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 팔분의 일의 지혜

두루미
2025-12-11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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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팔분의 일의 지혜, 불완전함 속에서 길을 여는 눈

 

한동안 누군가의 게시글에 댓글 한 줄 달 때도 나는 머뭇거렸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칸 앞에서 나는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댓글을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히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 안의 견고한 ‘아상(我相)’ 때문이었다. “이 짧은 한 줄에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학기 『금강경』을 읽으며 나는 아상의 실체를 마주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은 단순한 교만이나 자의식 과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실체화하고, ‘내가 옳다’는 착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말한다. 나는 이 오만한 집착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상을 경계하려던 나의 노력은 오히려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높은 벽이 되었다. 그렇게 점점 더 위축되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나는 “불교가 불편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티벳 불교의 수행서 『람림』을 만난 첫 시간, 아티샤 존자의 가르침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완벽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니, 공덕의 팔분의 일만 갖추었더라도 그를 스승으로 의지하라.” (『람림』 청전 번역, 73~74p)

 

공덕의 팔분의 일이란 『묘비청문경』에서 제시한 스승의 최저한도 기준이다. 처음에는 ‘팔분의 일’이라는 기준이 낯설었다. 수행이란 완전함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숫자를 곱씹을수록 불교에 대한 불편함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서 수행이 출발한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람림』을 계속 읽어가며 나는 점차 이 ‘팔분의 일’이 단순한 물리적 수치가 아니라, 아상에 갇힌 중생을 건져내기 위해 던져진 하나의 은유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자람을 견디고 수용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다시 바라보라는, 가장 현실적이고 자비로운 지혜였다.

 

팔분의 일의 핵심은 스승이 아니라 ‘제자의 눈’이다

 

그렇다면 아티샤 존자가 말한 ‘팔분의 일’의 구체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람림』은 스승이 갖추어야 할 10가지 덕목(자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계정혜 삼학(계율, 선정, 지혜)과 경(經)에 대한 해박함, 법무아 증득(깨달음), 덕행, 언변, 자비심, 정진, 인내가 그것이다. 부처님이라면 이 10가지를 모두 갖춘 완벽한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아티샤 존자는 현실을 직시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남아있으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자는 지극히 드문 이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완벽한 스승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팔분의 일’이라도 갖추었다면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은, 이 10가지 중 가장 핵심적인 1~2가지 조건이라도 갖춘 분이라면 의지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가 남는다. 명성이 자자한 스승이든 혹은 나와 견해가 다른 스승이든, 그들 안에서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 결정적인 핵심 조건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여기서 『람림』은 스승의 자격만큼이나 중요한 “제자의 자격(法器:법을 담을 그릇)”을 요구한다. 제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사백론』에서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 지혜, 구도심” 세 가지를 말한다.(< 보리도차제광론1> 121p) 첫째,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은 선입견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직한 태도다. 스승의 높은 명성에 맹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혹은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는 객관적인 평정심이 있을 때 비로소 스승의 진면목(眞面目)을 마주할 수 있다. 둘째, ‘지혜’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총명함이 아니다. 무엇이 바른길이고 무엇이 그릇된 길인지, 스승의 가르침이 궁극적인 해탈에 부합하는지를 냉철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이 눈이 있어야 스승의 인간적 허물과 영적 공덕을 구별하여, 허물은 덮고 공덕은 취할 수 있다. 셋째, ‘구도심’이다. 법을 구하려는 간절한 열망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듯, 진리를 향한 처절한 목마름이 있어야 스승이 전하는 핵심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결국 ‘팔분의 일’의 해법은 스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눈’에 있다. 나의 기준과 아상을 내려놓고(치우치지 않는 마음), 진리를 찾겠다는 열망으로(구도심), 상대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지혜.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허물 너머에 빛나는 진면목을 통찰할 수 있다. 이 ‘제자의 눈’이 아티샤 존자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보자.

