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은영들, 물소리길을 걷다

기린
2023-03-05 23:23
262

은영들, 물소리길을 걷다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수에 나선 물소리길

 

 대동강 물도 녹으며 봄이 온다는 우수(雨水)다. 물소리길의 강물도 다 녹았을까. 그래서 양평 물소리길을 골랐다. 양평 주변을 흐르는 강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인데 총 여섯 개의 코스로 조성되어 있고, 경의중앙선과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재작년 1월에 걸었을 때는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동행을 찾았다. 인문약방 프로그램 <일욜엔양생>에서 함께 공부했던 조은영님, 나와 이름이 같다.

 

죽전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서 아신역까지 두 시간, 검색은 그랬다. 하지만 실제 경의중앙선은 지나가는 기차를 보낸다고 5분씩 대기하는 역이 몇 개나 되었다. 30분 지각, 일찌감치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은영님을 만났다. 우수라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아신역을 나서니 부슬부슬 가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오전에 잠깐 비오다 오후 맑음이란 일기예보에 우산은 챙겼다. 둘레길에 들어서니 우산을 든 손이 시렸다. 장갑은 안 챙겼다. 방수가 되는 등산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장갑을 낀 은영님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같이 세미나를 했을 때도 누가 뭔가 필요해서 찾는가 하면 어느 새 챙겨 내놓던 은영님이었다. 그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좀 신기했다.

 

 

<은영님도 나도 사진찍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 뒷모습이 나오도록 한 컷 찍었다>

 

 물소리길 3코스는 아신리 마을을 거쳐 옥천면을 통과하면서 남한강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작년에 걸어봤던 길이라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은영님이 같은 계절에 왔던 길을 또 걷는 까닭을 물었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누구라도 같이 보면 좋겠다는 경치들이 있다. 물소리길을 처음 걸을 때도 그랬다. 탁 트인 겨울 강을 걸으며 마음도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도 이 경치를 보여주고 싶었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은영님과 같이 걸을 만한 길을 고르자니 이 길이 떠올랐다. 강을 따라 걸으며 보니 아직 강기슭 쪽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푸르게 투명해져서 드높았다. 바람이 제법 차서 앉아서 간식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3코스의 종점인 양평역에 도착했다. 우수라고 하지만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은영과 은영

 

 양평역 주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찬바람을 맞고 걸었더니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서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들어가서 앉고 나니 좌석이 꽉 찼다. 푸짐한 시레기에 된장국물 베이스인 감자탕이 구수하니 맛있었다. 밥을 먹으며 올해 퇴근길 인문학을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데 신청자가 둘뿐이라 열릴 수나 있을지 걱정을 했다. 일요일아침에서 목요일 저녁으로 시간을 옮기게 되면서 은영님도 부담이 늘었다. 의정부에서 퇴근해서 용인 동천동까지 공부하러 오는 일이 어떻게 쉽겠는가. 그래도 시작한 공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에 흔쾌히 응답해줘서 많이 고마웠다. 같이 걸으며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물소리길 4코스는 양평역에서 원덕역까지 남한강과 흑천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겨울 강을 따라 걷는 길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시야가 트여서 멀리 추읍산까지 시야가 트였다. 버드나무길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니 다른 계절에 오면 푸릇푸릇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에 두 번이나 걸었더니 다른 계절의 풍광이 더 궁금해지긴 했다. 경치가 좋다 좋다를 연발하다보니 서로 좋아하는 것들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둘 다 혼술을 즐기는 습관이나 사우나를 좋아하는 공통점도 발견했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니 우린 제법 통했다. 은영님이 최근에 받은 선물이라면서 가방에서 미니어처 위스키를 꺼냈다.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면서 제법 불량스럽게 키득거렸다. 둘이 걸으면 이런 재미도 있다.

 

<강기슭은 아직 얼음이 남아 았는 강 옆 길을 걸으며 위스키를 홀짝이니 몸이 데워졌다>

 

 

은영님, 고마워요

 

 원덕역에 거의 도착할 즈음 은영님이 전화를 받았다. 큰 아들이 군대 훈련소에 입소해서 처음 하는 전화였다. 은영님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편안히 전화 받으라 눈짓을 하고 나는 길에서 벗어나 주변에 있던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자식들도 점점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때라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은영님의 일상이 느껴졌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에 접속하여 일상을 꾸려가며 사는 은영의 삶과, 두 아들이 각각 독립을 하게 될 시기에 맞춰 은퇴를 준비하는 또 다른 은영의 삶이 이렇게 엮였다. 세상의 또 다른 은영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름이 같아서 왠지 더 궁금한 그녀의 삶 한 자락을 엿보며 함께 걸은 시간이었다.

