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감성기르기 프로젝트 #19 <식혜>

토토로
2024-02-2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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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은이 식혜

 

어느새 3월, 그러나 나의 일지는 시간을 거슬러 한 달 전, '해피 뉴 이어가게'. 설날 즈음에 열리는 장날이라고 새은이가 식혜를 만들어 왔다. 어머! 나이 어린 새은이가 식혜를 담그다니! 그 날 나는 몇 병 되지 않는 식혜를 한 통 겟하는 행운을 누렸다. 행운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나는 식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명절 때마다 마실 수 있는 음료. 푹 퍼진 밥풀떼기와 함께 먹는 단물. 내게 식혜는 그런 것 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굳이 돈 주고 사먹지 않았을 음료였던 식혜를 줄 서서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조금은 쓸쓸한 기분에 빠졌다.

 

할머니 식혜

 

명절이면 엄마는 꼭 식혜를 만드셨다. 나야 거의 입에 대지 않아서 명절에 식혜가 없어도 상관없지만, 손주 녀석들이 워낙  ‘할머니 식혜’를 좋아해서 나는 엄마를 말릴 수 없었다. 특히 우리집 둘째, 할머니에게 가장 다정한 손주였던 이 녀석(준서)은 유난히도 할머니 식혜를 좋아했다. 할머니 식혜는 깊은 맛이 난다고, 사먹는 것에서는 이런 맛을 느낄 수 없다고, 눈꼴 시릴 정도로 칭찬을 해댔다. 할머니한테 식혜 담그는 법 좀 배워보라고 내게 잔소리까지 하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식혜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특별한 맛을 내는 비법은커녕 식혜 담그는 법도 전혀 배우지 않았고, 엄마는 늘 그렇듯 명절이면 혼자 식혜를 담가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난 추석으로 엄마의 식혜는 끝이 났다.

 

엄마의 마지막 식혜

 

추석이 지나고 얼마 뒤, 엄마는 오빠차에 실려 우리집으로 옮겨왔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끔찍한 통증, 원인도 모르고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는 불길한 통증 때문이었다. 엄마가 오시는 동안 나는 서둘러 장을 봐서 전복죽을 끓여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 죽을 드시지 못했다. 너무 아파서 못 먹겠다고 했다. 죽도 못 먹을 정도로 아팠으면서 그 와중에 엄마는 뜻밖에도 식혜가 든  2리터짜리 삼다수 병을 들고 오셨다. 추석 때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식혜 한 병. 그걸 할머니 식혜라면 껌뻑 죽는 손주에게 갖다 주겠다고 말이다. 식혜를 챙겨온 엄마를 보며 나는 상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닌 것 같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어이가 없는 판단이었는지.... 결국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 텐데 엄마는 무슨 정신으로 식혜를 챙겼던 걸까...엄마도 참!

 

엄마의 마지막 식혜는 준서에게 잘 전달되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식혜를 선물로 받은 준서는 많이 울었다.  후에 식혜는 쉐어 하우스 친구들과 나눠 마셨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 식혜를 선물로 받는 준서가 부러웠고, 그걸 한 잔 얻어 마시지 못 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새은의 식혜를 마시며

 

새은의 식혜를 산 건 더는 할머니 식혜를 먹지 못하는 준서를 위해, 엄마 없는 명절을 보내게 된 나를 위해서 였다. 나는 준서와 마주앉아 새은의 식혜를 나눠 마셨다. 명절이라 더 보고 싶어진 우리 엄마, 마지막 식혜를 선물로 주고 간 우리 할머니, 그리고 젊은 새은의 현대적 식혜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나는 새은의 식혜에  밥풀이 거의 없어서 좋다고 했고, 준서는 할머니 식혜 같은 맛은 아니라면서도 새은의 식혜를 두 잔이나 마셨다. 그렇게 설날이 지나갔다.

 

새은의 식혜, 나름 곱게 마셨다.

 

얼마전 문탁샘의 <나이듦 강좌>에 대한 도라지샘의 후기를 읽다가 식혜가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분명 나는 엄마가 큰 밥통에 며칠 동안 엿기름을 삭히던 걸 어릴 적에  여러 번 보았음에도 그동안 식혜를 발효식품이라고 생각하질 못했다. 

준서가 그렇게 깊은 맛이 난다고 감탄한 게, 바로 '발효의 맛'이라서 그런 것이었다는 걸, 엄마가 없는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나두 참!

 

 

-신파를 싫어하는데..일지가 왠지 신파 느낌이 든다.

-갑자기 나타나 식혜값을 대신 내준 라겸샘, 고마워요.

댓글 9
  • 2024-03-01 00:50

    ㅋㅋㅋ 마지막에 현타 왔나요?
    근데 신파 아닌 거 같아요. 신파 쓰실려면 좀더 노력하셔야... ㅋ

    저도 새은의 식혜를 맛보며 엄마의 식혜를 떠올렸는데, 샘도 그러셨군요. 식혜의 추억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어머님의 올갱이국이 샘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듯, 식혜도 (곧) 다시 태어날 것 같은 이 느낌은 뭔지..ㅎㅎ

  • 2024-03-01 02:05

    식혜가 발효식품인걸 몰랐다고라? 토토로 생태감성일지 한참 더 가야겠네요 ㅋㅋㅋ
    신파로 안가려면 분해의 철학이 나왔어야지...향기로운 분해 어쩌고... ㅋ
    차암, 식혜 하나에도 이리 마음이 요동쳐요, 우리들이~

  • 2024-03-01 08:08

    어쩌면 신파, 아직 필요할지도😊
    오마니 애도... 아마 더 필요할거에요.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셔서ㅜ)

    글구 자누리구박에 굴하지 마시와요. 호호호

  • 2024-03-01 14:12

    샘, 읽다가 울었어요
    어머니도 준서도 샘도.. 너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고맙게 잘 읽었어요

  • 2024-03-01 14:20

    카페에서 쿨하게 아이스라떼 마시며 생태일지 읽다가
    민망하게 눈물이...책임져요 토토로

    실은 고마워요~ 이런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 2024-03-01 15:01

    찡하게 토토로님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남겨진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편안히 계시길 빌어봅니다.
    애도의 시간, 같이 잘 보내요...

    근데 발효 이야기에선 저도 모르게 빵 터졌어요ㅋ

  • 2024-03-02 08:41

    울컥합니다....
    며칠 전 토토로가 만든 엄마의 올갱이국 먹을 때도 잠깐 코끝이 찡했어요.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식혜를 자주 만들어 주셔서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다려봐요.. 토토로를 위한 식혜를 만들어볼게요.

  • 2024-03-02 12:15

    저한테도 엄마의 수정과가 그랬는데 저 역시 배우지 못했어요ㅠㅠ

    어젯밤 9시넘어 지칠대로 지쳐 집에 도착하자 딸이 배달앱 들이밀며 엄마 좋아하는 한식도 있어 골라봐 하더라구요.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때 토토로샘이 싸주신 올갱이국 한그릇 남은 게 생각나 얼마나 맛있게 먹었나 몰라요.
    엄마들의 손맛에는 지친 영혼을 울리는 마법이 있나봐요. 따뜻한 글과 함께 행복한 슬픔을 느껴봅니다. 고맙습니다.

  • 2024-03-03 15:35

    토토로쌤~ 나한테 와요~
    에구...요요쌤이 언제 식혜를 만드시겠어요...ㅋ

    난 반나절이면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이정도는 신파에 못 낍니다요. 좀 더 노력하시길!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