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감성기르기 프로젝트 #17 <식집사>

토토로
2023-12-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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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12월, 어느새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정신없는 와중에 엄마집 짐 정리를 끝내야 한다는 임무가 급하게 떨어졌다. 엄두가 안나서, 엄마의 살림살이를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아서, 주인은 없지만 여전히 정갈하고 안락한 엄마집이 좋아서 미적거리며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엄마가 쓰던 가구, 살림살이를 다 어쩐단 말인가. 무엇보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가꿔온 화초며 나무는......

엄마의 베란다는 사시사철 파릇파릇 한데다가 꽃이 항상 피어있었다. 그 베란다를 보는 사람들마다 잘 가꿨다고,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엄마의 베란다 정원이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가끔 사진을 찍곤 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바지런하고 정이 많은 엄마가 정성껏 돌보고 가꾼 베란다 정경을.

 

2022년 1월 1일 엄마집

 

2023년 4월 8일

 

2.

엄마 집을 비우기 위해 늦은 밤 허둥지둥 청주로 향했다. 얼마 전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서랍 속은 대강 정리를 했기에 그나마 잔일은 많이 덜어낸 셈이다. 아직 너무 멀쩡한 가구와 가전, 엄마가 덮고 자던 이불, 나눠주고 남은 옷, 화분 등등은 버리지 않고 우리집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다행히 용달이사를 맞출 수 있었다. 짐들을 우리집에 다 둘 수 있느냐, 없는냐는 가져온 뒤 정리하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대략 두달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오빠는 매주 엄마집에 들러 화분에 물을 주었다고 했다. 덕분에 식물들은 시들시들하긴 해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아있었다. 몇 개쯤은 죽었을 줄 알았는데....고맙게도 말이다.  게다가 이삿짐 아저씨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식물들을 다 옮겨주었다. 슬픈 와중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었다. 그렇게 가져 온 식물들로 이젠 우리집이 그득하다.

엄마가 남겨 준 식물들을 잘 돌보기 위해, 나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마음을 내야 한다.  지금까지는  의욕과 상황에 따라 화분을 들였다, 죽였다를 반복했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다! 식집사가 되어야 한다!

(여름에 발아시켜 심은 아보카도 나무는 미안하게도 진즉에....말라버렸습니다.ㅜㅜ)

 

*식집사: '식물'과 '집사'의 합성어로 반려 식물을 키우며 기쁨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신조어

 

3.

안그래도 살짝 너저분한 우리집에 엄마 살림(서랍장, 협탁, 그릇장 같은 것들)까지 가져오니  꽉찬 느낌이다.  엄마가 계신다면 분명 제대로 정리도 못 할거면서 왜 가져갔냐고 잔소리 하실 것이 뻔하다. 들리지는 않지만 잔소리를 상상하며, 아니 엄마가 아끼던 것들이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으로 틈나는 대로 짐들을 정리했다. 물론 화분들에게도 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누렇게 된 식물의 잎들은 정리하고, 산발이 되어버린 긴 이파리들은 묶어주고,  드러누운 애들은 세워주고, 지지대도 꽂고,  영양제도 투하!  썰렁하고 시들했던 우리집 베란다가  덕분에 풍성해졌다.

 

2023년 12월 30일. 우리집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쏠려버린 화초. 지지대 덕분에 이제 균형감있게 자라게 되었다. 게다가 노란 꽃까지 피웠다.!!!!

 

매일 돌아가면서 식물들을 쓰다듬고 인사도 건넨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생태감성을 기르겠다고 해놓고 식물이랑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도 못했는데, 엄마가 제대로 큰 미션을 주셨구나 싶다.

 

댓글 12
  • 2023-12-30 15:07

    어머님이 꽃이 되어 오셨군요. ^^

    올 겨울 잘 보살펴서
    내년 봄에 뿌리 몇개 저한테도 나눠주세요. 플리즈~~~

  • 2023-12-30 16:02

    와...식집사 모임 한번 할까요?

    글구...노란꽃이라니..ㅋㅋㅋ..진짜 이름 몰라유?

    • 2023-12-30 20:10

      검색해보고 노란꽃을 피운 식물이 바로 카랑코에 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됐습니닷.
      첫번째 사진 속 강렬한 빨간꽃은 제라늄!
      제가 서양 식물이름에 많이 약합니다.^^::::
      이름부터 익혀야 겠어요.

      이름은 몰라줬지만 균형은 잘 잡아준거 같아요.ㅎㅎ

      20231230_200141.jpg

      • 2023-12-31 08:17

        저도 비슷해유. ㅋㅋㅋ

  • 2023-12-30 17:47

    토토로님의 생태감성 성장판이 더 많이 열리겠네요.ㅎㅎ

  • 2023-12-31 01:32

    뭐라고 달아야하나..
    뭐라도 달고 싶은데..
    그저 잘 자라기를…

  • 2024-01-01 11:08

    와... 생태감성 열심히 키우시더니 식집사가 된 것은... 마치 우연이듯 필연인듯?!?! 어머님이 많은 걸 연결해주신 것 같아요. ^^ 저희집은 정글컨셉인데 이곳은 전혀 다른 매력이 뿜뿜이군요. 이미 풍성하지만 더욱 번창하시길 바래요 ㅎㅎ

  • 2024-01-02 16:35

    널찍한 베란다 풍성한 식물들 의욕뿜뿜 집사
    삼박자 척척
    작은 베란다숲이 더 풍성해질 것이 이미 예정되었네요
    어머니의 숲이 딸에게로이어지는….
    뭉클합니다

  • 2024-01-03 15:40

    어머니 베란다였구나!!

  • 2024-01-10 05:24

    우와 저게 다 몇개~~? 어마하군요! 어머니의 숲이 토토로의 숲으로 이어지는군요~ 감동이에요!

  • 2024-01-13 08:33

    토토로의 베란다로 이어진 식물들, 삶은 계속 되네요, 뭉클합니다요^^

  • 2024-02-27 19:26

    노란꽃은 카랑코에 종류 같아요. 토토로님 밝은 얼굴 보여주는 식물들에게 사랑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