 

 2월이 다 갔는데 퇴근길 인문학 프로그램은 여전히 신청자가 없었다. 아무래도 폐강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신청한 두 사람에게 장문의 톡을 보냈다. 폐강 결정 시한 하루를 남기고 한 사람이 신청했다. 다음 날 한 사람이 더 신청했다.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다 프로그램이 열리길 기원하자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방방 뛰었다. 개강을 하고 보니 한 분은 은영님이 아는 분이란다. 혹시나 폐강이 될까 주변을 물색해서 같이 퇴근길 인문학을 하자 권했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이렇다. 소박하니 다섯 명이 모여서 올해의 공부길이 열렸다. 뚜벅뚜벅 걸어가 볼 참이다. 은영님^^고마워요!

 

 

댓글 12
  • 2023-03-06 00:05

    저는 물소리길 6-5코스로 걸어봤는데. 용문산 은행나무길은 예뻣지만 논에서 헤매기도 했지요ㅋ. 위스키 (한모금?ㅋ) 홀짝이며 걷는 두 은영 언니의 인연과 마침내 열린 퇴근길 인문학길 소식까지 따뜻하게 전달되어요. 잘 읽었습니다. 무릎 건강 챙기시며 또 다음 길도 걷고 나눠 주세요!

  • 2023-03-06 07:57

    좋군요^^

  • 2023-03-06 08:46

    은영들 부럽네~~

  • 2023-03-06 08:55

    둘이 위스키 꺼내먹는 장면이 상상되면서 잼있네요~ㅋㅋ
    은영들도 정임합목만큼 잘 맞으시는듯해요~~!!
    두분도 퇴근길 인문학도 응원합니다^^

    • 2023-03-06 10:58

      정임합목만큼이요?ㅋㅋ

  • 2023-03-06 08:56

    다른 계절에 물소리길 4코스 도전해봐야징

  • 2023-03-06 09:22

    아우 물소리길이 존재하는것도 처음 알고..두은영님의 길을 같이 잠시 걸었던거 같아요~저도 이길을 찾아 걸어보고 싶어졌어요^^
    부산스런 월요일 아침 ...차분하게 마음정리해지는 글이네요~

  • 2023-03-06 09:57

    은자 돌림 저도 다음엔 끼어주세요.
    위스키 챙겨갈께요^^

  • 2023-03-06 11:01

    ‘은영 시스터즈’샘들의 걷기 풍경. 넘나 따뜻합니다^^
    나중엔 저도 데려가 주셔요~
    위스키, 꼬냑 챙겨놓겠습니다!!
    그나저나 ‘화요’는 들어올 생각을 안하네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ㅎㅎ)

  • 2023-03-06 12:54

    쌀쌀한 날 위스키를 마시며 몸을 뎁히는 장면을 상상해봤네요!
    걷는 길에 여러 이야기가 쌓이고 있네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집니다!! ^^

