내가 2000년 이후 소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에서 내가 모르는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손석희의 그 앵커 브리핑을 엔딩으로 배치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정치인 노회찬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손석희의 회고, 나아가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손석희의 규정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일까? 애도가 아닌 질문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상시 가졌던 단편적인 생각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더 분명해진 어떤 질문들. 설익고 개인적이지만 그래도 시작은 해봐야 하는 질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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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에서 그의 평생 동지였던 윤영상은 “진보정당운동은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노회찬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전히 진보 정치를 바라는 대중들의 열망은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아마도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소위 ‘노심조’의 탈당, 진보신당의 창당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이후 알다시피 진보정당 운동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나와 통합진보당을 만들 때, 그와 다시는 안 보겠다고 생각한 동지들이 무척 많았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민중당 해산 이후 그 진영을 떠났지만 그래도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정말 기쁘고 설레고 벅찬 마음으로 그 창당대회장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분열하던 그 어떤 시점에 나 역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나는 여전히 노회찬을 사랑하는 팬이었지만 진보 정치에 대해 미련은 점점 사라졌다. 나와 함께 문탁네트워크의 다른 많은 친구도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만약 영화가 그의 공적 삶, 정치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는 6411번 버스를 타고 있는 노회찬뿐만 아니라 정파 투쟁을 하는 노회찬도 다루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진보신당 분열에 대한 동지들의 비판을 노회찬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정파 출신이면서 정파를 뛰어넘는 정치를 꿈꾸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 아닐까? 선한 정치인이며 동시에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인이라는 감독의 규정은, 긴장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가 받았다는 4,000만 원은, 도덕적 이슈가 아니라 이념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진보 정치의 이슈가 아닐까? 하여, 1987년 ‘인민노련’이 선언했던 대중적인 진보정당, 대의제 진보정치는, 2021년 현재도 여전히 유의미한 아젠다인가? 이런 질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략된 ‘정치인 노회찬’에 대한 재현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그는 왜 그의 6411 버스 안의 노동자를 애틋해 하는 만큼이나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을까? 사실 이건 나의 꽤 오래 묵은 질문이다. 김지선, 노회찬의 아내 이전에 이미 인천 노동운동의 대모로 유명했던 인물. 강단 있으나 배려심 넘치고 공식 학력이 낮았지만 지성이 빛나던 사람! 나는 수십 년 전 그녀를 만났던 첫 순간에 단박에 그녀를 알아봤고 그 이후 쭉, 그녀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런 그녀가 영화 속에 인상적인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영화 초반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내용은, 이런 식이면 더 이상 당신과 살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하루 24시간이 공적인 삶으로 꽉 차 있어 사생활이 없었던 남자. 너무 고단하여 자기 부인에게는 대화 한번, 미소 한번이 버거웠던 남자의 아내로 사는 인간의 진솔한 심정. 그런데 이후 노회찬은 바뀌었을까? 김지선 선배의 심정은 영화에서 한 번 더 재현된다. 2004년의 <아침마당>. 아나운서가 묻는다. 이제는 유명해진 노회찬.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노회찬은 “처음에도 거절했지만 결혼했듯이 지금도 거절하지만 결국 또 이생에서 결혼할 것”이라며 유려하고 유머러스하게 응수하고 모두의 박장대소로 그 장면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나는 묻게 된다. 김지선과 노회찬조차 어떤 성별분업 속에서 살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젠더 배치를. 김지선이 남편에게 갖는, 공적 의리와 사적 불만 사이의 갈등을 과감히 삭제해버리는 모든 재현물들의 폭력성을. 그리고 이제 영원한 기념비로 남은 노회찬 옆에서 영원히 그의 아내로 박제화될 김지선 선배의 어떤 삶을.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이고 누군가에는 놀라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조롱의 대상이었던 그의 죽음. 영화에서 그의 오랜 동지였던 최봉근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드문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불일치가 생긴 거예요. 그 불일치를… 목숨으로 바꿨죠.” 그러나 아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진보정당에서 칼퇴근을 해야 했고, 칼퇴근을 해야 해서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로 일할 수밖에 없었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오욕과 오해를 밥 먹듯이 먹으면서 살아왔던 나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 남성적이고 운동권적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늘 지리멸렬하고 치욕은 삶의 불가피한 조건이고 생은 명분과 이념을 초과한다. 하여, 나는 ‘그의 죽음을 존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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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길게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은 어둑어둑해졌고 나는 남겨진 울음을 목 안에서 삼키고 있었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우리는 아마 슬픔을 넘어 각자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가 주문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내 방식대로 걸어갈 것이다. 질문을 품고 그것을 숙성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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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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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8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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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24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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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23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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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22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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