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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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 8회 마지막 후기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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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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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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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3.08 | 30 |
| 222 |
[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8회차-마지막
(5)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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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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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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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3.03 |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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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7회차
(6)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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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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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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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2.25 | 92 |
| 220 |
[STOA로 가는 길]'고대철학'이란?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다.
(1)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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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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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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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2.19 | 355 |
| 219 |
[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6회차 후기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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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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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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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 2026.02.12 |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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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6회차
(8)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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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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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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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2.11 |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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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휘폼네마타 5회차 후기 입니다
(2)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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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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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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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 | 2026.02.06 | 92 |
| 216 |
[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5회차
(7)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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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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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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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26.02.04 | 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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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휘폼네마타 4회차 후기 입니다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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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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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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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2.03 |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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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휘폼네마타 4회차
(6)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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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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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1.28 |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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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 휘폼네마타 3회차 후기
(3)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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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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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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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2026.01.24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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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읽기]휫폼네마타 3회차
(7)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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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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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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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1.20 | 121 |

“‘자기로의 전향’은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자기자신으로의 귀환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주체가 자기 자신과 관련해 실제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실제로 문제가 된다(279)”
(질문)이후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의 윤리(자기 통치성?)를 참조해야만 한다고 하는데, 왜 이 개념을 꺼내는지......요?
항해의 은유에서 항해가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앎과 테크닉, 수완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학에서 자기배려의 관점에서는 치료하기, 타자를 통솔하기, 자기자신을 통솔하기를 목표로하며, 이를 위해 보편적 원리,관념,개념에 입각한 실천의 기술과 그 숙고된 체계를 설립하려고 했다(281)
‘자기로의 전향’의 원리와 ‘자기 인식의 원리’간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 ‘자기로의 전향’은 근본적으로 인식의 대상과 영역으로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284) 하는 질문을 던진다.(이 틀로써 분석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자기배려’와 ‘자기인식’에 관하여 플라톤적인 모델과 기독교적인 모델에 의해 헬레니즘적 모델이 가려져 있다.(286)
286-300
<플라톤적 모델: 상기모델>
1) 인간은 무지하다. 무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자기배려가 필요하다
2) 자기배려의 단언과 수행이 곧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가 된다.
3) 이때에 상기(想起)는 자기배려와 자기 인식의 접점이 되며, 영혼의 단 한번의 운동을 통해 자기인식-진실인식-자기배려-존재로의 회귀가 한데 모이게 된다.
<기독교 모델: 주해모델, 3~4세기 수도원 금욕 모델>
1) 자기인식-진실의 인식-자기배려 사이의 순환적 관계: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면 성서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현시된 진실을 영접해야 함<- 마음의 정화하는 인식의 형태로 자신을 돌보아야 이 진실을 인식할 수 있음.
2) 자기인식은 내면의 환상을 걷어내는 역할과 영혼과 마음 안에서 유혹을 와해시키는 기술들을 통해 실천된다.
3) 명상과 상기를 통한 진실인식과 자기회귀 기능은 없다.(그노시스-영지주의의 맞은편) 자기인식에 영혼 내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속성과 기원을 식별하려는 주해 가능을 부여하였다.
<헬레니즘적 모델: 자기배려의 독자성 유지>
상기와 주해와는 다른 헬레니즘적인 자기로의 전향 형식으로써, 국한되고 제한된 위치를 점유하는 자기인식과 관련해 자기 배려의 독자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 대비되고, 자기 포기나 자기 주해가 아닌 자기를 도달해야할 목적으로 구축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모델과 다르다.
“플라톤주의의 모델은 상기를 중심으로 돌고, 헬레니즘 모델은 자기와의 관계의 자목적화를 중심으로 돌며, 기독교 모델은 자기주해와 자기포기를 중심으로 돈다(290“
(질문) “자기와의 관계의 자목적화와 자기로의 회귀를 중심으로 하는 중간 모델인 헬레니즘 모델은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가 그릇되게 ‘기독교 모럴’이라 부르는 바로 만들기 위해 수용하고 물려받고 송환하여 다듬고 또 그것을 자기주해와 연결시킨 도덕 체계 형성의 장소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기독교 모럴은 헬레니즘 모델을 차용하여 기독교 모델인 자기주해와 교묘히 연결시킨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인가요?
견유주의/에피쿠르스 주의자들의 텍스트에서 자기인식이 자연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결코 양자택일의 위치에 있지 않다. 자기인식이 ‘자기로의 전향’ 테마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자연에 대한 인식과 자기에 대한 인식간의 상호 연결 관계 내에서라는 점이다(291)...중략....모든 지식은 ‘생활의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은 스토아주의/견유주의/에피쿠르스의 공통된 테마입니다.(291)
323쪽 두가지 영적 수련
1. eidetic meditation 형상명상
seeing it distinctly 분명하게 보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실제 눈앞에 있는것처럼 자기 내면에서 재현하는것이다
2. onomastic meditation 이름 명상
saying to oneself its name 그 이름을 혼잣말하기
사물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것의 기원 의미 상징을 탐구하는 명성상하기이다
1.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기술한다.