  • 2023-03-07 06:51

    앗. . . 내이야기네 ㅎ ㅎ 기린샘과 동행으로 등장해 좋네요 . 걷는게 목적이 아닌 관계를 위한수단일수 있다는걸 배운 날이었네요

  • 2023-03-08 11:39

    뭔가 잔잔하면서도 극적이에요ㅎㅎ 저도 양평 사는 지인이 언제 물소리길 걷자고 했는데 기린샘 글로 먼저 체험했네요^^ 퇴근길 인문학 개강도 축하드려요!!!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함께 살기, 베이스캠프-되기   2023.5.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는 주로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잠시 제주에 있다.    여기는 제주다. ​ 여기는 제주다.(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5월 들어 자기배려의 기술 글쓴이들로부터 연재 마감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외침이 들려왔다.(그리고 이는 결코 남일이 아니었다.) 글쓴이들의 탓만도 아니다. 솔직히 5월은 그럴만하지 않은가. 각종 법정(과 대체) 공휴일도 많고, '가정의 달'이라는 타이틀은 감사의 마음과 동시에 뭘 하거나 어디를 가야할 것만 같은 부담을 준다. 또 노동절(5월 1일)로 문을 열고 세계 금연의 날(5월 31일)로 문을 닫는 아이러니한 달이기도 하다. 진정 금연을 하려면 일을 그만둬야 하지 않나 하는 잡(JOB)생각이 들게 만든다. 각종 민주화 관련 기억도 행사도 많은 '오월의 사회과학' 달이기도 하다. 이뿐이랴? 여름 초입을 앞두고 늦은 봄 나들이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라는 조급함도 들게 하니 어찌 바쁘지 않겠는가. 어찌 연재 마감을 맞출 수 있겠는가. 정없게 말이다!     수용성과 휘발성의 땅, 제주 ​ 지난 4월 글쓰기의 기쁨(0.01%)과 슬픔(99.99%)을 나누는 시간에 글감과 아이디어의 속성에 대한 간증이 터져나왔다. "샤워할 때만 반짝 생각났다가 곧바로 물에 쓸려 녹아버리니, 분명 아이디어는 수용성이다."(D씨), "샤워가 끝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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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2023.05.31 조회 169
요요의 월간명상
두 개의 돌 정원이 던지는 질문 -료안지의 돌 정원과 고야산 곤고부지의 돌 정원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에 딸과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일본의 고도(古都) 교토와 나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사찰 투어. 그 컨셉에 맞게 무리하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알차게 이곳저곳 탐방을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교토방문이 세 번째였지만 딸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여행 내내 내가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딸이 나를 데리고 다녔다. 구글맵을 켜고 효율적으로 목적지를 찾고, 궁금한 게 있으면 빠르게 검색하는 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길을 잃는다거나 혹은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내린다거나 하는 사태가 벌어지던 시절이 갔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보이는 그 순간에도 언제나 빈틈이 있고, 빈틈 사이로 새로운 것들이 침입해 들어왔다. 여행의 맛은 그 빈틈을 향유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료안지의 돌정원   여행을 떠나기 전 교토에서 3박을 하고, 고야산에서 1박을 하고, 고야산에서 돌아와 오사카에서 2박을 하며 하루는 온종일 나라를 둘러보는 코스를 짰다. 교토에는 보아야 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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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05.22 조회 24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어젯밤의 이야기   어제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면서 초콜렛을 찾으러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에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두 달 전쯤 이사 온 이탈리안이자 독일인이다. 내 윗방에 사는데 내가 늦게 자기 때문에 레오가 얼마나 늦게까지 안 자는지 그의 발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레오는 늦은 밤에 꼭 담배를 한 대씩 피러 나온다. 문을 열어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쇼파 위에서 자고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레오는 그 고양이와 같이 찍은 셀카를 보여주었다.   나와 레오가 같은 물건을 산다면 나는 설명서를 아예 읽지도 않고 무작정 끼워보는 편인 반면에 레오는 침착하게 읽은 뒤 하나씩 맞춰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레오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물리적인 평안도, 마음의 평안도 주는 사람이다. 마주친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나는 레오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레오는 약간 피곤하다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요새 나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떻게 해야 더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니 정말 내가 독일에 머무르고 싶긴 한 건지. 