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 예술 6회]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2023-11-30 22:22
392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기르던 것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일부러 나무를 작게 만드는 여러 방법이 만들어졌다. 철사로 줄기를 꽁꽁 싸매거나, 일부러 거름을 주지 않거나, 광합성을 하지 못하도록 잎과 가지를 잘라내기도 하는데, 분재를 만들수 있는 수종도 연구되고 있고 섬세하게 가지치기를 하기 위해 분재만을 위한 가위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 행위가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분재만의 매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분재는 엄연한 하나의 장르(!)다. 그 형태가 아름다울수록 귀중하게 여겨지고 때로는 예술작품처럼 비싸게 거래도 되고 있다.  

 

藝의 갑골문

 

  분재의 작고 정돈된 모습과 그 취급을 생각해 보면 ‘예술’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재주는 작은 나무를 길러내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을 것 같다. 藝의 갑골문이 나무가 아니라 농작물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식량이 중요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식물을 길러 원하는 곳에서 싹을 틔우고, 더 큰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게 만들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재주였을 것이다. 이제 막 농경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에 이런 재주야 말로 가장 많은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 작물마다 농사법이 모두 다르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시대에 작물을 기르는 법을 안다는 것은 실용적인 기술보다는 경이로운 능력이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더 좋게, 혹은 원하는대로 식물을 기를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예술이 시작되었다.

 

 

 

3. 術, 능력을 발산하는 수단과 방법

 

  그렇다면 術은 무엇일까? 術은  行(다닐 행)과 朮(차조, 옥수수 출)이 합쳐진 글자다. 원래는 行이 사거리를 의미하는 문자여서 길가의 옥수수밭를 가리키는 글자라고 하는데 이 옥수수를 의미하는 한자(秫)를 따로 만들고 기존의 문자는 行의 의미가 더 발전되어 수단과 방법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術의 갑골문을 보면 오른손을 의미하는 又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갑골문의 형상이 옥수수朮인지, 손又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주들이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글자를 보면 아예 말도 안되는 발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術에서 알아야 하는 건 그것이 손이든 무엇이든 움직이고 조작하며 무언가를 다루는 ‘기술’을 의미하는 문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術을 사용하게 되면 단순한 능력이나 재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갖춘 ‘기술’이 된다. 나무를 조그맣게 만드는 분재도, 더 많은 수확물을 위해 밭을 일구는 농사일도 ‘예술’이었다니! 식물을 기르는 능력이 고대의 예술이라면 오늘날의 예술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이라고 인 것 같다. 그 기술이 탁월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예술적인 감동’이라고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이상 예술이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pastedGraphic.png

 術의 갑골문

 

 又의 갑골문

 

 

  <한문이 예술>에는 藝術과 함께 禮術이라는 의미도 함께 있다. 禮는 예절, 예의에 사용되는 한자로, 禮術에 대한 수업은 함께 동양고전을 공부하던 고은이 맡았다. 고은은 나보다 먼저 동양고전을 공부한 친구이자 동료였는데 오랫동안 예절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지키는 기술이라고 얘기해왔다. 예절에도 기술이 필요한 걸까? 나도 고은과 몇년간 함께 동양고전을 공부해왔지만 하지만 禮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禮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요구하거나 지켜야하는 규율이나 태도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의를 차리는데 어떤 기술이 필요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 이 다닐 행은 길 도道와 비슷해 보이지만 행은 행동으로 옮기는 의미에 더 가깝고 도는 길, 방법, 이치에 더 가깝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한자 모두 ‘길’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4. 禮, 관계의 기술이자 생존의 기술

 

 예도 례(예)는 문자 자체가 추수한 곡식을 가득 담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禮에서 만들어졌다. 큰집이었던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제사를 준비해와서 그런지 한자만 봐도 명절에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연상됐다. 우리 집은 제사에 엄격한 편은 아니어서 몰랐지만 생각보다도 제사 때문에 많은 갈등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인 제사의 취지는 무엇이었을까? 중국고대사회에서는 제사祭祀를 군사軍事와 비교하며 “군사는 유형의 전투이고 제사는 무형의 전투**”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둘 다 안위를 추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전투가 물리적인 무력을 사용해 다른 이와 싸워 생존의 안전을 구하고자 했던 일이라면, 제사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을 빌어 싸움을 피하거나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고자 노력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왕조가 바뀔 만큼 수없는 전쟁의 기록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전쟁은 시간과 자원같이 유한함이 있는 반면 제사는 형체가 없는 영적인 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대한 일로 여겨졌다. 제사 사祀는 중국의 상나라에서 1년 중 가장 마지막에 지내는 제사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동시에 1년 자체를 뜻하는 한자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전쟁보다도 더 긴장감있는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손을 쓰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정성을 쏟아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으니 고대 사람들에게 제사는 ‘전투에 임하는 엄중함’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였을 것이다.

