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우현
2023-11-21 16:57
229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

– 『세대 감각』 리뷰

 

 

 작년부터 ‘MZ’, ‘MZ하다’라는 표현이 유행 중이다. ‘MZ’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Z세대’의 합성어다. 대략 40대부터 10대까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이 표현은 각 세대를 구분하는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반면 그 기원이나 의미에 반해 이 표현의 사용처는 명확한 편이다. ‘항공 샷’(광각카메라로 높은 위치에서 수직 각도로 ‘셀카’를 찍는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던가, ‘탕후루’를 사 먹는 등, 소위 ‘어른’들(여기서의 어른은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포함할 수 있으며, 특정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 요즘 젊은이들을 타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탕후루’나 ‘항공샷’ 자체를 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행하는 것을 여과 없이 따라 하는 젊은 세대들을 비꼬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그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은 사실 낯설지 않다. 사회성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잼민이’, 반대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 밈(MEME)이나 유행이 빠르게 생산되고 없어지는 인터넷 세상에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MZ하다’는 말은 다른 표현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 속한다.

 특정 세대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한탄은 19세기에도, 16세기에도, 심지어는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존재해 왔다.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갈수록 젊은 세대들의 명철함이 떨어진다며 한탄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태어난 세대를 기반으로 사회를 분석하려는 ‘세대적 사고’는 주로 특정 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만들고, 지나친 일반화와 각종 오해들을 낳는다.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세대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날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대적 사고를 폐기하고 나이에 따른 구분을 멈추어야 할까? 그럼에도 세대적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세대 갈등은 언제나 있어왔다

 인구학자 노먼 라이더는 세대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인구학적 신진대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사회는 변화가 불가피한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고 전임자가 지속적으로 철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끝없는 야만인의 침략’의 의해 두 진영 사이의 문화적 긴장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연구들과 발굴되는 기록들을 토대로 사회에서의 세대 갈등은 필연적이고,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야만인의 침략’과 함께 발생하는 도덕적 공황 상태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이 등장하기 거의 한 세기 전인 1906년에는 “싸구려 소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또한 지금의 MZ세대들에 대한 비판처럼, 20년 전에는 밀레니얼 세대들도 나약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비판을 똑같이 받았었다. 그런 걸 보면 역사적으로 ‘새로운 젊은이’들과 ‘보수적인 어른들’의 갈등은 항상 있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은 각 세대들의 특수성을 지운 채 오늘날의 세대 갈등을 그저 역사의 반복으로만 치부하게 된다. 이에 『세대 감각』의 저자 바비 더피는 보다 유연한 세대적 사고를 위해 세 가지 영향을 구분하여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시대적 영향’으로, 전염병이나 전쟁 같은 큰 사건들을 통해 영향을 받은 세대의 분위기를 말한다. 두 번째는 ‘코호트(cohort)적 영향’이다. 이는 각 세대들의 조건에서부터 형성된 태도, 신념, 행동의 영향을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하는 환경과 신체조건 등을 설명하는 ‘생애 주기적 영향’이 있다. 더피는 이 세 가지 영향을 토대로 자산, 주거, 건강, 문화, 정치, 사생활 등 다양한 방면에서 오늘날의 세대 갈등이 왜 심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짚는다.

 

‘절망’의 세대

 그렇다면 MZ세대만의 특성은 무엇일까? 책에서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거친 분석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점은 더 이상 세대의 진보가 생활 수준의 진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자산은 갈수록 줄고, 주거 환경 또한 안 좋아지고 있다. 유럽의 한 기관에서는 1945년 이전에 출생한 ‘전쟁 전 세대’와 1945~65년에 출생한 ‘베이비 부머’, 1966년~79년에 출생한 ‘X세대’,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 총 네 개의 코호트를 대상으로 평균 실질 가처분 소득(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주거비를 공제한 소득)을 비교했다. 그들이 30대였을 때, 40대였을 때, 60세였을 때 각각의 소득을 비교한 결과 세대가 내려갈수록 소득은 계속 감소했다. 이 밖에도 더피는 주거나 행복지수에 대한 통계, 교육 수준과 의료 수준은 높아지는 반면에 노동 환경과 수익은 줄어들었다는 통계 등 다양한 자료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급의 편차는 커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해석을 이끌어 냈다.

 그에 따라 미국 젊은 세대들의 자살률은 꾸준히 증가했다. 1990년대부터 2017년까지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들의 자살률은 약 3배가 증가해 왔다. 반면 대학을 졸업한 백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각 코호트들의 상황이 시대를 거듭할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5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보다 6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가 자살,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률이 50퍼센트 높았고, 70년대에 출생한 코호트는 60년대 출생한 코호트보다 다시 두 배가 높았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이 현상을 ‘절망의 죽음’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20세기에 일어난 건강과 생활수준에서의 진보는 세기말까지 계속됐다. 사람들은 진보가 계속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갖게 되었고 그들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자녀들의 삶에도 진보라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그뿐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래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 꾸준하게 오래 지속된 나머지 미래 세대가 현 세대보다 더 잘 살 것이라는 전망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세대 감각』, 바비 더피, 어크로스, 153쪽

 

그러니까 세대 진보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금융위기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MZ세대를 ‘절망의 세대’라고 보고 있다.

