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5회> 양생, 삶과 죽음의 변화를 향한 끝없는 정진

기린
2023-12-11 11:24
392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되려 했던 왕들의 일화가 심심찮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진인은 “분별심으로 도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위를 자연에 덧붙이지 않는” 태도로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을 넘어서 다만 자연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죽음과 관련해서 「양생주」4장은 친구의 장례식에 조문한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양생의 도는 어떤 것일까?

 

 

 

2. 죽음, 인간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변화

 

노담이 죽자 진일이 문상을 가서 세 번 곡을 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

“처음에는 나도 저들처럼 하는 것이 죽은 노담을 기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까 문상할 때 보니 노인들은 자식을 잃은 것처럼 통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부모를 여윈 것처럼 통곡을 하고 있더구나. 저들은 노담이 바라지도 않은 칭송을 하기 위해, 노담이 원하지도 않는 통곡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보이더구나. 이 모두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거역하고 인간이 부여받은 운명을 잊고 있는 짓이지.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죄’라고 불렀다. 마침 세상에 온 것도 때를 얻은 것이요, 마침 세상에서 떠나는 것도 때를 따를 뿐이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다. 「양생주」 『낭송장자』

 

 

  친구의 장례식에 간 진일이 형식적으로 조문을 해서 제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노담은 죽음을 맞아 지극한 슬픔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 일화에 나오는 노담은 『노자』를 썼다고 전해지는 노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노자와 장자는 중국의 제자백가 중에서 도가(道家)로 분류된다. 유가가 제례, 장례 등에서 예법을 중요시하는데 비해 도가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인위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담의 시선으로 보면 마치 부모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태어남의 기쁨이나 죽음의 슬픔에서 얽매이지 않고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가는 것이 순리였다. 오히려 인간 세상의 예법에 묶여 있다가 죽음을 맞는 사태를 ‘현해(懸解)’라 하여,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일컬었다.

 

  ‘현해’는 「대종사」편에서 자사가 자여의 병문안을 갔을 때, 자여의 몸이 곱사등이로 변하는 것을 보며 나누는 대화에도 나온다. 자사는 그렇게 변하는 모습이 싫으냐고 묻는다. 자여는 만약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목청껏 울어 새벽을 알리겠다고 응답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변화를 그저 편안하게 받아들일 뿐, 좋거나 싫다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리를 거슬러 좋고 싫음에 연연하여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얽매이게 된다. 도가에게 죽음이라는 사태는, 자연이 준 생명을 옭아맸던 여러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때였다. 그래서 유난한 곡소리는 죽음이라는 변화를 방해하는 행위였으니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3. 노래 부르는 장례식

 

  장자는 장례식에서 곡을 하지 않음은 물론 노래를 부른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것도 아내의 장례식에서 말이다. 「지락」편에서 장자의 친구 혜시는 울음이 안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노래까지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나무랐다. 장자도 아내가 죽자마자 슬픔이 밀려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런 형체가 없던 것이 저절로 혼합되어 생명에 이르렀다가 죽음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아내가 이제 “천지라는 큰집에서 편안히 쉬게” 되는 변화의 때를 맞았는데 그것을 슬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다시 「대종사」편에서 살펴보면, 자상호의 장례식장에 간 공자의 제자 자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은 자상호의 장례식장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자공은 시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느냐고 물었다. 유가인 자공이 보기에 이들은 장례식의 예법을 어긴 자들이었다. 자상호의 친구들은 자공에게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저 사람이 어떻게 예를 알겠는가 되물었을 뿐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서로의 예법 차이를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으니 웃음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자의 노래도 마찬가지 아닐까. 삶을 주어 살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곡을 그치고, 천지에 몸을 맡기는 변화를 노래함으로써 중도의 도를 지켰던 것이다. 자상호의 장례식에서 친구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아, 상호여! 아, 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계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구나!” 「대종사」 『낭송장자』

 

 

 

4. 삶과 죽음이 공동체에 들어오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돌보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그들의 돌봄 현실과 부모님의 죽음을 겪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나이 드는 만큼 부모님들도 함께 늙어가셨다. 가벼운 시술이 있는가 하면 심각한 질병진단까지 여러 경우가 있었다. 친구가 병원과 집을 오가며 부모님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내어 공동체에 나오기라도 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한 친구는 어머님의 죽음을 맞아 깨달은 바를 글로 써서 우리와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양생으로서의 삶과 죽음이 공동체 일상에 또 다른 관심사로 떠올랐다. 함께 공부한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겪게 된 변화 중의 하나였다.

 

  「양생주」에서 죽음은 인간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진인은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그 변화에 순응했다. 진인의 그런 경지는 우리에겐 너무나 멀었지만, 어쨌거나 공동체에서 늙음과 죽음에 관한 여러 경우를 보게 되었다. 병세가 좀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쁘고, 점점 더 악화된다는 소식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결국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장례까지 치르게 되면, 그것이 곧 나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실감이 되곤 했다. 실제로 한 친구의 어머님이 가벼운 증세로 알고 입원을 하셨는데, 점점 상태가 심각해져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친구는 너무나 황망했던 와중에도 그동안 공동체에서 들었던 죽음의 이야기들이 의지가 되었다고 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공동체 일상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변화는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고향에서 홀로 사시며 날로 연로해지는 어머니의 변화에 대해 형제들이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노여웠다. 하지만 친구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을 좀 더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라면 나라고 피해갈 수 없을 테니까, 형제들보다 좀 더 일찍 겪게 될 따름이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지금만큼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보내다가, 이보다 더 심각해지면 그때 형제들과 함께 감당하기 시작해도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까이서 나누는 공동체의 일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변화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삶도 죽음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양생은 그 변화를 향한 끝없는 정진이다.

 

 

댓글 3
  • 2023-12-11 12:47

    좋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3-12-11 13:32

    삶과 죽음도 자연으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제게도 필요하고, 또 찾아오겠네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12-12 00:19

    잘 읽었어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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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2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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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8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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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49
봄날의 주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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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6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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