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용의 서경리뷰
덕의 정치, 형벌의 정치   요즘 12·3 내란재판과 관련된 선고가 시작되면서 형량을 두고 시끌시끌하다. 구형량보다 적게 나오면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고, 많이 나오면 당연하다고 한다. 내란에 대한 국민감정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형량으로만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맞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법으로 정해놓은 형량대로 옥살이를 하고나면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더 이상 잘못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앞으로 내란과 관련된 선고는 계속될 것인데 그 때마다 형량으로 사태의 본질이 수렴되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령으로 다스리고 형벌로 바로잡으면 백성이 형벌을 피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 바로잡으면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이 바르게 될 것이다.”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한 때 한 국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면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다. 덕치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 반성을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거운 형량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형벌은 보완장치일 뿐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정치가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어렵다. 왕이 통치하던 시대나 대의민주주의 시대나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정치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논어』에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많다. 노나라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부 계강자도 그 중 하나였다.   “만일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서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습니까?” “그대가 정사를 함에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 그대가...
덕의 정치, 형벌의 정치   요즘 12·3 내란재판과 관련된 선고가 시작되면서 형량을 두고 시끌시끌하다. 구형량보다 적게 나오면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고, 많이 나오면 당연하다고 한다. 내란에 대한 국민감정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형량으로만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맞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법으로 정해놓은 형량대로 옥살이를 하고나면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더 이상 잘못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앞으로 내란과 관련된 선고는 계속될 것인데 그 때마다 형량으로 사태의 본질이 수렴되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령으로 다스리고 형벌로 바로잡으면 백성이 형벌을 피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 바로잡으면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이 바르게 될 것이다.”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한 때 한 국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면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다. 덕치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 반성을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거운 형량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형벌은 보완장치일 뿐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정치가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어렵다. 왕이 통치하던 시대나 대의민주주의 시대나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정치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논어』에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많다. 노나라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부 계강자도 그 중 하나였다.   “만일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서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습니까?” “그대가 정사를 함에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 그대가...
토용
2026.02.10 | 조회 74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팔분의 일의 지혜, 불완전함 속에서 길을 여는 눈   한동안 누군가의 게시글에 댓글 한 줄 달 때도 나는 머뭇거렸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칸 앞에서 나는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댓글을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히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 안의 견고한 ‘아상(我相)’ 때문이었다. “이 짧은 한 줄에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학기 『금강경』을 읽으며 나는 아상의 실체를 마주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은 단순한 교만이나 자의식 과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실체화하고, ‘내가 옳다’는 착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말한다. 나는 이 오만한 집착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상을 경계하려던 나의 노력은 오히려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높은 벽이 되었다. 그렇게 점점 더 위축되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나는 “불교가 불편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티벳 불교의 수행서 『람림』을 만난 첫 시간, 아티샤 존자의 가르침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완벽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니, 공덕의 팔분의 일만 갖추었더라도 그를 스승으로 의지하라.” (『람림』 청전 번역, 73~74p)   공덕의 팔분의 일이란 『묘비청문경』에서 제시한 스승의 최저한도 기준이다. 처음에는 ‘팔분의 일’이라는 기준이 낯설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팔분의 일의 지혜, 불완전함 속에서 길을 여는 눈   한동안 누군가의 게시글에 댓글 한 줄 달 때도 나는 머뭇거렸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칸 앞에서 나는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댓글을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히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 안의 견고한 ‘아상(我相)’ 때문이었다. “이 짧은 한 줄에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학기 『금강경』을 읽으며 나는 아상의 실체를 마주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은 단순한 교만이나 자의식 과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실체화하고, ‘내가 옳다’는 착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말한다. 나는 이 오만한 집착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상을 경계하려던 나의 노력은 오히려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높은 벽이 되었다. 그렇게 점점 더 위축되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나는 “불교가 불편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티벳 불교의 수행서 『람림』을 만난 첫 시간, 아티샤 존자의 가르침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완벽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니, 공덕의 팔분의 일만 갖추었더라도 그를 스승으로 의지하라.” (『람림』 청전 번역, 73~74p)   공덕의 팔분의 일이란 『묘비청문경』에서 제시한 스승의 최저한도 기준이다. 처음에는 ‘팔분의 일’이라는 기준이 낯설었다....
두루미
2025.12.11 | 조회 229
      마을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디자인 『커뮤니티 디자인』 리뷰         ‘도시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 도시화는 지역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중심 사회는 산업화하고 농촌 인구는 도시로 대거 이동했다.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외로 구성된 ‘수도권’은 교육, 일자리, 병원, 문화 심지어 사람들의 꿈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인구 과밀화는 교통 혼잡, 주거 비용 상승, 사회적 불평등 심화의 문제를 가져왔고 다른 지역의 인구는 감소했다. 한국은 2024년 3월 기준 전국 228개 시군구 중 130곳(약 57%)이 소멸 위험지역으로 지정됐다. 지방 소멸 위험 현상은 지방 산업 및 고용 기반이 약화하는 문제를 가져왔고 교육시설, 교통시설 등 사회 기반 시설들이 와해되어 간다. 젊은 층은 또래를 사귀기 어렵고 고령층은 돌봄을 받기 어렵다. 사회적 고립은 도시에서도 확인된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떨어트렸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사회적 분리와 고립은 심화됐다. 젊은 층은 장기 실업 상태를, 장년층과 노년층은 구조조정과 해고 그리고 퇴직 등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 상태를 겪게 된다.  도시화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목적은 지역의 활성화이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현지 주민과 함께 문제의식을 탐구하고 해결방안을 찾아간다. 야마자키료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저자이자 커뮤니티 디자이너이다. 그는 사람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을 선보인다. ‘관이 민을 지도한다’라는 메이지 이후 일본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지역 주민을 참여시키고 공공사업으로 연결하여 마을의 문제를 일본의 한 사례로 만든다. 그의 행적은...
      마을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디자인 『커뮤니티 디자인』 리뷰         ‘도시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 도시화는 지역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중심 사회는 산업화하고 농촌 인구는 도시로 대거 이동했다.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외로 구성된 ‘수도권’은 교육, 일자리, 병원, 문화 심지어 사람들의 꿈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인구 과밀화는 교통 혼잡, 주거 비용 상승, 사회적 불평등 심화의 문제를 가져왔고 다른 지역의 인구는 감소했다. 한국은 2024년 3월 기준 전국 228개 시군구 중 130곳(약 57%)이 소멸 위험지역으로 지정됐다. 지방 소멸 위험 현상은 지방 산업 및 고용 기반이 약화하는 문제를 가져왔고 교육시설, 교통시설 등 사회 기반 시설들이 와해되어 간다. 젊은 층은 또래를 사귀기 어렵고 고령층은 돌봄을 받기 어렵다. 사회적 고립은 도시에서도 확인된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떨어트렸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사회적 분리와 고립은 심화됐다. 젊은 층은 장기 실업 상태를, 장년층과 노년층은 구조조정과 해고 그리고 퇴직 등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 상태를 겪게 된다.  도시화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목적은 지역의 활성화이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현지 주민과 함께 문제의식을 탐구하고 해결방안을 찾아간다. 야마자키료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저자이자 커뮤니티 디자이너이다. 그는 사람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을 선보인다. ‘관이 민을 지도한다’라는 메이지 이후 일본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지역 주민을 참여시키고 공공사업으로 연결하여 마을의 문제를 일본의 한 사례로 만든다. 그의 행적은...
새은
2025.12.01 | 조회 228
기학잡담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토용
2025.11.24 | 조회 271
방과 후 고전 중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진달래
2025.11.19 | 조회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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