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행복 꼭 필요할까요

스르륵
2023-11-21 10:53
313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지겹게도 해시태그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라고 말이다.

 

 

 

 

긍정하라, 행복할지니

 

긍정심리학의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혁명적이고 참으로 유익한 이 작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더 많은 재단과 정부가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해한 ‘행복’이 『해피크라시』에서 비판적으로 전유되는 과정의 선두에는 무엇보다 ‘긍정심리학’이 있다. 일루즈의 설명에 따르면, ‘긍정심리학’이란 ‘인간의 긍정적 특징을 잘 이끌고 잠재력을 최대한 키울 수 있도록 도와 개인의 행복에 일조하게 한다는, 즉 긍정적 태도와 행복에 관련된 주제로 20세기 말 미국 심리학회(APA, 마틴 셀리그먼)에서 강력하게 부흥한 새로운 심리학 사조다. 긍정심리학이 기존의 심리학과 다른 점은, 전통적인 심리학이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 같은 인간의 ‘약점’에 집중했다면, 긍정심리학은 개인의 ‘강점’, 즉 지극히 긍정적인 심리와 감정 상태에만 초점을 맞춘다. 즉 고통치료 전략에 만족해선 안되고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제법 귀에 익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본주의심리학’,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존감 운동’, 그리고 21세기 ‘자조문화(self-help)’와 ‘심리 치유’를 생각나게 한다. 하여 긍정심리학은 이 연장선상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 마음의 밝은 면인 주관적 안녕감, 긍정적 감정, 진정성, 낙관주의, 회복 탄력성 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이고, 기분좋은 아우라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하여 문제는 긍정심리학의 이러한 빅픽쳐가 (일루즈가 보는 것처럼) 꼭 그렇게 나쁜 그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더 기분좋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 행복은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니라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라는데? 어차피 이데올로기란 것이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판타지를 생산해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긍정심리학의 이런 의도는 오히려 권장할 만하게 보인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이거 좋은거 아닌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탄생

일루즈에 의하면 긍정심리학의 ‘행복 프로젝트’는 창시 불과 몇 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고, 자아와 영성, 그리고 자기 개선 능력과 정신에 관련된 문제들에 도움을 줍니다’, ‘행복의 양은 측정 될 수 있습니다(공리주의는 실패했지만)’ 이 홍보에 이끌려 세계 곳곳의 학회가 신설되고, 국제적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행에 부응하려는 전 세계 언론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중은 물론 자신만의 꿍꿍이를 가슴에 품은 정치, 경제, 교육 등의 각 분야 주체들이 긍정심리학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심리적 행복의 복음은 인종적 분열, 사회적, 성적 격차로 피폐해진 사회에서 사회적 유대를 대체했다.

 

수 많은 사설기관과 공공기관들이 긍정심리학의 너그러운 돈줄과 주요 고객이 되어주었다. 코카콜라, 구글, 인텔, 포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제너럴 밀스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 내면을 탐험하며 심리적 실마리와 의지를 찾아내려는 노동자를 격려해주는 동시에 ‘생산성’ 향상의 기대를 품은 채 행복학과 손을 잡았다. 정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화폐단위로 측정되던 비용과 효율의 딱딱한 지표들을 ‘행복’이라는 유연한 지표 즉, ‘행복지수’, ‘웰빙지수’로 대체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민 생활의 지속적인 하락과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행복’을 말할 수 있기 위해, 혹은 국민이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만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의 시대를 열었고, ‘행복부’를 신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의 흐름은 의료계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다양한 질병과 부정적인 측면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기존 의료 매뉴얼에 대응해, 인간의 덕성과 강점만을 강조하고 분류하는 긍정심리학의 ‘정신건강메뉴얼’은 관련 업계는 물론 여러 방면으로 그 영향력이 퍼져나갔고, 교육계에서는 행복 개념에 기초한 학습프로그램들이 (예를 들어 영국 초등학교의 90%, 중등 교육 기관의 70%) 역량 증진과 감정관리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문화에서는 ‘비판’이나 ‘추론’보다 인맥과 경영에 더 치우치는 ‘기업가 정신’이 에 더 환영을 받았고, 17개국 수 천개의 학교가 국제긍정교육네트워크와 연결되어 긍정교육에 귀의했다.

‘긍정적인 정신 건강'에 기초한 자기 계발의 '코칭' 기법들은 스포츠과학, 디자인, 신경과학, 동물 복지, 인문학 등등 우리 일상의 전반을 아우르며 퍼져나갔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에 의거하여 유엔은 '세계 행복의 날(3월20일)'을 정했고, OECD는 각국의 공공정책에서 '웰빙지수' 선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행복과 웰빙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열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이제 행복은 자명하고 측정가능한 ‘선’이 되어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 힘써야 할 지고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고 일루즈는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행복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당위가 됨으로써 어떤 ‘특정한’ 좋은 삶을 행복으로 환원하여 읽어나갈 위험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은 ‘행복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역습

이제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스러움 그 자체도, 순박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위로도 아니며, 운명, 상황, 혹은 생의 무탈함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심리 상태들의 전체를 의미한다. 하여 ‘해피크라시‘란, 행복의 강박적 추구라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권'의 개념이자, 새로운 ‘지배적 전략’이자, 새로운 ‘정치적 의사결정’, 그리고 새로운 ‘경영방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어떤 ‘공격‘을 받으며 살게 된 건 아닐까?