나는 누가 묻지 않으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데, 레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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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3.05.17 조회 238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아찔한 동거     어느 날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봄 일지에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보듬이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울음소리는 한 두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많은 인원들이 호롤ㄹㄹ- 호롤로ㄹㄹ- 하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쉬지 않고 내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쪽에서 무언가 폴짝 뛰는 움직임이 보였다. (헉..!)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무언가가 땅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저기요?) 손을 내밀어 꽁무니를 슬쩍 건드리니까, 폴짝!     새벽이생추어리에 개구리가 나타났다. 경칩이 지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시기였다. 올해 경칩은 3월 6일이고 내가 개구리 소리를 들은 날은 3월 9일이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지 며칠밖에 안 된 날이었다. 개구리는 특히 겨울잠을 깊이 자는 동물이다. 곰의 경우엔 겨울잠 중간에 깨기도 하는데, 개구리는 심장박동과 호흡이 거의 멎는 가사 상태로 겨울을 보낸다고 한다.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자다가 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는 것이다. 요즘은 온난화 때문에 너무 일찍 잠에서 깼다가 갑작스런 추위에 얼어 죽는 개구리가 많다고 한다. 제때 개구리 소리를 듣는 건 점점 귀한 일이 되고 있다.   호롤ㄹㄹ- 호롤로ㄹㄹ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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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2023.05.10 조회 300
기린의 걷다보면
'할미꽃'과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희(喜)   올해로 86세가 되신 어머니는 4남매가 모두 경기권에 자리를 잡은 탓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자 별 수 없이 독거노인의 일상으로 접어들었다. 연세가 들수록 점점 거동이 둔해지는 어머니를 보며 그나마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 있으실 때, 바람이라도 쐬어 드리자는 마음이었다. 올해는 평창에 있는 친구의 집을 숙소로 잡아서, 그 근처에 있는 ‘허브나라 정원’을 관람하며 걷는 일정으로 잡았다.       허브나라 정원은 테마별로 세익스피어 가든, 팔레트 가든 등 여러 가든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선 곳은 세익스피어 가든이었는데 주변으로 튜울립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작년 순천만정원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던 튜울립을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어머니도 작년의 튜울립을 올해는 여기서 본다며 좋아하셨다. 어머니와 나란히 걷던 남동생이 우리가 어릴 때 고향집에도 화단이 있었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머니는 남동생까지 태어나면 네 명이나 되는 자식을 데리고 더 이상 셋방살이를 할 수는 없어서 빚을 내서 집터를 장만해야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빚을 갚느라 형편은 쪼들렸지만, 내 집이라 하고 싶은 대로 꽃도 심고 나무도 키웠다고 하셨다. 우리를 키우느라 손끝에 물이 마를 새가 없던 그 시절에도 틈틈이 그 꽃밭을 가꾼 취향은...
'할미꽃'과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희(喜)   올해로 86세가 되신 어머니는 4남매가 모두 경기권에 자리를 잡은 탓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자 별 수 없이 독거노인의 일상으로 접어들었다. 연세가 들수록 점점 거동이 둔해지는 어머니를 보며 그나마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 있으실 때, 바람이라도 쐬어 드리자는 마음이었다. 올해는 평창에 있는 친구의 집을 숙소로 잡아서, 그 근처에 있는 ‘허브나라 정원’을 관람하며 걷는 일정으로 잡았다.       허브나라 정원은 테마별로 세익스피어 가든, 팔레트 가든 등 여러 가든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선 곳은 세익스피어 가든이었는데 주변으로 튜울립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작년 순천만정원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던 튜울립을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어머니도 작년의 튜울립을 올해는 여기서 본다며 좋아하셨다. 어머니와 나란히 걷던 남동생이 우리가 어릴 때 고향집에도 화단이 있었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머니는 남동생까지 태어나면 네 명이나 되는 자식을 데리고 더 이상 셋방살이를 할 수는 없어서 빚을 내서 집터를 장만해야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빚을 갚느라 형편은 쪼들렸지만, 내 집이라 하고 싶은 대로 꽃도 심고 나무도 키웠다고 하셨다. 우리를 키우느라 손끝에 물이 마를 새가 없던 그 시절에도 틈틈이 그 꽃밭을 가꾼 취향은...
