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박세당의 장자읽기

여울아
2023-11-13 02:13
211

박세당의 장자 읽기

『남화경주해산보』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절대자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장자철학을 살펴보았다. 시즌4에서는 조선 유학자 박세당의 “장자 읽기”를 통해 유학자들이 어떻게 금서였던 “장자”에 접근하고 해석했는지 “장자의 도”를 중심으로 도가철학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박세당은 누구인가

 

내가 박세당에 대해 관심을 둔 이유는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는 사극 <연인> 때문이다. 남우조연으로 나오는 남연준은 박세당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서 “수찬”이라는 관직을 수행했다는 점까지 닮아있다. 그러나 이후 이 둘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고 왕을 자문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가의 모든 편찬을 주관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한다. 드라마에서 남연준은 명과 주자학의 신봉자이자 의리와 지조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의 대표주자이다. 그러하기에 병자호란 당시 사절단(서장관)으로 청에 문안인사를 다녀오라는 인조의 명을 거절하고 투옥된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한가. 그는 32세에 등용되어 8년 여 간 관직생활을 지냈으며, 이때 수찬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쟁으로 자식을 잃자 수락산 자락으로 들어가 수차례 벼슬을 내리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은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등 각각의 해설서 『사변록』을 지었으며, 특히 『도덕경』과 『장자』의 해설서를 둘 다 지은 최초의 조선시대 유학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정2품을 지냈다. 비록 그는 이른 나이(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등용이 늦어졌으나 대대로 명망가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은둔생활 도중 그가 (1668년 혹은 1669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간 서장관의 자격으로 청의 수도 연경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청에 가기를 거부하고 투옥된 남연준과 은둔을 깨고 청에 다녀와 견문록 <서계연록>을 남긴 박세당. 그렇다면 이들의 행보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쇠퇴하고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등장하는 시기는 현종과 숙종 때의 일이다. 박세당은 현종 9년에 청에 다녀왔고, 십여 년 뒤 숙종 6년(1680년)에는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라는 장자 해설서를 주해했다.

 

8997918052_1.jpg *남화경은 장주의 존호이다

 

여기서 나는 『장자』에 대한 오해를 한 가지 짚고 싶다. 『장자』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금서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에게는, 소론파(친청) 박세당의 『남화경주해산보』가 이후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모름지기 금서란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통용되는 것이 국룰 아닐까? 그런데 『남화경주해산보』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지에 필사본뿐 만 아니라 현종 때 활자본까지 각각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장자』는 당시 금서가 아니라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장자』 간행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자. 조선시대 초기부터 조정은 『장자』를 간행하여 공식적으로 배포했다. 1425년 『세종실록』에는 문신들에게 『장자』를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40여년 뒤 세종은 『장자』뿐만 아니라 『주역』, 『노자』, 『열자』 등을 나누어주고 기한을 정해 다 읽게 했다고 한다. 역시 공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세종답다. 그는 기꺼이 금단의 선을 넘어 성리학뿐만 아니라 노장계열의 책들까지 신하들이 폭넓게 공부하도록 독려했던 것이 아닐까. 1474년(성종5년)에는 세종 때 사신들이 중국에서 구해온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를 동활자로 찍어 배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의 오해와 달리, 『장자』는 조선의 군주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선조, 효종과 같은 왕뿐만 아니라 노장을 이단이라 배척했던 노론파(송시열의 제자 한원진)에서도 장자 주해서를 낼 정도였다. 이 당시 독서록에는 “곽상, 여혜경, 초횡의 주가 전해지고 있지만 오직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와 박세당의 집주가 성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희일은 송대 정이 계열의 도학자로서 유학을 근본으로 도가와 불교를 해석해내고자 시도한 인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임희일을 유학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전통문화사 『장자』 서문 14p) 그러하기에 박세당은 조선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유학 안에서 장자의 언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1703년 박세당은 <사변록>에 담긴 주자학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던 도중 죽는다.

 

장자의 도는 절대자유가 아니라 대소지변(大小之辨)이다

 

지금 저 들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는 큰일을 할 수 있지만, 쥐를 잡지는 못한다. 지금 그대가 큰 나무가 있는데 그 쓸모없음을 걱정하니, 어찌 무하유(無何有) 고을, 광막 들판에다 심어놓고, 슬렁슬렁 그 곁에서 거닐거나 자유롭게 그 아래에 누워 놀거나 하지 아니하는가? (『박세당 장자읽기』 「소요유」 62p)

 

나무, 황야, 자연, 숲, 햇빛, 풍경, 가지, 옥외

 

『장자』 「소요유」편 마지막 에피소드는 무하유지향이다. 여기서 장자와 혜시는 쓸모없음에 대해 논쟁한다. 지난 1234에서 나는, 도가철학의 대가들이 이 장면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진고응은 대자유로, 유소감은 절대자유로 해석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할까? 먼저 장자가 혜시에게 무하유지향으로 응수한 까닭을 살펴보자. 이전 장면에서 혜시는 장자에게 “가죽나무는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장자는 들소가 작은 생쥐는 잡지 못하지만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대꾸함으로써 큰 것의 쓸모를 대변한다. 이에 대해 박세당은 배우는 자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장자에게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유하자면, 큰 것은 장자 자신이고 작은 것은 혜시라는 것. 그는 “쓸모없이 큰 사람(쓸모없음)이야말로 소요(무하유지향)를 즐기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작은 것보다 큰 것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 이는 앞서 붕새(큰새)가 작은 매미와 비둘기에게 비웃음을 받을 때,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남들에게는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다(絶異)”는 그의 주해와 일맥상통한다.

