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의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플라톤의 저작 <알키비아데스>를 플라톤 철학의 요약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재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이후로 제기된 ‘자기인식’의 문제를 <알키비아데스>를 통해서, 개인에게 적절한 시민과 통치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원칙과 규칙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과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의 실천들에 호소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의 본성에서 신성한 요소와 접촉하고 그것을 자기안에서 인식하는 것으로 분리해 냅니다(202-205)
"플라톤에 있어서는 정화의 절차와 정치적 절차 사이에 구조상의 차이가 없는 반면에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에서는 이 두 경향이 분리되었고, 또 정치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의 용례와 정화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의 용례-혹은 정치적 목적을 갖는 자기 배려의 용례와 정화적 목적을 갖는 자기 배례의 용례-는 이제 더 이상 일치하지 않으며 선택해야 할 갈림길을 구축합니다."(세븐, 206)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자기배려는 정치적인 것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에서 말하듯이, 도시국가가 구원됨에 따라, 또 자기가 자신을 돌보며 도시국가가 자기 자신을 구하게 만들면서 자신도 구원됩니다. 카타르시스(정화) 기술입니다.(경유, 208)
이제 푸코가 기준으로 잡고 있는 1~2세기에 오면, ‘정치적인 것’과 ‘자기 자신의 정화’의 분리는 아주 폭넓게 진행되어, 타자에 대한 배려가 궁극적 목표를 구축한다거나 자기 배려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해주는 지표가 되지 않고, 자기가 차츰차츰 자족적 목표가 되어 떨어져 나온다(209)고 합니다. “자기는 배려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자기의 자목적화)”는 것이지요(210). 이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분리한 지점에서 “견유학파-후기 소크라테스주의자/견유주의자/에피쿠로스주의자/스토아주의자 등-이후로 철학은 더욱더 자신의 정의와 무게중심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숙고된 ‘삶의 기술(tekhne tou biou)’ 혹은 절차를 중심으로 목표를 고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진리에 대한 사유’인 철학이 더욱더 현저하게 ‘주체에 의한 자기 존재 방식의 변형인 영성’에 점차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물론 이것은 정화의 테마를 수반합니다. 이제 삶의 기술은 ‘진실에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 나는 자아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하는가?’의 문제로 선회하고, 푸코는 여러 의미가 있는 ‘(자기)수양’이라는 단어로 이를 풀어 나갑니다.
"주체성의 역사, 즉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역사를 자기 수양의 틀 속에 삽입하지 않고서는 기독교 내에서-초기 기독교와 중세의 기독교 내에서-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에 일련의 변모와 변형을 겪게 될 주체성의 역사를 결코 기술할 수 없을 것입니다."(세븐, 213)
여기까지의 자기 수양은 자기 실천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기제 - 즉, 행실의 요구사항과 그와 관련된 기술적 이론의 장 - 로 사용된 것과 더불어, 조직된 가치의 장인 자기 수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확장시킵니다.
구원 개념을 논하는 것이지요. 구원에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이원성, 사건의 극적인 속정, 두 항을 갖는 활동이 그것입니다. 또 구원, sozein(동사) 혹은 soteria는 여러(6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자작나무, 216~217) 그 중에서 ‘유지하다, 보호하다’ ‘존속한다’라는 의미를 새롭게 알았습니다.
어쨌든 구원은 종교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아타락시아(동요의 부재)와 아타르케이아(자족)를 추구하는 주체가 자신에게 행하는 행위의 문제가 됩니다.(218)
그렇다면, 이제 자기 관계의 완결성과다를 바 없는 구원의 개념은 타자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완전히 배제하게 되어, 자기 구원과 타자의 구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보기 쉬운데, 사실은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타자를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했던 플라톤의 구도(225)와는 달리, 스토아에서 그 구도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를 배려하다 보면 타인의 구원은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보상과 같다는 것이죠(자작 225-227). 그 예로 에피쿠로스 주의의 우정에 대한 관념, 스토아주의 혹은 에픽테토스의 고유한 자기관념과 자기가 타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관념등을 열거합니다.
2월 10일 강의에 들어오면, 앞 시간에 이야기한 자기의 자목적화 속에서 구원의 개념이 기초화되었던 것을 확장하여, 자목적화가 우리에게 자신의 외부를 우회하여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이미지를 ‘전향(자기로의 회귀, 선회 convertere ad se)’이라고 명명하고 이에 대한 역사를 풀어 냅니다.
푸코가 집중하고 있는 1, 2세기에 전향 개념이 고안되고 변형되는데, 이는 플라톤의 epistrophe와 다르다고 합니다. 첫째, 플라톤의 epistrophe가 이승세계와 저승세계의 대립을 축으로 작동하는 반면,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전향은 내재성의 축을 중심으로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에서 우리의 소관인 바로 이동시킨다. 또한 epistrophe는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과 해탈에 의해 작동하지만, 이 전향은 자기와 자기 자신의 조응 속에서 이루어진다. 셋째는 epistrophe는 인식이 전향의 핵심을 이루지만, 이제 전향은 인식보다는 askesis(자기수련)이 핵심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후엔 헬레니즘 시대의 전향을 3, 4세기 기독교에서 발달하게 될 metanoia(개종)과 비교합니다. 우선 기독교적인 개종은 자기 자신 내에서의 단절, 즉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이전의 자기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기가 되어야 합니다.(고해성사)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전향은 그런 단절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면 자신의 내부가 아닌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외부와의 단절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푸코는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전향)’는 플라톤적인 시선이나 기독교적인 시선과는 다른 ‘타자들로부터 시선을 해방하는 것’과 ‘세계의 사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관점을 찾아내고 이에 내해서 강의를 진행합니다.
첫째, ‘타자들로부터 시선을 해방하는 것’은 타인들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고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주제인데요.
둘째, 시선을 ‘세계의 사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사물에 대한 앎과 자기로의 회귀가 어떠한 연관이 갖는지-진실 말하기-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먼저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의 ‘유효한 앎은 관계적인 앎이다’라는 말을 소환하는데, 이는 만물과 자기 자신의 관계의 장 내에서 펼쳐져야만 하고, 즉시 명령으로 옮겨 적을 수 있는 앎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체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들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주체의 존재방식을 변형시키는 그러한 지식, 유용한 지식을 언급합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 들의 Phusiologia(자연에 대한 앎)의 개념도 자기실천을 위해 철학적으로 관여적인 한에서 자연에 대한 앎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Phusiologia는 인간의 행실이 원리이지 인간의 자유를 작동시키는 기제를 재공하며 주체를 변화시키는 한에서 자연, 즉 phusis에 대한 앎이라는 것입니다. 사물과 세계 그리고 신과 인간에 근거한 앎이지만 주체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효과와 기능을 담당하는 앎이며, 진리가 주체에 충격을 줄 필요도 없고 주체가 참된 담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헬레니즘 시대의 독특함이라고 합니다.(277)
다음 시간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자기인식과 자연에 대한 인식’을 논의하기로 합니다.
p.278~356 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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