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 예술 7회]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2024-01-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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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다. 단어는 작용력의 소리로 된 조응물이며, 또한 작용력의 표상이다.”

 

  한자의 개수가 많은 이유는 글자마다 상응하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글자들이 표현하는 의미나 개념들은 서로 겹치면서 모호한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또 ‘끊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만 해도 다섯 개(切, 絕, 截, 絶, 撧)가 넘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같은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개의 글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한자들도 같은 뜻을 가졌음에도 그 세세한 결을 살피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흐를 류流, 놀 유遊, 말씀 사辭와 일 사事, ‘끊다’의 여러개의 한자를 아는 게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듯 서로 다른 한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차릴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자’와 관련해서 느끼는 만큼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가 다른 글자가 아닌 그 글자가 꼭 사용된 이유, 어떤 단어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한자들이 각각이 어떤 의미연관 속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느낌感을 알아차리기覺

 

  ‘느낌’은 우리 신체의 다섯가지의 눈, 귀, 코, 입, 피부와 관련이 있다. 매일 이 신체기관을 창구로 많은 것을 느낀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 다섯가지 창구로 들어오는 느낌 중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면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코가 매번 들이쉬는 숨,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 피부에 닿아있는 모든 촉감을 느끼려면 그 느낌에 깊이 집중해야 한다. 요컨데 오감은 신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느낌’은 한자로 느낄 감感이다. 한자는 느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感에는 咸과 心이 함께 있다. 咸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긴 창을 바닥으로 내리 꽂고 소리를 내면서 기합을 넣는 모습이다. 어릴 때 태권도 학원에 가면 사범님은 발차기를 할 때, 주먹을 뻗을 때 기합을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온 기운을 손 끝과 발 끝으로 모아 불꽃을 날리듯 뻗으며 “하!”하고 소리를 냈다. 그 경험을 돌이켜보면 기합을 넣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느낄 감感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마음心으로 모은다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느낌‘을 이렇게 마음心과 연관지었는데, 心 자체가 심장의 형태를 본따 만들어진 한자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신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표현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숨이 가파오르거나, 침을 삼키게 되거나... 아니면 그 느낌의 주변을 탐색한다. 부대낀다거나, 슬프다거나, 껄끄럽다거나, 뿌듯하다거나. 이렇게 느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다보면 그 정체를 찾을 수 있다. 느낌이라는게 워낙 보이지도 않고 불문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내긴 힘들지만 고대사람들은 그 정체가 마음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했다. 기합으로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신체의 느낌을 마음으로 모아 그 정체를 깨달을覺 때, 그것을 감각이라고 한다. 느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집중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감각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느낌은 일상적인 신체의 감각처럼 쉽게 흘러가버린다. 그렇다면 오감은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覺 쉬운 대표적인 느낌이 아닐까 한다.

 

 

 

3. 아픔痛에는 ‘울림’이 있다 

 