 

지난 추석, 우리집은 차례주로 청주 대신 와인을 올렸다. 

 

 

  이런 ‘영적인 힘’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고 여기는데서 일어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이 제의를 치르던 것이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고대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바람, 구름, 비, 천둥, 돌, 강, 나무, 동물, 그리고 죽은 이들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신령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보다 행동이 중요한 오늘날에는 이런 시각을 몰이해로 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고대사람들이 갖고 있는 영적인 힘, 그 근본에는 인간보다도 자연계를 높이는 섬김의 자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기에 모르는 것을 섬기며 받아들이고,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의를 통해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섬기는 것은 평화를 추구하는 관계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허진웅 씀, 공희 옮김, 동문선,532쪽)

 

 

 

5. 우리는 동양고전을 통해 무엇을 기를 수 있을까?

 

  예술禮術 수업을 맡은 고은은 아이들과 사서삼경이나 논어같이 동양고전에서 이야기하는 관계와 생활 속 태도를 전했다. 왜 동양고전이었을까? 한자가 사용된 텍스트여서? 그것이 유일한 이유였다면 우리 수업에서 예술禮術수업은 없었을 것이다.

 

見善從之知過必改 친구의 장점을 보면 따르고 나의 단점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行勿慢步 坐勿倚身 걸을 때 흐느적거리지 말고, 앉을 때 몸을 기대지 마라.

作事謀始 出言顧行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히 하고, 말을 할 때는 행동을 돌아보아라 

(사자소학에서)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가 말했다. "훌륭한 질문이로다! 예란 사치하는 것이 검소함만 못하고, 장례는 주도면밀하게 잘하는 것이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만 못하다."

(논어, 팔일에서)

 

  고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대 사람들이 관계에 대해서 얼마나 섬세하게 살폈는지를 알 수 있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라거나, 똑바로 걸으라거나, 절약하라거나… 때로는 그 내용이 사소하고 너무 당연해서 고리타분한 말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곧 마음을 다하는 태도였다. 마음은 곧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제사는 곧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는 행위였다. 

 

  하지만 영적인 힘의 영향력이 많이 적어진 오늘날***에 국가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제사의 효용성을 돌이키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생존은 고대와 같은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생존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생존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주변과 관계를 맺고 이에 따르는 행동을 해야하며 상대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신뢰를 얻는다. 관계를 맺는 것은 오늘날 여전히 생존의 방식이 된다. 고은이가 예를 관계를 맺는 기술이라고 했던 건 규칙과 규범으로 정해지지 않는 오늘날의 생존의 방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예술이 더이상 식물을 기르는 능력이 아니라 요리, 음악, 미술, 문학같이 여러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니 예禮도 그만큼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르친 예술禮術을 ‘관계를 기르는 기술’이라고 하면 어떨까? 관계를 맺는 다양한 기술을 고민해본다면 익절과 손절만 남은 오늘날의 관계에서 다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실제’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거나 신령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고대에 제사는 제사를 치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따랐지만 오늘날에는 더이상 제사가 국가를 지탱하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사를 치르기 위한 여러 노동이나 제도, 문화같은 것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향력이 적어졌다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이야기한다. 

 

 

댓글 6
  • 2023-12-02 17:28

    禮-術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계의 기술'이라고 하니 또 그런 듯^^
    2024년의 '한문이 예술' 프로그램이 기대 됩니다

  • 2023-12-04 13:42

    아, 그렇군요! <한문이 예술>에 이렇게 복합적인 의미가 숨어 있을 줄이야!

  • 2023-12-05 12:26

    차례주로 와인이라ᆢ 넘 괜찮은데요^^

  • 2023-12-06 09:20

    '익절'이라는 말도 있어요?

    • 2023-12-06 21:54

      손절은 ‘손해보고 끊어낸다’고 익절은 ‘이익보고 끊어낸다’에요 ㅋㅋㅋ

  • 2023-12-07 15:14

    藝術과 禮術... 재밌네요^^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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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3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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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6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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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 | 조회 16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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