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6회차

가마솥
2026-02-11 09:26
121

 

명상|출처: 미드저니

 

5시 까지 메모와 질문 올여 주세요

댓글 8
  • 2026-02-11 09:27

    [메모 1]
    <기독교 고행과 철학적 고행의 개념적 분리>

    (철학적 고행) p.358
    1. 자기 자신을 자기 실존의 목표로 삼는다.
    2. 자기 자신의 어떠한 양상을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어떤 것(장비)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3. 개인을 법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연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결국, 철학적 고행은 내가 진실된 담론을 말할 수 있게 만들며, 진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내가 그 진실된 담론의 발화주체가 되게 한다.

    (기독교 고행) p.359
    고백의 단계, 고해성사의 단계 즉, 주체가 참된 담론 내에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계기를 통하여 자기포기 활동이 된다.

    [메모 2]
    “참된 담론의 주체화로 이해되는 (철학적) 고행에 필요 불가결한 일차적인 형식은 무엇인가? 경청, 독서, 말한다는 사실과 관련된 모든 기술(技術)과 실천이다”p.359

    1. 경청
    듣기는 고행과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첫걸음, 첫 단계이다. 말로 전승이 이루어지는 문화에서 경청은 logos와 진실된 바를 취합해준다.p.360
    (수동성과 능동성을 가지는 경청의 애매모호한 속성이 문제)
    - 플루타고르코스 <경청에 대한 논술> p.360~362
    ‘청각은 가장 pathetikos(수동적,정념적)이며 logikos하다‘. 청각은 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덕은 로고스와 분리될 수 없고, 언어와 분절 불가능하므로 귀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세네카의 <108번째 서신>p.362~364
    세네카는 청각의 양의성을 취하면서 수동성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였다.
    (장점) 귀는 의지의 개입없이 침투를 받게 내버려두고, 로고스 가운데에서 자신의 범위에 오는 모든 것을 수집하는데 유리하다. 주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귀는 영혼에 로고스의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
    (단점) 철학학교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학생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임차인, 하숙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우 관심이 적절치 않은 대상이나 목표로 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청의 기술이 필요하다.
    - 에픽테토스 <어록 Ⅱ,23>. p.365~380
    논리적 듣기 활동에는 필연적으로 수동적인 것이 있고, 이 때문에 진실의 경청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진실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입말행위와 교육이 필요하다. 듣는 사람이 lexis(말하는 방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휘의 요소들에 머물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적절하게 말하기 위해 테크네가 필요하고, 경청하기 위해 경험과 자질(emperia)과 근면한 실천,주의,열중(tribe)가 필요하다.
    * 경청에 몰두하는 실천 방법 : ‘정숙’, ‘능동적인 태도’, 'to pragma(지시대상)에 대한 주의‘

    2. 독서/글쓰기
    ‘명상’은 라틴어 meditatio는 그리스어 실사 melete와 동사 meletan을 번역한 말인데, 19세기~20세기의 ‘명상(meditation)’과는 전혀 다르다. meletan은 사유의 자기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p.382 또 meditatio와 더불어 사유를 자기화하고 깊게 확신하여 믿고, 필요하거나 기회가 되는 대로 부단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시 됩니다. p.383 주체가 사유를 통해 어떤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훈련입니다. p.384
    (질문) 19세기~20세기 혹은 현대의 ‘명상(meditation)’은 어떤 것인가요? (경유님 후기 참조)