기린 2023.05.06 조회 271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몇 년 전부터 파지사유 2층에 아주 예민한 부부가 살고 있다. 그들은 파지사유에서 나는 작은 소음 즉, 의자 끄는 소리, 가죽 망치 소리에도 힘들어 했다. 그런데 요즘 몇 달 안 내려 와서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분들이 임신을 하셨단다. 누구는 임신을 해서 신경이 무뎌진 거 아닐까 했지만, 난 그분들이 이제 삼가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꺼라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제일 겸손해질 때가 아이를 가지고 키울 때, 그리고 암환자 중간검사 기다릴 때인 것 같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중간검사를 한다. 재발과 전이가 많은 암이라 온갖 검사를 하루 종일 한다. 한 달 전부터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고 반성모드가 된다. 내가 그날 아이스크림을 왜 먹었을까? 운동을 왜 빼먹었을까? 요즘 고기를 넘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샐러드 안 먹은 거, 잡곡 안 먹은 거 등등 모두 반성할 일 뿐이다.     중간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다시 6달,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특별회비를 낸다!) 환우 커뮤니티에 6개월 검진 통과, 1년, 3년, 5년 통과 글들이 올라오면 수십 개의 댓글이 쭈욱 달린다.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누겠다는 뜻이다. 그 분들의 히스토리를 검색하고 나와 비슷한 병력을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나도 잘하면...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몇 년 전부터 파지사유 2층에 아주 예민한 부부가 살고 있다. 그들은 파지사유에서 나는 작은 소음 즉, 의자 끄는 소리, 가죽 망치 소리에도 힘들어 했다. 그런데 요즘 몇 달 안 내려 와서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분들이 임신을 하셨단다. 누구는 임신을 해서 신경이 무뎌진 거 아닐까 했지만, 난 그분들이 이제 삼가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꺼라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제일 겸손해질 때가 아이를 가지고 키울 때, 그리고 암환자 중간검사 기다릴 때인 것 같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중간검사를 한다. 재발과 전이가 많은 암이라 온갖 검사를 하루 종일 한다. 한 달 전부터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고 반성모드가 된다. 내가 그날 아이스크림을 왜 먹었을까? 운동을 왜 빼먹었을까? 요즘 고기를 넘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샐러드 안 먹은 거, 잡곡 안 먹은 거 등등 모두 반성할 일 뿐이다.     중간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다시 6달,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특별회비를 낸다!) 환우 커뮤니티에 6개월 검진 통과, 1년, 3년, 5년 통과 글들이 올라오면 수십 개의 댓글이 쭈욱 달린다.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누겠다는 뜻이다. 그 분들의 히스토리를 검색하고 나와 비슷한 병력을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나도 잘하면...
문탁 2023.05.05 조회 190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인트로      올해는 양생프로젝트에서 ‘돌봄’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회과학분야의 책을 읽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직장을 다니며 어려운 책을 공부하다보니 계절을 즐기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했던 아침 산책은 올해 들어 제대로 한 적이 손에 꼽힌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보면 늦게 잠들게 되고 늦게 일어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계절 감각은 주말에만 즐기게 된다. 그래도 아예 계절감 없이 사는 건 아니다. 새로 이사 온 집의 거실 풍경은 계절감을 충분히 선사해준다.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2층 단독주택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짙은 어둠을 지나 해가 길어지니 출근하기 전에 거실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좁쌀 같던 산수유 꽃은 꽃다발이 되었고 오밀조밀 새하얗게 피었던 살구꽃은 살구로 변신 중이다. 우리 집 정원에서 가장 큰 단풍나무가 신기했는데 힘없이 붉은 잎이 나오더니 파릇한 초록 잎으로 변했다. 산수유나무 위에서 먹이 활동하는 새들의 소리도 좋다. 이 모든 것이 내 눈높이에서 이루어진다. 나무를 올려보거나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해준다. 산수유 꽃이 만개하던 날 안개꽃 다발 속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인트로      올해는 양생프로젝트에서 ‘돌봄’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회과학분야의 책을 읽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직장을 다니며 어려운 책을 공부하다보니 계절을 즐기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했던 아침 산책은 올해 들어 제대로 한 적이 손에 꼽힌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보면 늦게 잠들게 되고 늦게 일어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계절 감각은 주말에만 즐기게 된다. 그래도 아예 계절감 없이 사는 건 아니다. 새로 이사 온 집의 거실 풍경은 계절감을 충분히 선사해준다.