 

 

견해 차이를 넘어 보리심을 본 아티샤의 시선

 

초펠 편역 『람림』에 의하면, 아티샤 존자는 당시 인도의 대학자로서 불교 철학의 정점인 ‘중관(中觀)’ 사상에 통달해 있었다. 29살에 출가해, 157명의 스승을 모시고 현교와 밀교의 모든 가르침을 배웠으며, 당대 최고의 논사로 존경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목숨을 건 항해를 결심한다. ‘보리심’을 배우기 위해 13개월 동안 거친 파도를 헤치고 쎌링국(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스승 ‘쎌링빠’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미 대학자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자신에게 ‘자비의 실천’이 빠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채워줄 스승을 찾아 만리를 떠나는 이 간절한 열망이야말로 『사백론』에서 말하는 제자의 자격 요건인 ‘구도심’의 생생한 증명이었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 아티샤 존자의 태도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는 곧바로 스승을 찾아가지 않고, 스승 쎌링빠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고 한다. 이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스승의 법(法)이 진정 바른길인지 검증하려는 냉철한 ‘지혜’의 발로이지 않았을까. 또한 놀라운 것은 스승 쎌링빠의 반응이었다. 당대 최고의 논사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쎌링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마중 나갔다. 이 겸손과 환대의 모습을 본 아티샤 존자의 마음에는 큰 환희심이 일었다. 여기서 아티샤 존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발휘한다. 사실 철학적으로 보면 스승 쎌링빠는 아티샤의 ‘중관’보다 한 단계 낮다고 평가받는 ‘유식(唯識)’ 사상을 가진 분이었다. 보통의 학자라면 “내 견해가 더 높은데 굳이 낮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가?”라는 선입견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티샤는 “내 견해가 더 우월하다”는 아상과 편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스승을 마주했다.

 

그 결과, 아티샤 존자는 지혜로운 눈으로 핵심을 포착했다. 그는 쎌링빠 스승이 가진 견해의 차이에 머물지 않고, 그분 안에 살아 숨 쉬는 위대한 “보리심”을 정확히 통찰했다. 그에게는 ‘법(法)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지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냉철하게 보았다. 자신에게는 화려한 이론은 있지만 정작 중생을 구제할 뜨거운 심장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심장이 바로 스승 쎌링빠에게 있음을. 그리고 12년 동안 스승을 모시며 그 보리심을 체화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보여준 ‘팔분의 일의 지혜’이다. 그는 스승과의 견해 차이를 탓하며 돌아서는 대신, 그 안에 있는 결정적인 ‘핵심’, 즉 보리심을 발견하고 그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이 배움이 그를 진정한 대승의 스승으로 거듭나게 했다.

 

 

하사도의 삼보 귀의(歸依) :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수행의 시작

 

아티샤 존자의 일화는 『람림』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하사도의 ‘삼보 귀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하사도의 수행자는 죽음 이후 맞닥뜨릴 악처(지옥·아귀·축생)를 두려워하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의지처로 부처님(불), 가르침(법), 수행 공동체(승)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귀의는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다. 악처의 고통을 깊이 자각하는 ‘두려움’과 삼보만이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이라는 두 가지 원인이 갖춰질 때 비로소 성립한다. 문제는 이 두려움과 확신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어떻게 옮기느냐이다. 삼보는 추상적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스승은 삼보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보여주는 ‘길 안내자’가 된다. 삼보의 핵심은 “선업은 즐거움을, 악업은 고통을 낳는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악업인지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스승 없이 길을 가려 한다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문제는 현실의 스승이 언제나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자의 눈이 필요하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구도심을 갖춘 제자는 스승의 인간적 한계에 매몰되지 않는다. 스승의 말과 행위가 ‘법에 합당한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귀의란 스승 개인에게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드러내는 ‘법의 인도’에 마음을 일으켜 따르는 것이다.

 

이 원리는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종종 내 안의 아상(我相)을 보며 멈춰 서곤 했다. “아직 부족하다”는 판단이 앞서 스스로를 묶어두곤 했다. 그러나 아티샤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보면, 이러한 자기 검열 역시 아상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 내 마음이 비록 아상으로 얼룩져 있다 해도, 그 깊은 자리에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최소한의 선의, 즉 ‘보리심의 종자’가 있다면, 내 안의 작은 선의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의 허물 너머에서 법을 보았듯이, 내 번뇌 너머에서도 불성(佛性)의 씨앗을 보아야 한다. "완전히 깨끗해지면 그때 가서 실천하겠다”는 생각은 실현되지 않을 미래를 기대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이다. 부족한 스승에게서 법을 분별하듯, 불완전한 나에게서도 선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에 의지하는 것, 이 태도가 수행의 출발이다.