    철학적 독서의 대상과 목적은 명상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략) 진실을 사유하는 주체가 되고, 사유하는 주체로부터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명상이다. 동일시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첫째,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자신의 동일시’로써 읽고 쓰는 것은 로고스를 자기화하는 신체의 훈련이었다. 둘째, 글쓰기는 타인에게도 유용한 실천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자기배려와 타자배려를 구축하는 중요한 실천이다.
    (질문) 16세기의 자전적 글쓰기에서는 진실말하기의 주체화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된다고 하는데(p389), 이 구분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3. 말하기. p.390~396
    기독교의 영성과 목회신학에서 말하기 기술은 피지도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 즉 자기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시대에 말하는 자는 스승이다. 스승의 담론에 의해 진실로 인도받는 자는 자신의 진실 혹은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고백적 요소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도구적이지 수행적인 것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서 스토아, 견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스승이 주체가 어디에 있는 지 점검하고 시험하는 것이 늘 문제였다. 그래서 스승의 담론이 문제가 된다. parrhesia는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의 정숙의 의무에 화답하는 것이다. parrhesia는 스승의 담론에 따라야 하는 윤리적 태도와 기술적 절차로 제자가 주체성을 자기화할 수 있게 하고, 스승의 담론을 존유하여 그의 목표에 이르개 하는 담론규칙을 말한다.

    parrhesia는 도적적 자질, 도덕적 태도(에토스)이면서 동시에 tekhne 이다.p.398

    parrhesia(솔직하게 말하기)의 두 개의 적은 아첨(도덕적)과 수사학(기술적)이다. p.399

  • 2026-02-11 13:45

    일반적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로고스를 언어, 소리와 동일시한다고 들었습니다.
    p362에서 플루타르코스도 '청각 외 다른 감각들은 본질적으로 쾌락에 접근하게 해준다'고 하였고,
    비슷한 맥락으로 푸코도 청각의 양면성을 언급하면서 "영혼이 로고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로는 청각"이라고 하였습니다.
    --> 동양은 청각을, 서양을 시각을 중요시해온 점(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 눈을 찌른 행위)과 관련해 로고스와 감각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푸코는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훈련으로 정숙, 경청, 독서, 글쓰기의 기술과 윤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독서/글쓰기 부분에서
    --> p382-383, meletan(사유의 자기화 훈련)과 meditation(주체에게 사유가 가하는 작용)을
    p384 데카르트(주체가 사유를 통해 어떤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훈련)와 비교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 p391 기독교에서 자신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언급하고 있는데(p393),
    소크라테스의 대화법과도 위의 meletan, meditation을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헬레니즘-기독교-데카르트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 2026-02-11 13:46

    오늘 다른 일정으로 참여가 어렵습니다.ㅜ 죄송합니다.

    (393쪽) '피지도자의 담론에는 독자성이 없으며 고유한 기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그의 역할은 정숙입니다.': 진실에 다가가는 주체의 모습이 parrhesia를 통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parrhesia에서 피지도자의 역할은 '정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숙'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한 '경청'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 2026-02-11 13:48

    363쪽 청각의 양면성 pathetikos/ logikos
    logos: 우주의 질서, 세계 이성, 신의 섭리
    귀는 로고스 가운데서 귀의 범위에 오는 모든 로고스를 수집할수있다.
    철학 수업의 경우, 우리기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항상 뭔가 성과물이 남는다.
    철학 공부하는 사람은 매일 어떤 결실을 거두어 들인다.

    383쪽 죽음 명상
    meditatio란 사유를 자기것으로 체화하고 깊이 새기는 훈련이다.
    그것을 근육속에 각인시켜 필요할때 꺼내 쓰는 행동 원리이다.
    예로 죽음명상은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죽어가는 상황에, 생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사람의 상황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 되어보기(becoming) 이다.

    386쪽 글쓰기 hupomnemata 휘폼네이마타
    글을 씀으로써 우리가 생각한것을 흡수하고, 영혼과 육체에 이식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것이 신체의 습성, 신체의 잠재성이 되도록 한다.
    읽기, 쓰기, 쓴것을다시읽기는 진실과 로고스를 자기화하는 신체적 훈련이다.
    육체적인 훈련(?)이다.