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2층 단독주택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짙은 어둠을 지나 해가 길어지니 출근하기 전에 거실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좁쌀 같던 산수유 꽃은 꽃다발이 되었고 오밀조밀 새하얗게 피었던 살구꽃은 살구로 변신 중이다. 우리 집 정원에서 가장 큰 단풍나무가 신기했는데 힘없이 붉은 잎이 나오더니 파릇한 초록 잎으로 변했다. 산수유나무 위에서 먹이 활동하는 새들의 소리도 좋다. 이 모든 것이 내 눈높이에서 이루어진다. 나무를 올려보거나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해준다. 산수유 꽃이 만개하던 날 안개꽃 다발 속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루틴 2023.04.30 조회 268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똥 냄새, 땅 냄새         냄새 공동체   새벽이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고기 냄새’와 ‘새벽이 냄새’가 동시에 감각되어 혼란스러웠다, 고 지난 글에 적었다. 하지만 새벽이를 만날수록 새벽이 냄새는 n가지 냄새로 확산되었다. 식단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또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어떤 냄새라고 딱 구분 짓기 어려운 다양한 냄새를 풍겼다.   새벽이생추어리를 오가며 새벽이 이외의 온갖 이질적인 존재들과 접촉할수록 새벽이 냄새와 새벽이 아닌 냄새는 마구 섞여서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익숙하고 공유된 냄새가 점차 우리 안에 스며들고, 흐르고, 쌓이는 것 같았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비인간 존재들은 서로의 신원을 냄새로 알아볼 수 있을까? 킁킁.. 저기 혹시?)       똥과 부식토학   새벽이생추어리의 냄새들 중에서 새벽이가 갓 배출한 응가 냄새는 꽤 강렬했다.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응가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을 땐 숨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읍-) 근데 맡으면 맡을수록 우리의 관계가 점점 더 끈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맡다 보니 또 익숙해졌다. 사람 똥과 비교하면 구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숨을 참지 않았다. (후-하-, 후-하-)   새벽이는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조금 걷고 뛰다가 일정한 장소에 볼일을 본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에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똥 냄새, 땅 냄새         냄새 공동체   새벽이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고기 냄새’와 ‘새벽이 냄새’가 동시에 감각되어 혼란스러웠다, 고 지난 글에 적었다. 하지만 새벽이를 만날수록 새벽이 냄새는 n가지 냄새로 확산되었다. 식단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또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어떤 냄새라고 딱 구분 짓기 어려운 다양한 냄새를 풍겼다.   새벽이생추어리를 오가며 새벽이 이외의 온갖 이질적인 존재들과 접촉할수록 새벽이 냄새와 새벽이 아닌 냄새는 마구 섞여서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익숙하고 공유된 냄새가 점차 우리 안에 스며들고, 흐르고, 쌓이는 것 같았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비인간 존재들은 서로의 신원을 냄새로 알아볼 수 있을까? 킁킁.. 저기 혹시?)       똥과 부식토학   새벽이생추어리의 냄새들 중에서 새벽이가 갓 배출한 응가 냄새는 꽤 강렬했다.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응가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을 땐 숨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읍-) 근데 맡으면 맡을수록 우리의 관계가 점점 더 끈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맡다 보니 또 익숙해졌다. 사람 똥과 비교하면 구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숨을 참지 않았다. (후-하-, 후-하-)   새벽이는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조금 걷고 뛰다가 일정한 장소에 볼일을 본다....
경덕 2023.04.20 조회 279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1년이 금방 지나갔다. 힘든 일도 금방 잊혀 진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은 내가 작년 이맘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정답! 표적항암과 재활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난 암이 림프절까지 침범하였기에 수술에서 림프절을 40개 넘게 떼어내었다. 림프액은 림프관을 따라 흐르면서 몸의 순환과 균형을 맞추는 일은 한다. 림프액이 잘 흐르지 않아 부종이 올까 늘 조심해야 한다. 일단 왼손으로 5kg 넘는 짐을 들면 안 되고, 압박 스타킹을 왼팔에 끼고 있어야 되고, 림프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림프절이 부어서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되면 다시 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림프절을 보호한다고 왼팔을 안 쓰다 보니, 어느 날 왼쪽 어깨가 굳어 버렸다. 대신 오른쪽 어깨를 많이 쓰다 보니 그 어깨에도 문제가 생겼다. 밤마다 어깨가 아파 울면서 잠을 깼다. 난 재활의학과로 옮겨가 도수치료를 받아야 했다.             