 

 

보리심과 공성 : 팔분의 일이 ‘전부’를 여는 이유

 

하사도의 귀의가 공포와 믿음에 기반한 것이라면, 중사도에서는 윤회 전체를 벗어나려는 출리심으로 확장된다. 출리심이 확립될 때 비로소 상사도의 보리심이 성립한다. 귀의가 단지 공포에 대한 의존으로 머문다면 하사도의 단계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법의 가치를 스스로 분별할 줄 아는 제자의 안목이 자라기 시작하면, 귀의는 자연스럽게 대승 수행의 토대로 이어진다. 이때 보리심은 단순한 ‘선한 마음’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 성불하겠다는 발심이다. 따라서 내 안의 작은 선의는 완성된 보리심이 아니라, 보리심으로 자랄 수 있는 ‘종자’, 즉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 작은 선의는 어떻게 위대한 보리심으로 확장되는가? 실마리는 ‘팔분의 일’을 보는 눈에 있다. 상대의 부족함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변하지 않는 실체’로 규정한다. 동시에 그를 판단하는 ‘나’를 고정된 실체로 세운다. 이것이 아상이며, 자성(自性)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아티샤 존자처럼 상대의 가치를 보려는 태도는 이 착각에 균열을 낸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그 안에 깃든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지혜가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다.

 

이 지혜가 열릴 때, 보리심의 토양이 비로소 생긴다. 나의 작은 선의와 타인의 작은 공덕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리심이 싹튼다. 왜냐하면 “나와 너의 차이가 본질적이지 않다”는 통찰이 있어야만, “너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지겠다”는 엄청난 발심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말하는 보리심이다. 아티샤 존자가 스승 셀링빠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모든 존재 안에서 귀한 가치를 발견하는 그 넉넉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야말로 보리심의 씨앗이다.

 

맺음말: 팔분의 일은 ‘전부’를 여는 열쇠

 

팔분의 일은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전부가 들어 있다. 보리심의 잠재력, 공성의 가능성, 자비의 기초가 모두 그렇다. 불완전한 스승에게서 법을 분별하고, 불완전한 자신에게서 선한 가능성을 발견하며, 불완전한 세상에서 연기적 관계를 보는 눈을 갖출 때, 우리는 아티샤가 보여준 수행의 첫 문을 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팔분의 일은 작지 않다. 그것은 공성의 문을 여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보리심이 자라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토양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팔분의 일은 전부를 여는 지혜이다.

 

비록 마음이 여전히 어지럽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팔분의 일만큼의 선의’를 믿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지점에서 이미 공성의 깨달음과 보리심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작은 마음을 붙잡고, 멈춰 서 있던 자리에서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댓글 1
  • 2025-12-24 19:30