즉 그것을 본질 그대로, 날것 그대로, 그것 통째로, 모든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는것이다.
2. 사물의 이름과 사물 구성요소의 이름과 사물이 분해될때의 요소의 이름을 자기자신에게 말하기이다.
324쪽
1. contemplation of the thing 사물에 대한 관조(보기)
2. saying to oneself 혼잣말하기(말하기, 발화)
말로 표현하는 연습은
사물과 사물의 요소들을 마음에 새기고,
과거의 가치 체계를 현재화하여 재활성화하는 과정이다.
사물의 이름을 말하는 연습의 목적은
첫째 이름을 암기하고
둘째 이름 암기 훈련이 보기(응시하기) 훈련과 연동되게 연결하여
기억 속에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셋째 이 훈련을 통해 사물의 본질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말하기 수련으로 사물이 현재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지,
그 대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떤 성분으로 분해가 되는지
어떤 조건에서 사물이 해체되고 돌아가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그러므로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사물의 본질적 실재가 지닌 복잡성을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 존재가 지닌 취약성을 이해하게 된다.
333쪽 순간 지각 법칙은 주체가 자신에게 제시된 현실 보다 더 강함을 보장해주는 해방훈련이다.
331쪽 (마르쿠스) 아름답고 황홀한 음악을 듣게 될 경우..그것을 전체적으로 보려고 하지말고, 각각의 음색과 각각의 동작을 격리하도록 노력한다.
음악을 분해해서 그 순간이란 존재를 그 자체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332쪽 황홀한 음악과 춤을 원한다면, 그것을 경멸해라(scorn)...
멜로디나 춤보다 더 강하길 원한다면, 그것을 제압하길 원한다면,
각각의 음, 각각의 동작을 분해해서이다...
이 '현실 법칙'을 적용하는 순간, 각각의 음색과 동작이 그 '순간 현실'에 나타나게 되고,
그 '순간 현실'은 매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자체 힘을 갖고 있지 않은 단순한 음색에 지나지 않는다.
338쪽 질문(아시는분 설명 부탁드립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영적 수련은 개인성의 해체를 지향하고,
세네카의 영적 수련은 주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346쪽
질문 : 무엇을 해야할것인가?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할것인가?
우리 근대인은 주체는 어느한도까지 법에 복종해야하는가 라는 문제로 이해한다
(인식의 장에서 주체의 대상화의 문제로.)
그러나 그리스 로마인은 주체의 영적인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앎을 구축하기 또는
진실의 실천을 통해 최종 목적으로 주체를 구축하기로 이해한다.
316쪽 유일하게 선택할 점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성격을 나에게 부여해야 할 것인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나쁜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인생의 문턱인 세상에 태어나려 하는 순간에 영혼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 사항은 거기에 들어갈 건지 나갈 건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생이 완수되는 종결 지점에서 획득되는 지혜의 형태로 발견되는 것보다 앞서는 대칭의 일부가 있습니다. 이상적인 노년 속에서 생의 이상적인 완결에 이르게 되는 순간 인간은 살 것인지 아닌지, 자살할 것인지 계속해서 살 것인지를 숙고할 수 있습니다. 자살과 대칭적인 바가 여기에 주어집니다.
333쪽 현실, 선을 결정하는 법칙, 개인의 자유 확보의 심급으로서의 현재 원리와 결국에는 개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하여 자유를 확보하는 원리는 모두 연속적인 동작과 서로 연쇄되는 순간들의 불연속화를 통해 확보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각적인 지각 법칙은 주체가 자신에게 제시된 모든 현실의 요소들보다 더 강함을 보장해 주는 해방 훈련입니다… 사물을 그 다수성과 불연속성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텍스트는 말합니다. “날개짓을 하며 지나가는 참새들 가운데 한 마리를 사랑하려는 순간 그 참새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사물을 그 거대한 동일성 속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을 나는 참새떼가 분산되듯이 분산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늘을 지나가는 참새 한 마리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적 불연속 훈련의 한 예입니다.
