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이십여 년 전쯤 명상 수행에 입문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위기가 닥친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로 인해 마주하게 된 두 가지 사태 모두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 모욕감으로 가득찼다. 자의식 과잉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달마는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었다. 눈이 온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은 겨울, 혜가(慧可, 487년~593년)가 찾아왔다. 혜가는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랐다. 그제서야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달마를 찾아오기 전부터 혜가가 외팔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혜가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로 결연했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팔 하나쯤은 가볍게 여기는 선가(禪家)의 공부 가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자가 된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명상을 배우러 달려갈 때의 내 마음과...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이십여 년 전쯤 명상 수행에 입문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위기가 닥친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로 인해 마주하게 된 두 가지 사태 모두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 모욕감으로 가득찼다. 자의식 과잉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달마는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었다. 눈이 온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은 겨울, 혜가(慧可, 487년~593년)가 찾아왔다. 혜가는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랐다. 그제서야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달마를 찾아오기 전부터 혜가가 외팔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혜가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로 결연했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팔 하나쯤은 가볍게 여기는 선가(禪家)의 공부 가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자가 된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명상을 배우러 달려갈 때의 내 마음과...
요요
2022.09.13 | 조회 571
지난 연재 읽기 다른 20대의 탄생
* 20대 여성 페미니스트 고은은 <열녀전>을 읽고, 여성들의 팝박 받는 삶이 고대부터 이어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2022 청년 책의 해'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이 글은 고대 여성들의 사회적인 역할을 오늘날 시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리즈물입니다.       1. 바리스타 혹은 스파이 듀오      초등학생들과 <열녀전>으로 수업을 하던 첫날, 친구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그림 한 장을 보여줬다. <열녀전>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삽화였다. 산 길에 두 여자가 찻주전자를 들고 한 남자가 잔을 기울인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떤 관계일까?”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 낯선 것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대답한다. “나는 이 두 여자가 바리스타인 것 같아. 새로운 커피가 나와서 지나가는 손님에게 마셔보라고 한 잔 주는 거지.” 친구들이 꺄르륵 웃으며 되묻는다. “바리스타요?” “커피요?” 과거에 바리스타는 없었을 테지만, 음료를 판매하는 누군가는 있었을 테니까.            친구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그림을 지긋이 쳐다보다 한 마디씩 보탠다. 어떤 친구가 두 여자가 건네는 찻주전자에 독이 들어있을 것이라 말한다. 뒤이어 찻잔을 기울이는 남자는 왕자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붙는다. 한 나라의 왕자를 독살하기 위해 스파이 둘이 출동했을 거란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은비(가명)가 이야기를 한번 더 뒤집는다. 은비는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책을 읽다가 부모님을 깨우는, 동화작가가 꿈인 친구다. “여자...
* 20대 여성 페미니스트 고은은 <열녀전>을 읽고, 여성들의 팝박 받는 삶이 고대부터 이어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2022 청년 책의 해'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이 글은 고대 여성들의 사회적인 역할을 오늘날 시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리즈물입니다.       1. 바리스타 혹은 스파이 듀오      초등학생들과 <열녀전>으로 수업을 하던 첫날, 친구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그림 한 장을 보여줬다. <열녀전>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삽화였다. 산 길에 두 여자가 찻주전자를 들고 한 남자가 잔을 기울인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떤 관계일까?”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 낯선 것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대답한다. “나는 이 두 여자가 바리스타인 것 같아. 새로운 커피가 나와서 지나가는 손님에게 마셔보라고 한 잔 주는 거지.” 친구들이 꺄르륵 웃으며 되묻는다. “바리스타요?” “커피요?” 과거에 바리스타는 없었을 테지만, 음료를 판매하는 누군가는 있었을 테니까.            친구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그림을 지긋이 쳐다보다 한 마디씩 보탠다. 어떤 친구가 두 여자가 건네는 찻주전자에 독이 들어있을 것이라 말한다. 뒤이어 찻잔을 기울이는 남자는 왕자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붙는다. 한 나라의 왕자를 독살하기 위해 스파이 둘이 출동했을 거란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은비(가명)가 이야기를 한번 더 뒤집는다. 은비는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책을 읽다가 부모님을 깨우는, 동화작가가 꿈인 친구다. “여자...