    학술제 발표가 끝나고 다시 보니 복습이 되네요. 다시보니 ‘보리심’이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발심이었군요..! “너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지겠다”라는 마음이라니,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의 차이가 본질적이지 않다”에서 시작되다니.. 어쩌면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말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 마음은 작은 보리심인가요? 큰 보리심인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팔분의 일의 지혜, 불완전함 속에서 길을 여는 눈   한동안 누군가의 게시글에 댓글 한 줄 달 때도 나는 머뭇거렸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칸 앞에서 나는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가 댓글을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히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 안의 견고한 ‘아상(我相)’ 때문이었다. “이 짧은 한 줄에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학기 『금강경』을 읽으며 나는 아상의 실체를 마주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은 단순한 교만이나 자의식 과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실체화하고, ‘내가 옳다’는 착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말한다. 나는 이 오만한 집착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상을 경계하려던 나의 노력은 오히려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높은 벽이 되었다. 그렇게 점점 더 위축되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나는 “불교가 불편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티벳 불교의 수행서 『람림』을 만난 첫 시간, 아티샤 존자의 가르침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완벽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니, 공덕의 팔분의 일만 갖추었더라도 그를 스승으로 의지하라.” (『람림』 청전 번역, 73~74p)   공덕의 팔분의 일이란 『묘비청문경』에서 제시한 스승의 최저한도 기준이다. 처음에는 ‘팔분의 일’이라는 기준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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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5.12.11 | 조회 186
      마을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디자인 『커뮤니티 디자인』 리뷰         ‘도시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 도시화는 지역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중심 사회는 산업화하고 농촌 인구는 도시로 대거 이동했다.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외로 구성된 ‘수도권’은 교육, 일자리, 병원, 문화 심지어 사람들의 꿈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인구 과밀화는 교통 혼잡, 주거 비용 상승, 사회적 불평등 심화의 문제를 가져왔고 다른 지역의 인구는 감소했다. 한국은 2024년 3월 기준 전국 228개 시군구 중 130곳(약 57%)이 소멸 위험지역으로 지정됐다. 지방 소멸 위험 현상은 지방 산업 및 고용 기반이 약화하는 문제를 가져왔고 교육시설, 교통시설 등 사회 기반 시설들이 와해되어 간다. 젊은 층은 또래를 사귀기 어렵고 고령층은 돌봄을 받기 어렵다. 사회적 고립은 도시에서도 확인된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떨어트렸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사회적 분리와 고립은 심화됐다. 젊은 층은 장기 실업 상태를, 장년층과 노년층은 구조조정과 해고 그리고 퇴직 등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 상태를 겪게 된다.  도시화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목적은 지역의 활성화이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현지 주민과 함께 문제의식을 탐구하고 해결방안을 찾아간다. 야마자키료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저자이자 커뮤니티 디자이너이다. 그는 사람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을 선보인다. ‘관이 민을 지도한다’라는 메이지 이후 일본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지역 주민을 참여시키고 공공사업으로 연결하여 마을의 문제를 일본의 한 사례로 만든다. 그의 행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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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은
2025.12.01 | 조회 183
기학잡담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토용
2025.11.24 | 조회 226
방과 후 고전 중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진달래
2025.11.19 | 조회 241
Socio-sociolgy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리뷰          “요즘은 무슨 공부해?”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닌 지 2년 정도 되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첫인사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사실 그보다 만나는 친구들이 거의 인문학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중심으로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어.” 라고 답했다. 이 말을 할 때 내가 어색해서 참기 힘든 지점은, 마르크스도, 공부도, 자본도 아닌 ‘경제학’이라는 표현이 내 입에 오를 때다. ‘인문학’을 제외하면 ‘학’자 들어간 단어들 하고는 정말 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꽤 ‘학술적’으로 느껴지는 ‘경제학’이라는 말을 내 입으로 쓰다니. 낯 간지럽다. 사실 지금의 ‘경제학’은 좀 더 ‘수학적’이고, ‘경영’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알라딘의 카테고리만 봐도 경제는 경영과 함께 묶여있고, 주로 기업 경영이나 세일즈, 재테크와 투자에 관련된 책들을 다룬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친구들에게 “자본주의의 발생과 원리, 또 그 한계점을 공부하며 대안적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답해야 맞다. 말하자면 내가 집중하는 지점은 ‘국부와 자본 운영의 관점으로 보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으로서의 경제’에 가까운 셈이다.  한편, 자산 증식의 관점으로 보는 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보니, 현대의 경제 관련 기사를 볼 때는 여전히 힘든 지점이 있다. 마르크스가 바라고, 분석한 대로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국가는 여전히 마르크스가 비판하던 고전 경제학자들과 그 후예들의 이론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리뷰          “요즘은 무슨 공부해?”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닌 지 2년 정도 되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첫인사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사실 그보다 만나는 친구들이 거의 인문학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중심으로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어.” 라고 답했다. 이 말을 할 때 내가 어색해서 참기 힘든 지점은, 마르크스도, 공부도, 자본도 아닌 ‘경제학’이라는 표현이 내 입에 오를 때다. ‘인문학’을 제외하면 ‘학’자 들어간 단어들 하고는 정말 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꽤 ‘학술적’으로 느껴지는 ‘경제학’이라는 말을 내 입으로 쓰다니. 낯 간지럽다. 사실 지금의 ‘경제학’은 좀 더 ‘수학적’이고, ‘경영’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알라딘의 카테고리만 봐도 경제는 경영과 함께 묶여있고, 주로 기업 경영이나 세일즈, 재테크와 투자에 관련된 책들을 다룬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친구들에게 “자본주의의 발생과 원리, 또 그 한계점을 공부하며 대안적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답해야 맞다. 말하자면 내가 집중하는 지점은 ‘국부와 자본 운영의 관점으로 보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으로서의 경제’에 가까운 셈이다.  한편, 자산 증식의 관점으로 보는 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보니, 현대의 경제 관련 기사를 볼 때는 여전히 힘든 지점이 있다. 마르크스가 바라고, 분석한 대로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국가는 여전히 마르크스가 비판하던 고전 경제학자들과 그 후예들의 이론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우현
2025.11.10 | 조회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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