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아젠다 사장칼럼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준석’에 대해. <아젠다>가 뭐 정론지도 아니고 내가 뭐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아젠다>가 시사저널도 아니고 내가 시사평론가도 아니니 기껏해야 50명 좀 넘게 구독하는 <아젠다>의 친구들에게 이준석 현상에 대해 혹은 이준석으로 촉발된 몇 가지 개인적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의 요란한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한편으로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만 봐도 상관없는 TV 연예프로그램이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의미 있는 쟁점도 있다. 얼마 전 읽은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이범, 2021.06.10. 경향신문) 같은 과감한(?) 칼럼, 이에 대해 “조만간 24만자 정도의 글로 이런 무지한 소리들을 비판”하겠다는 박권일의 코멘트 같은 것. 그러나 이 밖에는 대체로 “세대교체의 바람과 변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따위의 식상한 멘트, 혹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거나 “이준석발(發) 정치혁명” 같은 호들갑, 혹은 배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식의 청년동원 이벤트들의 소란스러움뿐이다. 바람 같은 것,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식혜 위에 동동 뜬 밥풀”^^ 같은 것, 이게 작금의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평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준석의 현충원 방명록 글씨를 두고 민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신언서판” 어쩌고, “어색한 문장” 어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 역시 포털에서 그의 글씨체를 본 순간 ‘헉’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 아무개라는, 4.15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당에서조차 ‘수구꼴통’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 내가 정확하게 같은 정서반응을 보이고 똑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헐, 내 안에 민 아무개 있었어?...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준석’에 대해. <아젠다>가 뭐 정론지도 아니고 내가 뭐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아젠다>가 시사저널도 아니고 내가 시사평론가도 아니니 기껏해야 50명 좀 넘게 구독하는 <아젠다>의 친구들에게 이준석 현상에 대해 혹은 이준석으로 촉발된 몇 가지 개인적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의 요란한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한편으로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만 봐도 상관없는 TV 연예프로그램이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의미 있는 쟁점도 있다. 얼마 전 읽은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이범, 2021.06.10. 경향신문) 같은 과감한(?) 칼럼, 이에 대해 “조만간 24만자 정도의 글로 이런 무지한 소리들을 비판”하겠다는 박권일의 코멘트 같은 것. 그러나 이 밖에는 대체로 “세대교체의 바람과 변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따위의 식상한 멘트, 혹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거나 “이준석발(發) 정치혁명” 같은 호들갑, 혹은 배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식의 청년동원 이벤트들의 소란스러움뿐이다. 바람 같은 것,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식혜 위에 동동 뜬 밥풀”^^ 같은 것, 이게 작금의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평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준석의 현충원 방명록 글씨를 두고 민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신언서판” 어쩌고, “어색한 문장” 어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 역시 포털에서 그의 글씨체를 본 순간 ‘헉’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 아무개라는, 4.15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당에서조차 ‘수구꼴통’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 내가 정확하게 같은 정서반응을 보이고 똑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헐, 내 안에 민 아무개 있었어?...
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올 초 파지사유가 문탁네트워크로부터 독립했다. 이곳에는 기존의 작업장 이외에 새로 일리치약국과 에코마켓이 들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공간을 어떻게 리모델링을 할 것이며 파지사유의 새로운 이름은 또 뭐라고 할 것인가? 구성원 사이에 토론, 협의, 다툼, 지지부진이 계속 되었다. 어떤 경우는 생각이 달랐고 또 어떤 경우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인지라 어느덧 공간 분할이 확정되었고 이름도 두 개로 압축되었다. <양생n에코실험실 파지사유> 혹은 <에코n양생실험실 파지사유>! 격론 끝에 후자로 결정되었다. 이유는? 양생이란 말이 너무 낯설다는 것이다. 양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멘트 양생을 먼저 떠올린다나? 믿을 수가 없었다. 주변 청년에게 물어봤다. ‘양생’이라는 단어 아니? 뭐가 떠올라? 돌아오는 대답은, “후학양생이요?” 헐, ‘양생’이 낯선 단어가 맞구나. 조용히 정정해줬다. “음, 후학은 양생(養生)하는 게 아니고 양성(養成)하는 거야” 양생(養生)! 기를 양(養)에 날 생(生)! 직역하면 생명을 기르는 행위. 원출전은 장자(莊子)다. 이야기인즉슨 이런데, 한 백정이 그의 임금을 위해 소를 잡고 있었는데 살 한 점, 뼈 한 조각 건드리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칼질하며 소를 해체하는 모습이 가히 신출귀몰, 천의무봉의 경지였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이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어서 자신이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지만 십구 년이 지난 지금엔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神) 본다고, 그러면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 칼도 자연스럽게...
올 초 파지사유가 문탁네트워크로부터 독립했다. 이곳에는 기존의 작업장 이외에 새로 일리치약국과 에코마켓이 들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공간을 어떻게 리모델링을 할 것이며 파지사유의 새로운 이름은 또 뭐라고 할 것인가? 구성원 사이에 토론, 협의, 다툼, 지지부진이 계속 되었다. 어떤 경우는 생각이 달랐고 또 어떤 경우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인지라 어느덧 공간 분할이 확정되었고 이름도 두 개로 압축되었다. <양생n에코실험실 파지사유> 혹은 <에코n양생실험실 파지사유>! 격론 끝에 후자로 결정되었다. 이유는? 양생이란 말이 너무 낯설다는 것이다. 양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멘트 양생을 먼저 떠올린다나? 믿을 수가 없었다. 주변 청년에게 물어봤다. ‘양생’이라는 단어 아니? 뭐가 떠올라? 돌아오는 대답은, “후학양생이요?” 헐, ‘양생’이 낯선 단어가 맞구나. 조용히 정정해줬다. “음, 후학은 양생(養生)하는 게 아니고 양성(養成)하는 거야” 양생(養生)! 기를 양(養)에 날 생(生)! 직역하면 생명을 기르는 행위. 원출전은 장자(莊子)다. 이야기인즉슨 이런데, 한 백정이 그의 임금을 위해 소를 잡고 있었는데 살 한 점, 뼈 한 조각 건드리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칼질하며 소를 해체하는 모습이 가히 신출귀몰, 천의무봉의 경지였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이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어서 자신이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지만 십구 년이 지난 지금엔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神) 본다고, 그러면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 칼도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