    419쪽 에피쿠로스 학파의 스승의 위치 kathegetes
    스승은 직접적인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승한다. 1대 에피쿠로스에서 시작하여 내려온다.
    이런 수직적인 스승 제자의 연결 관계 이외에도, 수평적인 관계인 도반 관계가 있다.
    그래서 parrhesia는 이런 수직적 스승 제자 관계와 도반관계 속에 회전한다.
    학생들의 의무 중에는 그룹으로 스승과 모여서 말한다; 그들이 생각하는것, 그들 가슴속에 있는것, 그리고 그들이 범한 과오와 그들이 느끼는 약점들을 말하는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나중에 기독교의 고백과도 연결된다.

  • 2026-02-11 16:01

    383쪽 "주체와 그의 사유 간의 작용이 아니라 주체에게 사유가 가하는 작용으로서의 명상 관념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명상>에서 데카르트가 했던 바이며, 또 정확히 '명상'에 그가 부여한 의미입니다."

    384쪽 주석5) 데리다에게 한 답변(1972년)에서 푸코는 순수한 방법론적 규칙의 설정을 벗어나 환원 불가능한 주체화의 절차 내에서 데카르트의 명상의 의미를 의미 고정시킨 바 있다. "반면에 명상은 그만큼의 담론적 사건들에서처럼 발화 주체의 일련의 변화를 수반하는 새로운 언표를 발생시킨다...명상에서 주체는 자신의 활동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된다. 그의 담론은 그가 연루된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는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자신을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게 하며, 자신에게 상태를 발생시키고 애초에 자신이 갖지 못했던 위상이나 자격을 부여한다. 요컨대 명상은 발생하는 담론적 사건들의 결과로,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주체를 내포한다."<말해진 바와 씌어진바>

    386쪽 "글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기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이식되도록 조력하고, 그것이 일종의 습관이나 신체적 잠재성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 2026-02-11 16:11

    405쪽 자기 자신과 홀로 있을 수 없는 결과를 야기시키는 이 결여 속에서 자기 자신에 환멸을 느끼거나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바로 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의 부재 상태에 아첨꾼과 아첨의 위험이 달려듭니다… 아첨하는 자는 타자, 즉 아첨하는 자 자신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상한 담론을 삽입할 겁니다. 그리고 이 담론은 거짓된 담론입니다. 그래서 아첨을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내에 존재하는 결함으로 인해 아첨하는 자에게 의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파레지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첨을 받는 자가 아첨을 하는 자에게 계속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자가 어떤 순간에 타자의 담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는 타자의 담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확히 그 이유는 타자의 담론이 진실되었기 때문입니다. 타자가 말을 듣는 자에게 참된 담론을 말하고 전승함에 따라 듣는 자는 이 진실된 담론을 내면화하며 주체화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파레지아에서 전자로부터 후자로 옮겨가는 진실은 진실을 발화한 자와 관련해 그 말을 받아들인 자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보장합니다. 이 점이 아첨/파레지아(솔직히 말하기)의 대립과 관련해 말할 수 있는 바입니다.

  • 2026-02-11 16:27

    359)"내가 언급하는 시대, 즉 기원후 1, 2세기 이교도의 고행, 철학적 고행, 자기 실천의 고행에서는 생의 기술과 삶의 기술의 목적이자 대상인 자기와 만나는 것이 관건인 것 같습니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가 아는 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우리가 듣는 참된 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우리가 참되다고 인정하는 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철학적 전통이 우리에게 참된 것으로 전승한 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참된 담론의 발화 주체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철학적 고행의 핵심입니다."-고행이라는 말 앞에 '철학적'이라는 단어를 붙여 고대철학에서의 고행을 생각할 것, 그리고 고행의 의미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366)"경청하기 위해서는 empeiria 다시 말해 자질, 경험, 요컨대 후천적인 수완...그리고 tribe=열중, 근면한 성실도 필요합니다....empeiria와 tribe는 아직까지 테크네가 아닙니다. 말하기 위한 테크네가 존재하지만 경청을 위한 테크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청각은 그저 진실과 접촉하는 단계이고, 테크네가 아니더라도 근면하고 규칙화된 경청의 실천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경청이 갖는 양면성, 그러니까 정념적인 것과 이성적인 점 중 수동성의 효과를 제거하면서 이성적인 역할을 간직할 수 있도록, 논리적 경청을 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럴 때 필요한 수단이 바로 정숙, 능동적 태도, 주의에의 태도를 들고 있다. 경청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잘 듣고 있는 걸까. "들은 바를 즉각적으로 담론으로 변환시켜서는 안 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변환을 억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들은 바를 간직하며 즉각적으로 말로 변형시키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369)