고은
2022.09.08 | 조회 476
주역을 공부하면서 때로는 재미로, 때로는 무심하게 주역괘를 뽑을 때가 있다. 문탁의 ‘생태공방’에서는 얼마 전부터 주역괘를 적은 작은 종이를 비누포장 속에 넣어 아예 ‘주역비누’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각자 공부하는 세미나팀이나 활동팀에서 주역비누 속의 괘를 집어든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뽑은 주역괘에 진심이다. 좋은 괘를 뽑으면 하루종일 기분 좋아하고 나쁜 괘를 뽑으면 의기소침하기도 하다. 어쨌든 자신에게 온 괘의 의미를 묻고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하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올해 들어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몇 번 주역괘를 뽑았다. 이때 풍화가인(風化家人)괘는 두 번이나 나에게 찾아들었고, 그렇게 ‘2022년 나의 인생괘’가 되었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풍화가인의 가인(家人)은, 사전을 찾아보면 1)집안의 모든 사람 2)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남에게 낮춰 부를 때 쓰는 ‘집사람’을 가리킨다. 주역의 풍화가인은 첫 번째 설명, 즉 한 집안의 모든 구성원을 가리킨다. 건괘나 곤괘를 비롯한 주역의 많은 괘들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로 삼는 이야기인 것에 비하면 가인괘는 그 스케일이 작다. 동요 중에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라는 가사가 있는데, 풍화가인괘는 이 노래가사처럼 괘 전체가 집의 규모를 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한 집안에 살고 있는 부부, 부모, 자식간의 지지고 볶는 소소한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괘가 풍화가인괘이다. 스케일은 작지만 우리는 한 집안이 세상 속에서 겪는 일이 얼마나 다이내믹하고 복잡한지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실천적 삶의...
주역을 공부하면서 때로는 재미로, 때로는 무심하게 주역괘를 뽑을 때가 있다. 문탁의 ‘생태공방’에서는 얼마 전부터 주역괘를 적은 작은 종이를 비누포장 속에 넣어 아예 ‘주역비누’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각자 공부하는 세미나팀이나 활동팀에서 주역비누 속의 괘를 집어든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뽑은 주역괘에 진심이다. 좋은 괘를 뽑으면 하루종일 기분 좋아하고 나쁜 괘를 뽑으면 의기소침하기도 하다. 어쨌든 자신에게 온 괘의 의미를 묻고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하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올해 들어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몇 번 주역괘를 뽑았다. 이때 풍화가인(風化家人)괘는 두 번이나 나에게 찾아들었고, 그렇게 ‘2022년 나의 인생괘’가 되었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풍화가인의 가인(家人)은, 사전을 찾아보면 1)집안의 모든 사람 2)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남에게 낮춰 부를 때 쓰는 ‘집사람’을 가리킨다. 주역의 풍화가인은 첫 번째 설명, 즉 한 집안의 모든 구성원을 가리킨다. 건괘나 곤괘를 비롯한 주역의 많은 괘들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로 삼는 이야기인 것에 비하면 가인괘는 그 스케일이 작다. 동요 중에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라는 가사가 있는데, 풍화가인괘는 이 노래가사처럼 괘 전체가 집의 규모를 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한 집안에 살고 있는 부부, 부모, 자식간의 지지고 볶는 소소한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괘가 풍화가인괘이다. 스케일은 작지만 우리는 한 집안이 세상 속에서 겪는 일이 얼마나 다이내믹하고 복잡한지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실천적 삶의...
봄날
2022.09.07 | 조회 24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문탁
2022.08.30 | 조회 45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문탁
2022.08.30 | 조회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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