도수치료는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30분씩 받는다. 한 번에 10만원씩 지불하다보니 돈이 푹푹 들어갔다. 국가에서 암환자라 주던 중증환자 혜택은 (치료비의 5%) 여기서는 없다. 첫 날 치료를 받으며 난 ‘독립투사’는 절대 못 하겠다 생각했다. 고문기구판 같은 곳에 매달려서 협착된 근육조직을 뜯어내는 것은 너무 아팠다. 신음과 고함을 지르는 고문을 자발적으로 받으러 가야했다. 치료사는 매일 팔운동을 해야 한다며 그 주에 해야...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1년이 금방 지나갔다. 힘든 일도 금방 잊혀 진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은 내가 작년 이맘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정답! 표적항암과 재활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난 암이 림프절까지 침범하였기에 수술에서 림프절을 40개 넘게 떼어내었다. 림프액은 림프관을 따라 흐르면서 몸의 순환과 균형을 맞추는 일은 한다. 림프액이 잘 흐르지 않아 부종이 올까 늘 조심해야 한다. 일단 왼손으로 5kg 넘는 짐을 들면 안 되고, 압박 스타킹을 왼팔에 끼고 있어야 되고, 림프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림프절이 부어서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되면 다시 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림프절을 보호한다고 왼팔을 안 쓰다 보니, 어느 날 왼쪽 어깨가 굳어 버렸다. 대신 오른쪽 어깨를 많이 쓰다 보니 그 어깨에도 문제가 생겼다. 밤마다 어깨가 아파 울면서 잠을 깼다. 난 재활의학과로 옮겨가 도수치료를 받아야 했다.             도수치료는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30분씩 받는다. 한 번에 10만원씩 지불하다보니 돈이 푹푹 들어갔다. 국가에서 암환자라 주던 중증환자 혜택은 (치료비의 5%) 여기서는 없다. 첫 날 치료를 받으며 난 ‘독립투사’는 절대 못 하겠다 생각했다. 고문기구판 같은 곳에 매달려서 협착된 근육조직을 뜯어내는 것은 너무 아팠다. 신음과 고함을 지르는 고문을 자발적으로 받으러 가야했다. 치료사는 매일 팔운동을 해야 한다며 그 주에 해야...
문탁 2023.04.19 조회 83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간호병동 입원 기간은 예상했던 일주일이 넘어 12일 동안이었다. 간호병동은 간호사가 상주하며 환자들을 돌봐주는 시스템인데 가격은 5인실 입원비에 2만원만 추가하면 된다. 나는 그곳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계속 잠만 잤다! 걱정 없이 푹 잤기에 회복도 빨랐다. 무통주사 한번 누르지 않는 나를 보고 간호사는 고통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인가? 무뎌서 암세포가 그리 커지도록 못 알아챈 거 아닐까? 보호자 없는 병실에서 그 긴 날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잠시 휴가를 얻었다. ‘골룸’처럼 돌아다니는 환자가 집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아이들이 집을 엄청 깨끗하게 치웠다고 카톡으로 알려왔다. 그동안 책장 가득히 쌓여 있던 내 책들도 다 버렸다. (나쁜 놈들!) 밤마다 맥주파티를 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수술이 잘 된 것을 축하하며, 집이 깨끗해진 것도 축하하며! 주치의가 도전정신을 갖고 수술한 덕분에 수술은 잘 되었고, 네 개씩 맞던 항암제 ‘약빨’이 잘 들었기에 ‘완전관해’도 되었다. 완전관해란 암 세포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으로 나와 같은 종류의 유방암에선 30~40%의 환자들에게 해당된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하는 동안 커다란 고민 중 하나는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 이다. 부모님의 연세가 80이 넘으셨기에,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일 밤 울고 계실 엄마를 상상하는 것조차...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간호병동 입원 기간은 예상했던 일주일이 넘어 12일 동안이었다. 간호병동은 간호사가 상주하며 환자들을 돌봐주는 시스템인데 가격은 5인실 입원비에 2만원만 추가하면 된다. 나는 그곳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계속 잠만 잤다! 걱정 없이 푹 잤기에 회복도 빨랐다. 무통주사 한번 누르지 않는 나를 보고 간호사는 고통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인가? 무뎌서 암세포가 그리 커지도록 못 알아챈 거 아닐까? 보호자 없는 병실에서 그 긴 날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잠시 휴가를 얻었다. ‘골룸’처럼 돌아다니는 환자가 집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아이들이 집을 엄청 깨끗하게 치웠다고 카톡으로 알려왔다. 그동안 책장 가득히 쌓여 있던 내 책들도 다 버렸다. (나쁜 놈들!) 밤마다 맥주파티를 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수술이 잘 된 것을 축하하며, 집이 깨끗해진 것도 축하하며! 주치의가 도전정신을 갖고 수술한 덕분에 수술은 잘 되었고, 네 개씩 맞던 항암제 ‘약빨’이 잘 들었기에 ‘완전관해’도 되었다. 완전관해란 암 세포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으로 나와 같은 종류의 유방암에선 30~40%의 환자들에게 해당된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하는 동안 커다란 고민 중 하나는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 이다. 부모님의 연세가 80이 넘으셨기에,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일 밤 울고 계실 엄마를 상상하는 것조차...
문탁 2023.04.19 조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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