    374)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공자왈 맹자왈이 많이 떠올랐는데, 이것은 언행이 모두 자기 수련이나 실천의 일종으로, 그것을 자기 몸에 붙이는 것, 자기화의 내용과 맞물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에픽테토스 <어록(3)>의 1편 향수를 뿌린 소년에 대한 거절에 대해서 푸코가 설명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경청의 실천 중 두번째인 능동적 태도와 관련해서 말하는데 더불어서 플라톤왈 소크라테스의 문맥과는 다르게 "스승의 담론에서 진실 경청의 탈에로스"(377)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다. 경청에서의 혹은 세계의 모든 사물은 외면, 외적인 기호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지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극히 미세한 세부 사항으로 충분하다."(372, 세네카왈) 읽다보니 유교의 예?

    378)경청의 세 번째 실천인 주의에의 태도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베르길리우스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있다. 지시대상을 지향하는 주의이자 관념과 관념 속에서 정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바의 주의(379)라고 말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내용파악("말해진 바를 파악")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라, 푸코가 말하는 주의를 기울이는 경청 중 경청은 관념 속 정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철학적 경청이 되려면 주의가 필요, 그것은 "관심을 지향하는 두번째 다른 방식은 말해진 진실과 주어진 명령이라는 양태하에서 사물을 듣고 난 뒤에 즉각적으로 기억력을 작동시키는 것입니다."(379) 으흠, 어떻게? 푸코왈 "자신이 진실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확증하기 위해, 그리고 이 진실된 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던지는 신속한 일별로 종결됩니다."(380) 경청 부분에서 보자면, 그것은 테크닉이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경청은 '철학적 경청'이다. 오늘 왠지 '철학적'이라는 말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383)"둘째로 명상은 동일시의 경험을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이 명상의 두번째 양태입니다. 즉 명상에서 사물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하는 사물을 훈련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이지요. 가장 유명한 예는 죽음에 대한 명상입니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쓰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대상으로 사유한다는 게 아니다. "..인간이 죽을 것임을 사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죽음을 명사아하기란 사유를 통해 죽어가고 있거나 죽게 되거나 생의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헬레니즘-로마 시기 "주체에게 사유가 가하는 작용으로서의 명상 관념"은 그냥 머리 굴리는 사유나 관념이라기보다는 그것은 머리를 한대 치는,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작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푸코는 데카르트의 회의도 그렇다고 보는데, 참...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모든 것이나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주체의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유와 그 내용에 대한 훈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가 사유를 통해 어떤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훈련입니다. 사유의 효과를 통해 현재의 자기와 관련해 주체를 이동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논의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하던 철학적 독서가 가져야 하는 명상적 기능입니다." 여기서 또 '철학적 독서'가 나왔다. 으흠, 철학적이라는 말의 오늘날의 용법을 다시 생각해보면? <인류세에서 죽음을 사유하다>라는 책에서도 봤듯, 우리는 죽은 자라고 하는 말은 관념이 아니다.

    404)"개인이 자기 자신과 적절하고 만족스러운 관계를 설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기 기술인 면학적 여가(otium)는 개인이 자아와 주체성을 실제적인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는 권력으로 착각하게 되는 착란 속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로마의 훌륭한 공무원. 그러나 공무원이라고 하나, 상황 혹은 관계에 따라서 자신의 직분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군군신신부부자자 처럼, 자기 직분에 넘어서거나 잊거나 하지 않기를 여가라는 말로 하는 걸까.

  • 2026-02-11 16:40

    이번에는 페이지대로 정리하지 않고 가마솥샘의 정리를 필두로 각자의 메모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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