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경계의 포용성

현민
2023-02-1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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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경계의 포용성

 

 

독일의 이모들

 

쿠키이모는 독일에 산다. 작년 나는 잠시 서점을 쉬고 여름을 쿠키이모 집에서 보냈다. 떠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머물러도 되는 곳에 갔던 것 같다. 이모와 첫 식사를 마친 후, 이모는 나에게 흡연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맞담배를 피며 여름을 한 집에서 보냈다. 이모와 나는 술과 담배, 한국 음식과 강아지를 좋아했다. 그 여름 동안 나는 어떤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적당함을 알아가는 기분. 과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느낌.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이모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오래 산 한국인 이모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내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국제결혼은 너무 힘들다고 하더니 곧 이어서 너도 독일인이랑 결혼하라는 말들을 했다. 그때는 음 그래서 결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어린데 결혼 얘기를 하시네... 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모들은 모두 내 나이 때 결혼했고, 국제결혼이 그들 모두에게 삶의 큰 사건이었을 것 같다.

 

이모들은 한국어로 말했지만 표준 한국어와는 발음이 달랐다. 독일어 단어들도 자주 섞여 있었다. 한국어를 아예 잊어 독일어만 쓰는 이모도 있었다. 그건 한국어라기엔 독일어 같았고, 절대 독일어는 아니었다. 그건 다른 종류의 언어였다. 그들은 고된 노동을 자처해 추석이나 설에 잔치를 열었고, 실력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풍물패를 했다. 그리고 모두가 독일인 남편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한국어를 하지 못하지만, 이모들은 능숙하게 독일어를 구사했다.

 

이모들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태원 사고가 있었을 때 이모들이 말해주었던 옛날 이태원의 모습. 80년대에 인천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가 생겼다는 이야기. 그들이 대부분 기억하는 한국은 2,30년 전의 모습이었다. 내가 자라온 한국과 그들이 살았던 한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모들은 독일의 일상적 생활문화, 지역감정, 사투리, 마트별 특징과 이번 주의 할인품목에 더 빠싹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독일인일테고, 독일에서는 언제까지나 한국인일 것이다. 그들을 보며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내게도 저런 크기의 간극이 생기기라 예상했다. 이모들은 왜 이곳에 남아있을까? 평생 외국인 신분과 얼굴을 가지고 이곳에 산다는 건 어떤 걸까? 그건 돈이나 자식, 혹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모들을 만날 때마다 종종 그들이 이 삶을 위해 낸 용기를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여름이 지나 나는 독일에 살기로 마음먹었고, 한국에서 서점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임시 집들을 전전하며 외로움에 까무러쳐 가는 중, 한인회장 이모가 김장 페스티벌에 나를 초대했다. 오면 김치 주겠다는 말 보다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갔던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허둥대다 눈칫밥 제대로 먹고 괜히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확실히 이상한 경험이었다. 11월의 독일 외딴 동네 커다란 집 마당에서 스무 명의 시어머니를 둔 기분으로 김장을 하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여자들은 일을 잘한다. 독일이라고 딱히 성평등적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따라온 아저씨들은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사교를 했고, 이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김치국물에 고무장갑을 낀 손을 푹푹 넣으며 일을 했다. 그들은 400포기의 배추를 절였고, 20가지의 재료를 넣어 속을 만들었다. 또 기가 막힌 기억력으로 김치통을 구분하며 불가피하게 오지 못한 언니 동생들의 몫까지 챙겼고, 그 마당을 깨끗이 다 치워냈을 뿐만 아니라 김장 페스티벌에 온 사람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냈다.

 

 

김장이 끝난 뒤 이모들과 작은 쇼파에 엉덩이를 구겨 앉고 한국이야기를 했다. 한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애국심 같은 게 생겨.

 그런 게 나에게도 생길까? 혹은 이미 내 마음 어디에 내재해 있을까? 한국에서 산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이곳에 살고 있는 이모들이 왜 아직도 장구를 뚜드리고 싶어 하는지, 김치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가 궁금했다. 왜 이들 집에는 이렇게 태극기가 걸려있는지, 왜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환대받는지 같은 것까지도.

