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유학점검기

현민
2024-02-16 09:11
282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 하지만 낯선 타지.

한국에 돌아가 비자 받기를 기다리면서 4년간 일하던 서점을 정리했다. 떠난다고 동네방네 광고를 하고 같은 해의 초겨울, 독일에 다시 똑 떨어졌다. 한국보다 시원하고 오후 10시까지 해가 짱짱한 여름만 알았던 나는 물론 독일의 겨울 해가 그렇게 빨리 지는지 몰랐다. 독일 겨울 날씨에 대한 충격과 함께 집도 없었던 나는 척박한 겨울 3개월간 홈리스 생활을 했다. 사이비 교회에서 3주, 그 후로는 텅 빈 아파트에서 2달간 지냈다. 꽤나 유명한 사이비였는데 편견이 너무 없었던 건지 교회 안에 즐비한 힌트에도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두 달 간 지냈던 아파트는 곧 독일로 이민 올 한국 가족이 미리 계약해놓은 집이었다. 전에 지내던 교회보다는 나았지만, 가구 하나 없는 곳에서 가끔 혼자 말을 하면 메아리가 울려서 공허함이 크게 느껴졌다. 세탁기가 없어서 손으로 빨래를 하고, 열심히 밥을 차려 먹는 일이 빈 시간들을 견뎌내는 데 중요했다. 외국에서 혼자 사는 게 그닥 나와 맞는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쯤, 사람들과 연결되는 일이 간절해졌다.

 

독일은 어디를 가도 집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한국에서 자취 집 구할 때는 그나마 고를 수라도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집 구하는 앱을 통해 몇백 통 넘는 메세지를 보내야 한두 곳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그러다 지금 사는 셰어하우스에 오게 되었다. 2월에 입주해 11명의 친구이자 가족을 얻고, 그들과 두텁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서 독일에서의 삶이 견딜 만 해졌다.

집을 찾고 나서는 아침에 일어나 어학원을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낮잠을 자거나 산책을 하고, 저녁엔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 하루가 금방 갔다. 혼자일 땐 이 겨울을 보내야 봄이 온다는 게 막막했는데, 겨울은 함께보내야 하는거구나 싶어졌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맨몸으로

 

한국이 지겨웠다. 조그만 동네에도 문제가 너무 많았고, 가족도 나의 삶을 자꾸 어렵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거창한 명분을 위해 거리로 나갔고 어느 날은 숨이라도 쉬어보려고 친구들을 찾아갔다. 무언가 바꿔보려고 애를 쓰다가 두 권의 책도 만들어버렸다. 변화라는 게 금방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소진됐다.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사실 상담을 해야 할 사람은 현민씨가 아니에요. 위로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화가 났다.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꾸만 좁아지고, 슬퍼지고, 예민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사람을 만나도 새롭지 않았다. 어디 사는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이들과 친구인지,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나를 그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소개하는 설명들이 가치가 없어지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삶을 결핍이 아니라 풍족함으로 감각 할 수 있을까? 오랜 질문이었다.

 

독일에서의 3개월 이후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셰어하우스였다. 이사한 직후에는 밉보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친절하게 행동했다. 누군가 청소를 안 해서 다른 플랫메이트들이 화가 나면 대신 청소를 한다던지 말이다. 그러나 살아보니 플랫메이트들의 생활방식은 예의나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은 묻지 않고 서로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었고, 제때 집 청소를 하지 않았고, 가끔은 싸가지 없어 보일 만큼 자기주장을 했다. 그런데 아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짜증은 나지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했고, 그러다 서로의 습관이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나치게 친절했던 이유는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이사 온 뒤 어떤 일에도 굳이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던 나에게 플랫메이트들은 나의 의견을 계속 물으며 이곳은 너의 집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나도 배고프고 요리하기 싫을 때는 하루 종일 친구들에게 빌붙어 먹었고, 가끔은 집을 더럽힌 뒤 치우는 것을 잊어버렸고, 누가 청소를 제때 하지 않을 때는 문제제기를 했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그들이 나를 이해할 거라는 신뢰가 생겼다. 잘못을 했다면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좋은 게 있으면 그들이 생각났고, 나누는 기쁨에 몰두했다. 12명이 모두 너무나 다른데, 함께 지낸 시간 동안 그들이 나와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년 1월 1일 우리 중 몇은 함께, 몇은 따로 새해를 맞았다. 모두들 새해가 되자마자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받는지 너희로부터 배웠다고. 보내고 곱씹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느낀만큼 표현하고 받은 걸 느끼면 되었다. 그걸 이들로부터 배웠다.

 

집 계단에 걸려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T의 그림

 

최근엔 첫 면접을 봤다. 나는 출판사에서 원고부터 책 홍보까지 전반적인 일을 경험하는 직종 Medienkauffrau Medien und Print(영어나 한국어로는 정확히 어떤 직업인지는 모르겠다)에 지원하고 있다. 독일어로 하는 첫 면접에 지나치게 긴장한 데다가 도움을 청하는 일도 어색해하는 나를 친구들이 잡아 앉혔다. 헝가리인이지만 독일에서 자란 티는 나와 면접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말을 하다가 막히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주었고, 말이 막힐 때는 물을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뼛속까지 독일인이자 네덜란드 컨설팅 회사에서 일을 하는 니키는 전날 함께 침대에 앉아 나와 책의 역사를 다시 재점검하면서 내게 어떤 경험과 강점이 있는지 되짚어주었다. 긴장감에 질린 나는 내가 너무 부족한 것만 같은데 자신감 넘치는 척하는 거 너무 싫다고 징징댔다. 니키는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척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네가 이미 해낸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고.