  아이들과 감각을 주제로 수업을 할 때 처음으로 다룬 감각은 촉각이었다. 촉각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뜻한다. 피부는 우리 신체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수많은 층위의 느낌을 겪는다. 매끈함, 끈적함, 까슬함, 따가움, 욱신거림… 피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아픔‘을 잘 느끼는 것이다. ‘아픔’은 가장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통痛이라고 하는데 이 한자를 살펴보면 ‘아픔’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痛은 병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뜻하는 녁疒과 댕댕 울리는 종甬이 함께 있다. 종소리는 청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왜 ‘아픔’에 쓰이는 걸까? 그것은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 때문이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면 아무리 작은 부위더라도 온 몸으로 전해진다. 순간적인 자극이 온 몸으로 마치 종이 울려 퍼지듯 전해지는 것이다. 아픔은 그 ‘울림’이 가장 빠른 감각이다. 그래서 촉각을 구분 할 때 우선 우리는 아픈지 안아픈지를 가장 빠르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울려퍼지는 아픔의 성질을 신체기관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더 넓은 규모로 그 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신체 내부의 울림에서 외부로 퍼지는 울림이다. 수업에서 가장 먼저 촉각에 대해서 다룬 이유는 한자가 보여주는 이런 아픔의 성질 때문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었다. 설령 직접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다른 사람과 같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특히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아픔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감정은 감각과 다르다. 당혹감, 불안감, 불쾌감 등등... 이런 감정들은 앞서 얘기한 ‘느낌의 작용’의 결과들이다. 누군가의 이런 느낌의 작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종의 포기였다.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외부의 다른 이에게도 전해진다면 무엇이 전해질까? 분명한 것은 전달되는 것이 ’통증‘은 아니라는 점이다. 통증은 ‘내가’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통증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이 전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감정 또한 느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전, 감정을 이해하기 이전에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요소가 있다. 그 요소가 바로 정서情緖다. 감각과 감정, 정서는 모두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서는 실마리 서緖를 사용해 느낌의 실마리를 의미한다. 나는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이 실마리를 외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것을 느낄 수 없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일’은 순간마다 계속해서 일어난다. 내가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아픔 자체가 외부로 자꾸만 퍼져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지레짐작하거나 그 정서를 통해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나는 痛을 통해 느낌 자체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 없다보다도 나에게 전달된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통이 보여주는 아픔의 성질을 생각해보며 누군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희의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4. 정신운동을 통한 이해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어가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놀라운 힘이 있다고도 했는데, 사실   한자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고대 사람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대해 고민한건 아니었다. 마르셀 그라네가 말하는 힘은 한자로 할 수있는 다채로운 정신운동에서 일어나는게 아닐까 한다. 이번 글에서 살펴본 ‘느낌’과 관련된 다양한 한자들만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구분하고, 그 모든 과정이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한 것과, 아픔이라는 문자에 종모양을 담아 추상적이지만 ‘울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일련의 ‘정신운동’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았을까?

   

“상형문자가 원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즉 어원적 재구성이 상상적인 것인지 정확한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문자가 주는 느낌 그 자체, 즉 개념들이 진정한 표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다.”

 

  한자마다 담겨있는 개념이나, 개념을 옮겨놓은 한자의 자형을 들여다보면 그 시를 읽을 때나 떠오르는 은유적인 비유나 아득하게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원래는 무엇이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복잡하고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기원을 명확히 찾을 수 없는 한자 속에서 우리는 사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자는 굉장히 감각적인, ‘느낌적인 느낌’의 문자다. 눈으로 읽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그 형상의 실제를 떠올리고, 그 실제를 통해 다시 한번 한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정신운동이 우리의 ‘느낌’을 사유하는 일과도 멀지 않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과 하는 수업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정신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댓글 4
  • 2024-01-12 08:57

    재미있네요. 한자가 정동과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자 그 자체가 이미지여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말의 경우는 글자를 볼 때가 아니라 음성으로 전환될 때 정동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한자는 시각적으로 감응이 일어나고 우리말은 청각적인 감응이 더 강한 것 같은데..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한자의 특이성과 다른 문자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데, 맞나요?
    그런데 정신운동이라는 말이 쏙 들어오질 않네요. 감응? 정신활동이 포함하는 모든 것?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 2024-01-13 18:24

      ㅋㅋㅋㅋㅋ 요요쌤이 이렇게 물음표 가득한 댓글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
      이번 글은... 한자의 특이성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한자 자체가 지금까지 쓰이는 언어중에서는 유일한 표의문자여서 그냥 한자 자체가 다른 문자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정신운동이 참 애매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응도 가까운 말일 수도 있고 그냥 언어와 사용하는 문자가 우리의 다양한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데 제 언어로는 그게 ‘느낌‘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연상작용? 인지반응? 고민하다가 그냥 정신운동... 이렇게...

  • 2024-02-19 01:06

    지난 번 한문이 예술 시간에 아이들이 먹을 갈고
    붓으로 자신의 글자들을 쓰는 걸 보면서 뭔가 찌릿찌릿 했습니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
    한자한자 한자로 풀어가는 이야기에
    점점 노하우가 쌓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24-03-17 23:55

    다음 글도 기다려지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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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2
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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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 조회 14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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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5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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