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버섯에 빠지다

요요
2023-07-01 01:07
383

 

버섯에 빠지다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장마에 가슴이 두근두근

 

장마가 시작되었다. 덥고 습하여 불쾌지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장마가 싫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격하게 장마시즌을 반기고 있다. 숲에서 버섯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작년 봄 내내 탄천변에서 풀꽃을 탐색하던 내가 여름 장마가 그친 뒤 뒷산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버섯에 눈이 갔다. 그 뒤로 산에 갈 때마다 눈을 땅바닥에 두고 버섯 찾는 재미에 푹 빠지고야 말았다. 버섯 도감을 샀고, 산책을 다녀 오면 도감을 뒤지며 내가 본 버섯과 비슷한 버섯 그림을 찾고 이름을 확인했다. 도감에서 찾지 못하면 인터넷을 뒤졌다. 버섯 이름을 하나 둘 익히니 버섯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양도 재미있는 방귀버섯이며, 닭다리 버섯이며 말불버섯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유레카’를 외쳤다. 십년 넘게 뒷산 산책을 다니면서 그동안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버섯과 갑작스레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자 버섯이 사라졌다. 봄이 오면서부터 은근히 버섯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더워지면서부터 마치 아열대성 기후의 스콜처럼 갑작스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후위기의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계속해서 탄소 기반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기후위기로 인류가 멸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 장마가 아니라 우기가 닥칠 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걱정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날이 더워지고 습해지자 버섯을 만날 기대에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산에 갈 때마다 새로운 버섯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 아침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발걸음도 가볍게 숲으로 향했다. 뒷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버섯을 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것이 붉은색 고깔 모양의 버섯이었다(아마도 앵두낙엽버섯^^). 그것만이 아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참나무 줄기에는 자그마한 하얀 버섯과 회색 버섯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썩어가는 나뭇가지에도 광대버섯 종류들이 노랗게 피어나고 있다.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날로 그 색이 진해지는 것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며칠 계속해서 비가 오고 기온이 높아지자 몇 겹으로 두껍게 깔린 침엽수와 활엽수의 낙엽층을 뚫고 여기저기 낙엽 버섯을 비롯해 다양한 버섯들이 마치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아마도^^ 앵두 낙엽버섯

 

 

알면 알수록 놀라운 생명체, 버섯

 

버섯이 식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버섯은 식물처럼 스스로 영양분을 만드는 광합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섯은 다른 유기체를 분해하여 양분을 얻는다. 또 버섯은 자신의 밖에서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하고 배설하는 동물도 아니다. 버섯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菌類)다. 균류는 가느다란 실과 같은 균사로 이루어져 있다. 균사들은 땅속에서 계속해서 전진하며 이동하고, 균사와 균사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균사 네트워크를 이룬다. 균류가 하는 일은 분해다. 만일 버섯의 몸체인 균사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썩지 않는 쓰레기더미로 채워졌을 것이다. 죽은 나무를 분해하여 흙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다시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바로 균류가 있기 때문이다. 분해가 없다면 생명도 없다. 버섯은 자연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균사체의 생식 기관이다. 식물로 치면 버섯은 꽃이고 열매다. 버섯이 하는 일은 땅속에서 나와 공기 중에 포자를 퍼뜨리는 것이다.

 

숲의 땅 속에는 균사 네트워크가 마치 인터넷 망처럼, 우리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인 뉴런처럼, 도시의 도로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균사 네트워크는 영양을 전달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화학물질을 전달하고, 전기 신호를 주고 받는다. 마치 뉴런이 전기 화학적 신호를 주고 받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균사체가 인간의 지능과는 다르지만 자신들만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균사체가 인간이 만든 어떤 복잡한 미로에서도 아주 효율적으로 빠르게 길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미 실험으로도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을 아예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버섯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균사 네트워크의 현존을 말해준다. 어떤 균류 연구자들은 숲의 땅밑에 깔린 균사네트워크를 월드와이드웹(www)에 비유하여 우드와이드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드와이드웹을 통해 나무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영양분을 교환한다는 것을 증명해 낸 학자도 있다. 버섯의 존재는 우리에게 숲이 단지 나무와 풀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균사 네트워크들과 함께 공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만일 버섯이 없다면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고 맑은 공기를 주고 목재를 내어주고 먹거리를 내어주는 숲도 없다. 버섯은 나무와 곤충과 새와 동물들과 깊게 상호의존하고 있는 연기적 존재이다.