그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나의 서점와 내가 만든 책들이 더 좋아졌다. 혼자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도 내가 없었다면 하기 힘들었을 일이다. 정상규범에 맞게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해받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하면서 시도하기를 두려워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처음 학교를 다녀온 아이처럼 경험담을 떠들었다. 그들은 내가 독일에서의 첫 인터뷰를 마쳤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우리가 함께 살지 않았던 시간이 무수한데도 그들이 오늘의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창문에 해가 들면 보이는 필름

 

지난 한 해의 기억이 선명하다. 일년 동안 새롭고 기묘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종종 겪었다. 요새는 숨쉬기가 편하다. 가끔 살아서 좋다고 말하고 놀란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갈 수 있고, 먼 곳에 갔다 돌아오면 집 앞 대로에서부터 익숙함에 마음이 놓인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껄끄럽지 않아졌고, 어느 날은 잠깐 내가 동양인 여자애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배낭 메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보다 한 곳에 머무르면서 나의 공간의 이름을 부여하고 섬세하게 가꾸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졌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익숙함을 탐험하면서 작년과는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최근에 했던 모험

댓글 5
  • 2024-02-16 20:35

    저의 첫 해외여행지가 독일이었어요.
    독일에 도착했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 딱 5년만.. 이런 생각을 했는데 ㅋㅋㅋㅋ
    익숙했던 곳을 뒤로 하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저의 오랜 꿈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저도 언젠간...!!!

  • 2024-02-16 20:36

    현민이에게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 안심이 됩니다.
    아마 현민이가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2024년, 독일에서, 또 한국에서 우정을 쌓고 지지받고 지지하고 연대하며 함께 잘 살아 봅시다!!

  • 2024-02-17 08:22

    글에서 뭔가 변화의 바람이~~ 현민의 바람을 응원합니다 ~

  • 2024-02-17 10:50

    살짝 울컥한 느낌은 뭘까?
    늙은게구나...쩝!

    멋있다, 현민아.
    올해는 꼬박꼬박 글쓰자^^

  • 2024-02-18 07:21

    더 설명이 잘 되는 느낌! 그래서 읽기 좋았음^^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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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 조회 159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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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2024.04.20 | 조회 278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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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4.17 | 조회 203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고기리 집은 2층집이다. 설계 컨셉을 ‘따로 또 같이’로 잡았다. 건물 전체 덩어리를 5개 정도로 나누어, 함께 쓰는 공간과 독립적으로 쓰는 공간이 분리되게 설계하였다. 당시 공항동에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1층을 독립공간처럼 방과 화장실 그리고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2층의 아이들 방도 침실과 공부방 그리고 거실을 두었다. 우리 부부도 침실과 전실 공간을 두었다. 음식을 나누는 식당과 부엌은 1층 가장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두었다.           장모님이 치매로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 졌다. 우리 집에 오셔서 4년을 함께 지냈다. 미리 준비한 아래층, 부모님 공간에 계셨으니 지내시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3년 전에 아들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했다. 녀석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던 2층, 방 2개와 거실공간에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고 녀석이 자람에 따라 ‘아이의 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일상에서 아이가 1순위이니, 공간도 녀석의 성장에 맞추어 늘려 주었지만 항상 북적거렸다. 젊은 부부들의 살림살이를 우리들 공간으로 재배치하여 공간을 확보하여도 아이의 장남감이 곳곳에서 발에 채이기 일쑤였다. 문득, 이 넓은 공간에도 세 집 살림이 힘들다니, 옛날 우리 5형제는 그 작은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지? 하고 떠올려 본다.           그 전에 어떻게 살았더라?       올해 들어 장모님을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졌다. 파킨슨과 치매가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시간마다 이리 저리...
    고기리 집은 2층집이다. 설계 컨셉을 ‘따로 또 같이’로 잡았다. 건물 전체 덩어리를 5개 정도로 나누어, 함께 쓰는 공간과 독립적으로 쓰는 공간이 분리되게 설계하였다. 당시 공항동에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1층을 독립공간처럼 방과 화장실 그리고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2층의 아이들 방도 침실과 공부방 그리고 거실을 두었다. 우리 부부도 침실과 전실 공간을 두었다. 음식을 나누는 식당과 부엌은 1층 가장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두었다.           장모님이 치매로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 졌다. 우리 집에 오셔서 4년을 함께 지냈다. 미리 준비한 아래층, 부모님 공간에 계셨으니 지내시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3년 전에 아들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했다. 녀석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던 2층, 방 2개와 거실공간에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고 녀석이 자람에 따라 ‘아이의 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일상에서 아이가 1순위이니, 공간도 녀석의 성장에 맞추어 늘려 주었지만 항상 북적거렸다. 젊은 부부들의 살림살이를 우리들 공간으로 재배치하여 공간을 확보하여도 아이의 장남감이 곳곳에서 발에 채이기 일쑤였다. 문득, 이 넓은 공간에도 세 집 살림이 힘들다니, 옛날 우리 5형제는 그 작은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지? 하고 떠올려 본다.           그 전에 어떻게 살았더라?       올해 들어 장모님을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졌다. 파킨슨과 치매가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시간마다 이리 저리...
가마솥
2024.04.15 | 조회 185
일상명상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요요
2024.04.14 | 조회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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