자본주의와 긍정 이데올로기의 콜라보는 ‘노력하면 행복 할 수 있어’를 외친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얼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평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라’는 윤리적 금언들은 실은 알고 보면 국가와 기업들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신자유주의 경제의 불확실성과 공공 정책의 결함을 노동자 개인의 ‘긍정적인’ 내면에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실업률, 불평등과 차별, 소득의 재분배, 빈곤과 교육 등의 사회 구조적 문제는 쉴새없이 자신을 진단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이고 유연한’ 영수들의 어깨에 각자 도생의 책임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루즈는 묻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모든 상황에 앞선다는 말, 환경보다 자아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 시대가 어떻든 열쇠는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그 기분 좋았던 ‘아우라’는 어쩌면 노동을 ‘개인의 프로젝트’로 떠넘기고, 교육을 ‘개인의 재능과 자질’의 문제로 해석하고, 건강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변모시키면서, ‘사회적 진보’ 조차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어떤 문제라기보다 그저 ‘개인적 번영’의 문제로 환원시킨 자기 개선의 강박과 행복염려증의 주범이 아닐까.

하여 알고 보면 ‘긍정하라, 행복할지니’의 진정한 속내는 ‘노력하지 않는 너는 문제가 있어’다. ‘자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해피크라시에서는 ‘비정상인’이다. 그런데 자기 개선에 열심인 사람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이라는 의미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아의 불완전성이라는 환영에 끊임없이 시달리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영수들이 느낄 바로 이 ‘자아의 불완전성’은 기업들의 완벽한 챤스인 ‘셀링포인트’가 된다. 그러하기에 시장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완벽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행복학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강박의 정상화’, 즉 최선의 자기 만들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명령’이다.

하여 『해피크라시』를 읽으며. 왜 그토록 많은 기업들이 ‘긍정적 태도’를 중시했는지, 왜 교육 현장에서 수년전부터 ‘기업가 정신’ 프로젝트가 성황이었는지, 나는 솔로의 솔로들은 왜 행복과 긍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지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이 일루즈의 설명처럼,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철학의 개념들을 끌어와 급조한 ‘지극히 미국적인 신념’을 가짜 과학의 어법으로 다시 쓴 것일 뿐이라 해도, 또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행복학이 행복산업에 포획되어버린 ‘강박적’ 자기 계발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잠옷을 입고 출근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구글의 ‘긍정기업문화’가 여전히 멋있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우리 시대 ‘영수들’이 여전히 눈물겹다. 어렵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행복은 좀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기 전의 그 순간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로 바꿔 본다면 답이 좀 쉽지 않을까. 그리고 일루즈가 강조하는 것처럼, 행복의 ‘참다운’ 이미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최고의 자아’에 도달해야 할 의무같은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행복 이데올로기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부정값없이 긍정값으로만 홀로 구성될 수 없음도 상기한다면, ‘언제나 더 큰 행복이 필요하다’는 해피크라시의 거대한 유혹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걸까?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행복이 필요한 걸까. 행복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을 ‘자명하게’ 정의하고, 측정하고, 증명하고,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언제나 ‘어떤’ 희망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희망은 만들어지고 처방되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비판적인 분석’에 기초한 희망이다. 그리고 ‘사회 정의’에 기초한 희망인 동시에 ‘가부장적이지 않은 정치’에 기초한 희망일 것이다. 하여, 행복이란 것이 일루즈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정의’와 ‘앎’에 기초한 희망으로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맞다.

댓글 4
  • 2023-11-22 08:09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놈의 행복, 긍정, 힐링 타령...이주 지긋지긋하다싶었는데...제가 삐딱해서 그런것 만은 아니었군요. 헤헤

    • 2023-11-23 09:42

      오호...토토로의 댓글이 더 흥미롭군요. ㅎㅎ

      전...나카자와 신이치가 행복에 대해 설명한 게 늘 맘에 남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순수증여)가 내 인생에 난입(?! = happen) 순간,
      다시 말해 접신하는 순간!!

  • 2023-11-24 18:38

    최근에는 청년 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주제는 '자유'였는데, '자유는 주인의식이다', '자유는 (마음의) 평화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등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어떤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어떤 당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란 전제 위에서 논의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애초에 자유는 추구해야하는 무엇인걸까?'라는 질문이 작게 마음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어요. 마땅히 자유로우면 좋은 거 아닌가? 라는 결론 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요. 주제는 다르지만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생각이 깊어지네요...
    아직도 어떤 부분 때문에 턱턱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2023-11-26 11:51

      그러게요. 이런 자유 저도 궁금하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4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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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9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5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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