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테크트리]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우현
2024-02-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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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철학’이라고도 불리며 만물의 생성과 소멸,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불러 내린 최초의 철학자였다.(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中) 소크라테스는 인간사를 중심으로 철학적 성찰을 개진했으며, 철학의 목적을 개인 및 공공의 영역에서 ‘좋은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를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전회’라고 한다. 그렇게 ‘최초의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제2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여겨지기에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밖에도 소크라테스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유는 전해져 오는 그의 삶의 모습들에서 볼 수 있는 ‘스타성’에 있다. 그는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젊은 시절과 사생활에 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40대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아테네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누추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와, 소위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붙잡고, 밥까지 굶어가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유익한 말’도 여러 번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인데, 그는 상대방이 질려할 때까지 질문을 반복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난 정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네.” “정의란 의로운 것입니다.” “그럼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럼 배려란 무엇인가?” .... (무한 반복)

 

 이 끝없는 질문 공세는 결국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가 나온 것이기도 하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붙잡고 면박을 주는데, 그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는 악명이 매우 높았지만, 반대로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의 ‘논박술’에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 소크라테스의 깊은 지혜로부터 나오는 용감함과 대담함, 정의로움 등의 반한 젊은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까’들에게 미움을 사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발되었고, 친구들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거나 탈옥할 수 있었음에도 당당히 독배를 들이키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정말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가 아닐 수 없다. 그를 슈퍼스타로 만든 그의 논박술, ‘엘렝코스Elenchos’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방법론 - ‘엘렝코스Elenchos’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이기도 한 ‘엘렝코스Elenchos’-논박술-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 그가 엘렝코스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본적인 철학 배경을 이해해야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중심 주제를 자연학에서 윤리학으로 이동시킨 첫 번째 인물로 그는 앎episteme과 덕arete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앎은 무언가에 대한 지식이나 지혜이고, 덕은 윤리적 좋음善, 최고의 상태, 신神적인 것을 의미한다. 가령 자신이 ‘정의’에 대한 앎이 확실하게 있다면, 결코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의도적으로 악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앎에 대해 그것이 삶의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진정한 앎을 깨닫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앎은 선善이자 신神의 근원이요, 무지는 악의 근원이다. 따라서 ‘앎’은 ‘신적인 것’과 동일한 위상을 같는다. 이처럼 ‘앎’과 ‘신적인 것’이 같은 위상에 놓이게 되면 ‘신의 존재’는 곧 ‘보편적 앎’을 실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비춰 볼 때, 생활 전반에 종교적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었던 고대 아테네라는 조건에서 완전한 앎과 지혜는 오직 신들에게서만 가능한 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와 같은 경지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적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임은 분명하다. 그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는 것, 윤리적인 삶을 살아나갈 것을 요구한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에 대해 아첨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눈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결코 '미남'은 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외모지상주의'가 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그가 큰 인기였던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아가던 소크라테스에게 어느날 하나의 신탁이 전해져 내려온다. 신녀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듣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과 반대되는 신탁의 내용에 혼란을 겪는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생각해온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니? 신탁의 내용에 소크라테스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당대의 아테네에서 신탁의 진실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신들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며, 그 숨은 의도를 밝히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하지만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 그들의 무지를 보지 못하는 크나큰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신탁의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온 자신은 저들보다 지혜로운 것이다. 또한 신으로부터 그 깨달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엘렝코스는 신탁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일종의 방법론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엘렝코스는 ‘나는 무지하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을 펼치게끔 만든다. 그리고 질문을 반복하여 그 지식을 분해하고, 상대방이 진정한 앎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한편 이런 엘렝코스의 방식은 기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채로, 상대방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아도P. Hadot를 비롯한 몇몇의 학자들은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게 목적이더라도, 그를 위해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는 엘렝코스의 기만적 성격을 비판하기도 한다.

 

 

엘렝코스의 주술성과 관계성

 나는 엘렝코스 자체가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본인은 상대에게 안겨줄 수치심과 모멸감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방이 느낄 수치심에 대해 알았음에도, 그리고 실제로 그에 대한 보복을 당했음에도 소크라테스가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 소크라테스! 나로 말하자면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당신이 자기 자신을 “어려움에 빠드림aporeis”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어려움에 빠뜨리게 한다aporein”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나에게 주술을 걸고, 나를 중독시킨 것도 모자라 최면까지 걸어대니, 결국은 내가 “어려움”의 한복판에 빠져버린 듯합니다! ... 나는 적어도 덕에 관한 한, 수도 없이 많은 논의를 여러 사람에게, 그것도 아주 잘 이야기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군요.

플라톤, 『라케스』 中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엘렝코스는 일종의 마법 주문과 비슷하다. 논제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충격과 마비를 줌으로써 굳게 믿고 있던 사고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또한 이 마비는 소크라테스 본인에게도 유효했을 것이다. 엘렝코스의 과정 자체가 답변자의 솔직한 대답과,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의 답변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논박은 대화자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그저 허공을 맴돌게 된다. 즉 엘렝코스는 두 당사자의 몰입을 통해 기존 사고에 균열을 내며, 엘렝코스의 주체마저도 스스로의 보편적 진리를 재검증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저작 『변명』에서는 엘렝코스의 실천이 곧 그의 철학의 요체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며 사는 것이란 곧 자기 자신과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던 보편적 진리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보편적 진리란 내적 성찰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보편적 진리와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공부는 하고 싶은데 세미나는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조언이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공부란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포개어 봄으로써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혼자하는 공부란 이 경우에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는 한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곧 삶 그 자체여야만 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엘렝코스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지혜가 아니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우리는 ‘어려움에 빠진apories’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이 과연 공부일까? 물론 이는 처음부터 어려운 공부에 부딪혀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2024 철학입문>처럼 비교적 쉬운 세미나를 통해서도 엘렝코스적 관계 속에 놓인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무지를 확인할 용기를 낸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지혜와의 만남-충격과 마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2024 철학입문 ‘앎과 윤리가 하나였던 시대의 철학’에서 고대적 지혜에 접속해 보는 것이 말이다.

 

 

댓글 5
  • 2024-02-06 09:04

    어려움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면 공부가 아니라는, 멋진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철학입문 세미나만이 아니라 문탁의 모든 세미나가 우리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고,
    무지를 통해 지혜로 가는 길을 여는 의례가 되기를!!

  • 2024-02-06 16:15

    와, 신기방기네유.
    테스형도 우현이도.
    우현이의 멋진 스타트를 응원합니다.
    더 좋은 글을 만날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 듭니다.

  • 2024-02-06 22:39

    우와 이 연재글을 철학입문 보조 텍스트로 생각하며 구독해야겠어요!! 세미나에서 이루어질 엘렝코스도 기대가 되어요!^^
    (근데 글쓰기를 비판한 테스형이 철학 에세이 발표회에 오면 무슨 질문을 던질지 궁금해짐ㅋㅋ)

  • 2024-02-07 07:58

    우현이의 공부, 화이팅!

  • 2024-02-17 23:10

    우현 역시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현의 글은 그래서 테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지도 모르겠다.
    게임+음악+철학이 만나면 무엇이 될까....어마어마 할 것 같다!!!!!!!!!!!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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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4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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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4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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