 

한국에서는 내가 한국인인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 곳에 있던 모두가 한국인이었으니까. 그건 너무나 당연해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었고, 한국에서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통칭되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이 미국으로 피난 간 우크라이나인, 그리스 혼혈 독일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의 미디어에서도 외국인 이미지를 소비할 때 그들을 과대평가하고,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들이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 입으로 한국이 좋은 곳이라는 걸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이곳에서는 외국인이라는 말을 쓴 기억이 적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혼종이니까. 순혈이 무엇인지, 누가 진짜가 아닌지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나는 외국인보다도, 한국인인 것이다.

 

 

혼란 혹은 편안함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게 너무 지독해서 한국이 싫었다. 나는 마음이 자주 좁아졌었고, 누군가가 미웠고, 일을 많이 했다. 이 곳에 오면서 한국과 거리를 둘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내게 한국이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그들에게 답을 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그들 앞에 앉아 한국에 대해 설명하는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천동에서 서점을 했던 20대 여성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그저 한명의 한국인이었다. 그건 내가 한국에 대해 지겨워하고, 이해할 수 없고, 미운 마음이 드는 감정과 거리를 두고 한국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한국의 어떤 공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했다.

 

웨얼알유프롬이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니하오 하는 사람, 한국이 내내 사계절 더운 나라인 줄 아는 사람, 북에서 왔냐 남에서 왔냐고 묻는 사람, 김정은 미쳤다는 얘기만 하는 사람.

 이런 일들이 몇번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웨얼알유프롬을 들으면 그냥 짜증이 난다. 그래서 한때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서로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대화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말 내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곧 나를 설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에서 자랐는지, 그러면서 무엇이 싫고 무엇이 아름다웠는지 그것을 주고받고 들어주는 일은 마음에 오래도록 유효히 남는다.

 

정체성이라는 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나를 설명하는 큰 것인지. 이 나라에 와서 내가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 여자애라는 걸 생각할 때마다 자주 외로웠다. 이 생각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보였다. 내가 조그만 아시아 나라 여자애고 쟤가 유럽에서 태어났고 사는 백인 남성이라는 것은 대체로 언제까지나 사실이고 그게 다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이성애주의 가부장제 현대사회에서 어떤 정체성은 권력적이니까, 내가 이 땅에서 느끼는 이 이질감을 쟤도 느껴봤을까? 하는 것이다. 편견을 가지는 게 때론 나를 보호한다고도 생각했는데, 반면에 그것들이 나를 자주 외롭게 만들었다.

 

 

T와 갔던 독일 근대 여성주의 작가 전시

내 서류에 기입된 것.

배우, 공장직원, 사진작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유일한 직업은 배우는 것이라고 써져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살지 않아서 불평등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그러다가 내가 이 다양함 속에서 얼마나 편안한지를 생각해보았다. 딱 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설명되지 않고, 내가 그 하나로 고유하고, 너도 고유하고,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고 나눠야 하는 혼란 혹은 편안함 속에 나는 있다.

너의 나라에 대해 듣다가 여행하고 싶은 곳의 목록을 늘리고, 안녕 인사를 배우고, 그 나라 욕을 배우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농담을 만든다. 터키어로 Hello는 매러바Merhaba, 그리스의 Hello는 Yasu, 한국은 Annyeong. 남미에서는 미국과 브라질을 제외하고 스페인어를 쓰는데 같은 언어권이라도 코스타리카에서는 셔츠가 까미사camisa고 멕시코에서는 챠마라chamarra라고 한다. 어제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조나단과 포르투갈 노래를 불렀고, 오늘의 나는 자이니즘Janisim을 믿는 인도인 쿠씨 옆방에서 이 글을 쓴다.

 

 

 

새로 들어간 셰어하우스 부엌,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면서 둘러앉아 논다.

댓글 7
  • 2023-02-16 09:34

    집은 구했나 보네~

  • 2023-02-16 11:02

    연대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공통점들을 찾게 하는 것일 텐데 독일 이모들에게는 한국적인 게 아니었을까? (왠지 애국심은 착각 같음… ㅋ) 또 어떤 차이점은 관계를 신선하게 해주니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경계는 넘을 수 있는 핑계이고 새로 만들 수 있는 효용같기도 하네요. 셰어하우스 부엌 풍경이 아늑하네요!!!