 

아마도^^ 영지버섯(커가는 모습을 관찰 중이었는데 며칠 전에 가보니 없어졌다ㅠㅠ)

 

 

버섯과 함께 명상을

 

나는 숲에서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버섯을 발견할 때 큰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전부는 아니다. 버섯을 발견할 때면 내 발 아래에 균사 네트워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버섯 하나 하나는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버섯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또 버섯은 계속 모습이 달라진다. 버섯은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버섯에게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 버섯을 보면서 버섯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세상 만물이 다 무상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버섯은 인간적 세계에만 가둘 수 없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내가 버섯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시끄러우면 숲으로 간다. 그럴 때는 평소 눈에 잘 띄던 버섯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을 집중하여 버섯을 찾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산란했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어느새 버섯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마음의 전환이 일어나면 나를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실은 내 마음이 빚어낸 그림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명상 방석에 앉아 호흡을 관찰할 때 일어나는 일이 버섯을 찾고 관찰하는 사이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밥먹을 때는 밥 먹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이고 수행이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行住坐臥語默動靜)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든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산책길에 버섯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고, 버섯을 통해 중중무진 서로 연결된 자연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비 내린 뒤의 축축하고 후끈거리는 여름 숲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아마도^^ 냄새무당버섯

댓글 4
  • 2023-07-01 09:20

    깁스땜시 버섯탐방을 함께 못해 아쉬워요. 명상 덕분인가요? 못보던 버섯이 많네요. 버섯 들어가기 전에 버섯탐방에 동행하고 싶네요~~~^^

  • 2023-07-01 11:10

    오늘 아침 수체공에서 본 버섯이 있네요.
    붉은 앵구 낙엽버섯...
    색이 고와 눈에 확 띄이더라구요~
    이름을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 2023-07-01 12:14

    버섯에 빠지셨군요~
    버섯은 연기적 존재다..라는 말이 와닿네요
    무심코 지나던 버섯에 눈이 갈것같네요
    버섯 이야기 감사합니다^^

  • 2023-07-01 14:07

    일상속 영성의 삶을 사시는 요요님
    버섯으로
    변화와 관계성의 연기적 관점들을
    풀어내주셨네요~~잘 읽었습니다.^^

일상명상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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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4.14 | 조회 227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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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2024.03.10 | 조회 327
일상명상
오영
2024.02.11 | 조회 381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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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1.10 | 조회 434
일상명상
  버섯에 빠지다                 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장마에 가슴이 두근두근   장마가 시작되었다. 덥고 습하여 불쾌지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장마가 싫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격하게 장마시즌을 반기고 있다. 숲에서 버섯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작년 봄 내내 탄천변에서 풀꽃을 탐색하던 내가 여름 장마가 그친 뒤 뒷산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버섯에 눈이 갔다. 그 뒤로 산에 갈 때마다 눈을 땅바닥에 두고 버섯 찾는 재미에 푹 빠지고야 말았다. 버섯 도감을 샀고, 산책을 다녀 오면 도감을 뒤지며 내가 본 버섯과 비슷한 버섯 그림을 찾고 이름을 확인했다. 도감에서 찾지 못하면 인터넷을 뒤졌다. 버섯 이름을 하나 둘 익히니 버섯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양도 재미있는 방귀버섯이며, 닭다리 버섯이며 말불버섯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유레카’를 외쳤다. 십년 넘게 뒷산 산책을 다니면서 그동안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버섯과 갑작스레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자 버섯이 사라졌다. 봄이 오면서부터 은근히 버섯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더워지면서부터 마치 아열대성 기후의 스콜처럼 갑작스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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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07.01 | 조회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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