 

소셜 미디어와 ‘세대 전쟁’

 하지만 유독 이런 절망의 분위기가 오늘날 MZ세대 전반의 분위기로 확산되고, 세대 격차에 따른 갈등이 가속화되는 원인은 다른 시대적 영향에 있다. 스마트 기기들의 등장과 소셜 미디어의 환경이 그것이다. 스마트폰은 전 세대에 걸쳐 빠르게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과거 산업혁명기의 발명들이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스마트폰이 세계적으로 채택되는 데에는 1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 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4명은 한 달 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반려견이나 파트너를 만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자료들은 스마트폰에 대한 현대인들의 애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미 스마트폰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스마트폰 보유 여부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사용에 있어서는 세대별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영국의 통신 규제 기관인 오프컴에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밀레니얼 세대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매주 평균 약 1500분(약 25시간)에 달했다. 그러나 X세대의 사용 시간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55세 이상의 집단은 다시 그 절반인 300분정도의 주간 사용시간을 보여주었다. 이는 스마트폰 자체는 대중화 되었지만, 스마트폰이 삶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코호트마다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소셜 미디어는 어떨까? 프랑스에서는 Z세대 10명 중 9명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반면 전쟁 전 세대는 7퍼센트, 베이비부머들은 19퍼센트 정도가 소셜 미디어를 사용했다. 젊은 세대와 나이든 사람들이 기술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실제 생활에서의 단절을 유발하는 핵심 원인이라고 더피는 보고 있다. 게다가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의 종류도 각각 다르다. 소셜 미디어는 각자가 개인과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정체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와 같은 네트워크를 공유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세대 별로 각각 다른 플랫폼을 이용하게 된다.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페이스북은 전쟁 전 세대와 베이비부머의 이용률이 가장 높은 앱이었고, 다른 앱에 비해 세대 간 사용 편차가 가장 적은 앱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스타그램은 Z세대의 70퍼센트, 밀레니얼 세대의 50퍼센트가 사용하고 있었고, 전쟁 전 세대는 1퍼센트, 베이비부머는 8퍼센트 정도만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세대 간 사용률의 편차가 두 번째로 큰 앱이었다.(참고로 제일 격차가 큰 앱은 미국의 인기 메신저 ‘스냅챗’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가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은 소셜 미디어가 세대 간의 차이를 ‘깨어 있음의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성평등, 동성애 등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깨어 있음’과 ‘뒤처짐’으로 구분 짓고, 미디어는 조회수를 위해 그게 곧 세대들의 특징인 것처럼 범주화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세대 갈등을 단순한 ‘인구학적 신진대사’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는 카카오스토리와 네이버 밴드의 사용률이 높아 주로 이 다섯 플랫폼의 통계를 비교한다.(출처 : 노컷뉴스)

 

 

타자화 :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 갈등을 MZ세대의 ‘절망’과 소셜 미디어가 엮이면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징조라고까지 봐야할까? 더피는 기본적으로 세대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세대 갈등에 관해 다방면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더피에겐 세대 갈등이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심화될 수 없다고 낙관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며, 언젠간 Z세대들도 ‘노인 세대’의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지원을 줄이고 젊은이들에게 집중하자는 식의 의견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노인 세대가 됐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게 하며, 극단적인 갈등의 상황을 억누른다. 가족과 유대를 떠올리며 다른 세대와도 유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피는 ‘인터넷 세계’와 각종 통계자료를 비교하면서, 인터넷에서 비춰지는 것만큼 세대 갈등이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1984년에 진행한 설문에서 ‘정부가 노인들에게 적절한 기준의 생활을 보장해 줄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90퍼센트 이상이 동의했다. 이는 2016년에 진행한 동일한 질문에도 결과가 같았으며, 세대별 격차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몇 년 전 팬데믹 시기에도 온라인상에서는 세대 갈등이 심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더 타임스>에 실린 한 젊은이의 편지처럼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며 노인 세대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며 낙관한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오늘 신문을 펴다가 81세가 되신 우리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 코로나19로 심각한 상황이 되면 호흡기를 떼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양식이 있는 결정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아직 수학 개인 지도를 하시고, 주민 협회를 운영하시고, 개들과 손주들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시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크리스마스 케익을 만드신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80세 이상 노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사회에 대한 그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애정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필요합니다.

『세대 감각』, 바비 더피, 어크로스, 331쪽

 

 더피에 따르면 오늘날의 문제는 꼭 세대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두드러지게 느끼는 문제는 문화의 파편화와 타자화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갈수록 빨라지는 기술 발전과 소셜 네트워크의 영향은 각 세대뿐 아니라 각 세대 안에서도 수많은 집단을 만들었다. 더 이상 대부분의 가족이 TV의 같은 채널을 보지 않으며, 50세를 넘긴 유재석은 마지막 ‘국민 MC’가 되었다. 이제는 각자의 핸드폰에서, 각자의 알고리즘으로 나타나는 그들만의 ‘국민 MC’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나와 다른 집단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화를 통한 혐오와 개인주의는 세대 갈등뿐 아니라 젠더 갈등, 계급 갈등, 동물권 갈등 등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파편화되고 있기에, 우리는 세대 간 유대의 사례를 보며 낙관할 게 아니라 더피의 말대로 ‘다방면으로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세대적 사고’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렇게 파편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더피가 짚었듯이 죽지 않은 한 우리는 모두 늙는다. 젠더 갈등, 동물권 갈등 등에서 요청하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상상력은 꼭 필요하지만, 신체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런 점에서 세대적 사고를 통한 필연적인 나이 듦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기 좋은 수단이 아닐까? 누구나 생애 주기적 공통 감각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절망이 아닌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댓글 1
  • 2023-11-23 09:37

    뭔가, 늙어가는 나와 더 사이좋게 지내보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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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11:13 | 조회 9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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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51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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