286쪽)"이 두 주요 도식(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을......내가 여러분과 함께 에피쿠로스주의, 견유주의, 스토아주의 텍스트를 통해 분석하려 하는 이 헬레니즘 모델은 역사적으로 또 이후의 문화에서 플라톤적인 모델과 기독교적인 모델이라는 두 주요 모델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헬레니즘적 모델을 다른 두 모델로부터 따로 떼어내고자 합니다." 여기서 푸코가 보이는 역사적 도식은, 플라톤적 모델(상기라는 방법론)-헬레니즘적 모델-기독교적 모델(성서주해적, 즉 해석학적 방법론)로 삼분됩니다. 푸코가 말하는 헬레니즘적 모델은, "자기와의 관계의 자목적화와 자기로의 회귀"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물론 기독교는 중간모델인 헬레니즘 모델을 수용하고 물려받고 송환하여 다듬고 또 그것을 자기 주해와 연결시켜 도덕 체계를 형성했는데, "헬레니즘 모델의 엄격한 도덕 체계는 기독교 모델에 고유한 자기 주해와 포기에 의해 규정된 기술을 통해 반복되고 가공되었습니다."(290)
291)"자기 인식이 자기로의 회귀라는 정언에서 근본적인 테마라면 이 자기 인식이 자연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서" 어떤 관계를 갖느냐를 푸코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인식해야 할 바는 자연이냐 아니면 우리 자신이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이 자기 인식이 '자기로의 전향' 테마의 내부에 자리잡게 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식과 자기에 대한 인식 간의 상호 연결 관계 내에서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자기로의 전향'은 여전히 자연을 인식하는 일정한 방식입니다." 2/17일자 강의록은 스토아에서의 자연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길게 설명을 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푸코는 자연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헬레니즘적 모델 속 에피쿠로스/견유/스토아가 모두 조금씩은 다르다면서 특히 자신은 '스토아'에 주목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용한 지식에 대한 비판적 전통이 존재하며, 인간의 생활과 관련될 수 있는 모든 인식, 지식, 기술 정언의 우선성에 대한 주장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고, 또 "모든 지식은 생활의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은 스토아주의, 견유주의, 에피쿠로스주의의 공통 테마입니다." 서로 다른 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차이점에서 유독 스토아가 선택된 특징은 무엇인지 말해봐도 좋겠어요.
303)자기 자신에의 예속을 동요시킬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세네카는 둘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조건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전통적인 능동적 삶의 책무라는 이같은 일련의 책무를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일"....을 중단하기. 둘째로 한 일에 대한 봉급, 이익 분배, 보상의 형태로 자기에게 일상적으로 부여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기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이윤에 결부시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노예성은 일련의 약속, 활동 보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 책무-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자기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나 자신은 자기와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노예성으로 이야기되는...."결과적으로 이러한 자기 관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자연에 대한 연구가 책무-채무의 체계라는 유형의 자기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어찌보면 현실적 이해관계가 아닌, 그것과 거리가 먼 공부(공부해도 현실적인 유용성은 쓸 데가 없는^^)를 해야하는 걸까? "이러한 해방을 위해 사물의 자연을 응시하고 탐구하느 ㄴ것이 도움이 된다."(세네카왈)
307)"세네카가 정의한 스토아주의의 운동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우리 자신이 있는 지점으로부터 후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눈길을 결코 떼지 않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로부터 결코 눈길을 떼지 않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 지점에 도달하며 또 이승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고서도 우리가 속한 세계를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승 세계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승 세계와 관련한 일종의 후퇴와 자연의 비밀이 열리는 세계의 정상까지 상승하는 운동을 통해" 인간은 굽어보는 시선을 획득합니다."그런데 여기서 '후퇴'라는 말이 뭔지?
308)지상에서의 실제적인 우리의 실존--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한 실존--과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가늠하게 해줍니다...개미들처럼 군대는 아주 작은 공간 위에서 심하게 동요합니다. '우리가 항해하는 곳'은 '하나의 점 위에서'라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인간은 방대한 공간을 주파했다고 생각하지만 한 점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은 한 점 위에서 전쟁을 합니다. 오직 한 점 위에 인간은 제국을 분포시킵니다. 자연의 거대한 주파는 인간이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현실의 세계나 암흑과 외관의 세계 내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다시 파악하는 데 소용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시간과 공간상에서 점에 불과한 전적으로 현실적인 우리의 실존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세계를 주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 자신인 바이기, 즉 하나의 점이기, 우주의 보편적 체계 내에 우리를 점으로 표시하기, 바로 이것이 자연 사물의 전반적인 체계에 우리가 던지느 ㄴ시선이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해방인 것입니다."*309)
p284 '자기로의 전향'은 근본적으로 인식의 대상과 영역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것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까요?
p290 하단 마지막 단락 관련
Q) (플라톤의 에피스트로페와 기독교의 메타노이아 사이에 위치한다는)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인식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 나누고 싶습니다.
p303 "자기 자신을 이윤에 결부시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Q) 현재의 경제활동에서 위의 명제를 실천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p305 철학의 두 부분을(지상에서 해야 할 바,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 설명하면서 하단 부분에서 신을 성찰하는 철학이 "결점 및 악덕과의 절연을 완수하고 완결하는 자기와 관련한 도주와 절연을 구축한다"고 했습니다.
Q) 이러한 세네카의 입장이 앞 장에서 제시한 견유주의자들의 관계적 앎(p268), 에피쿠로스의 퓌지스에 대한 앎(p275)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리한 거 올려요~
편집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