  • 2023-02-17 14:37

    독일에서도 김장하는 마음, 그 마음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현민이 이런 경험들로 견문도 넓어지겠고요~~`

  • 2023-02-18 08:30

    너무 재밌어여!

  • 2023-02-19 14:20

    정체성... 그러네. 아무 것도 아니라기에는 너무 결정적으로 생각되는, 그런데 그 정체성이라는게 도대체 딱 설명될 수가 없는건데 말이죠..
    외로움을 느끼는 현민에게 따뜻해보이는 세어하우스가 좋아보이네...

  • 2023-02-20 23:18

    경계, 혼종, 혼란 속에서 편안함 느끼기.. 왠지 너무 공감!

  • 2023-02-21 09:10

    어디서 살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세어하우스에서 살고 있군요.ㅎ
    현민의 글을 읽으며 경계의 풍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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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 조회 148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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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2024.04.20 | 조회 273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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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 조회 203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고기리 집은 2층집이다. 설계 컨셉을 ‘따로 또 같이’로 잡았다. 건물 전체 덩어리를 5개 정도로 나누어, 함께 쓰는 공간과 독립적으로 쓰는 공간이 분리되게 설계하였다. 당시 공항동에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1층을 독립공간처럼 방과 화장실 그리고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2층의 아이들 방도 침실과 공부방 그리고 거실을 두었다. 우리 부부도 침실과 전실 공간을 두었다. 음식을 나누는 식당과 부엌은 1층 가장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두었다.           장모님이 치매로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 졌다. 우리 집에 오셔서 4년을 함께 지냈다. 미리 준비한 아래층, 부모님 공간에 계셨으니 지내시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3년 전에 아들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했다. 녀석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던 2층, 방 2개와 거실공간에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고 녀석이 자람에 따라 ‘아이의 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일상에서 아이가 1순위이니, 공간도 녀석의 성장에 맞추어 늘려 주었지만 항상 북적거렸다. 젊은 부부들의 살림살이를 우리들 공간으로 재배치하여 공간을 확보하여도 아이의 장남감이 곳곳에서 발에 채이기 일쑤였다. 문득, 이 넓은 공간에도 세 집 살림이 힘들다니, 옛날 우리 5형제는 그 작은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지? 하고 떠올려 본다.           그 전에 어떻게 살았더라?       올해 들어 장모님을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졌다. 파킨슨과 치매가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시간마다 이리 저리...
    고기리 집은 2층집이다. 설계 컨셉을 ‘따로 또 같이’로 잡았다. 건물 전체 덩어리를 5개 정도로 나누어, 함께 쓰는 공간과 독립적으로 쓰는 공간이 분리되게 설계하였다. 당시 공항동에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1층을 독립공간처럼 방과 화장실 그리고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2층의 아이들 방도 침실과 공부방 그리고 거실을 두었다. 우리 부부도 침실과 전실 공간을 두었다. 음식을 나누는 식당과 부엌은 1층 가장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두었다.           장모님이 치매로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 졌다. 우리 집에 오셔서 4년을 함께 지냈다. 미리 준비한 아래층, 부모님 공간에 계셨으니 지내시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3년 전에 아들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했다. 녀석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던 2층, 방 2개와 거실공간에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고 녀석이 자람에 따라 ‘아이의 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일상에서 아이가 1순위이니, 공간도 녀석의 성장에 맞추어 늘려 주었지만 항상 북적거렸다. 젊은 부부들의 살림살이를 우리들 공간으로 재배치하여 공간을 확보하여도 아이의 장남감이 곳곳에서 발에 채이기 일쑤였다. 문득, 이 넓은 공간에도 세 집 살림이 힘들다니, 옛날 우리 5형제는 그 작은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지? 하고 떠올려 본다.           그 전에 어떻게 살았더라?       올해 들어 장모님을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졌다. 파킨슨과 치매가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시간마다 이리 저리...
가마솥
2024.04.15 | 조회 183
일상명상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요요
2024.04.14 | 조회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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