 

박세당은 「소요유」편 첫 번째 붕새우화에서부터 마지막 무하유지향까지 “큰 것과 작은 것의 분변(大小之辨)”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대소지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착된다. 하나는 크든 작든 모두 충분하다(자족하다)는 (곽상의)입장과 다른 하나는 큰 것의 가치를 지향하는 입장이다. 박세당은 요임금과 허유(고대 은자)의 에피소드에서 후자의 입장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뱁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지어도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생쥐가 황하 물을 마셔도 자기 배를 하나를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군주시여! 나는 천하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방 담당자가 비록 제사음식 마련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축관(祝官)이 제사상을 넘어가서 그의 일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박세당의 장자읽기』 「소요유」 42p~46p)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뱁새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생쥐는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천하가 필요 없다고 허유는 일축한다. 이에 대해 진고응은 『노장신론』에서 허유가 탐욕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224p). 이와 반대로 박세당은 오히려 허유가 자만하여 요임금보다 자신을 높이고 있다고 비난한다. 박세당에게 제사음식을 만드는 일은 “비천”하고 제사 축문을 읽는 일은 “존귀”한 일이다. 따라서 주방 담당자가 요리를 못한다고 해서 축관이 그를 대신해서 요리를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박세당은 이를 “가령 요임금이 천하를 잘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허유 자신은 대신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며, 허유가 요임금을 요리사로 낮추고, 자신을 축관으로 높인 것으로 해석했다. 진고응은 허유 편에 서서 세속적 인간들의 공명심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는데 비해, 박세당은 “덕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가의 대표성인 요임금의 뜻을 허유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박세당에게 장자는 “고원함이 지나쳐 방자한 사람”일 뿐이다. 이렇듯 박세당(큰 뜻)과 도가철학(대자유)은 큰 것을 지향하는 데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기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별의식(분별)은 어떻게 『제물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장자의 도는 만물제동이 아니라 이일분수이다

 

도는 무엇에 은폐되기에 진짜와 가짜가 있으며, 말은 무엇에 은폐되기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의논이 있는가? 도는 어디엔들 존재하지 않겠으며, 말은 어디에 존재한들 옳지 않겠는가? (『박세당 장자읽기』 「제물론」 94p)

 

박세당에게 시비분별의 원인은 도가 은(隱)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은폐(隱蔽)”라고 번역한 이유는 곽상이 주석에서 “은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도가 “숨어있다”, “은폐되어있다”라는 해석의 시초는 후한시대 대학자 정현의 『예기』로부터이다.(『친절한 강의 중용』 북드라망 우응순 106p) 그는 君子之道, 費而隱(군자지도 비이은)을 “도가 어긋나면(費) 숨겨진다(隱)”고 풀이했다. 이와 달리 주희는 『중용』 12장에서 “도의 쓰임은 일상에 퍼져있지만, 도의 본체는 은미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고 풀이했다. 정현과 주희의 차이는 무얼까? 정현은 도가 어떤 이유로 인해 잘 은폐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주희는 도가 그 자체로 파악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이라고 해석했다. 박세당의 “費”주해는 “도가 어디에 간들 없는 데가 없다(道無所往而不存)”고 함으로써 주희의 해석을 따르고 있지만, “隱”주해는 번역자가 곽상의 “은폐”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주고 있다. 여기서 『장자』의 원문은 “도가 무엇으로 인해 은폐되는 것”을 강조하는 정현의 주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박세당의 입장은 “도의 본체는 그 자체로 오묘하여 알 수 없다”는 주희의 해석에 가깝다.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저자 김시천은 이렇듯 곳곳에서 성리학의 기본 개념들이 『장자』로부터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주자가 『장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못했으며, 특히 박세당이 성리학의 태극, 체용론, 이기론 등에 영향을 받아 『장자』를 풀이했다고 평가한다.(167p) 나는 박세당의 주해를 다음과 같이 읽고 싶다. “도는 어디든 있지만 그 본체를 파악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 옮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생겨난다.”

 

박세당은 배우는 자의 길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루기 힘든 큰 것보다는 쉽게 이룰 수 있는 작은 것(小成)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지(小知)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지에 눈이 가려져 도를 잃게 된다. 이렇듯 시비논쟁에 휘말리게 되면 이 둘이 하나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대소지분 때문에 시비논쟁이 시작된다는 주장과 달리, 박세당은 오히려 대소지분의 도가 제물론의 ‘시비 없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빗방울, 시트, 무당벌레, 물방울, 이 슬, 이슬 방울, 비말, 곤충

 

옳다는 것을 옳다고 해주고 옳지 않다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해준다.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이다...(중략) 사물은 본래 그러한 바가 있고 사물은 본래 옳은 바가 있다. 무슨 사물이든 그렇지 않은 사물이 없고 무슨 사물이든 옳지 않은 사물이 없다.(『박세당 장자읽기』 「제물론」 107p)

 

박세당은 만물제동(萬物齊同)이 아니라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견해이다. 김시천은 만물제동이 오늘날의 “만물 평등”이라는 뜻에 가까운 거라면 이일분수는 ‘하나의 이치’를 지향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박세당의 해석이 임희일의 입장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171p) 그럼에도 박세당은 왜 임희일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성리학의 이일분수 개념을 여기에서 연결시켰을까? “날개 달린 놈은 날아다녀야 맞고(然), 발굽 있는 놈은 달리는 것이 맞다(然). 그는 이들이 맞다고 하는 바에 대해 맞다고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맞지 않다고(不然)하는 바에 맞지 않다고(不然) 응해준다. 이렇듯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옳은 것이 사물에 본성(본정)이다. 그의 입장에서 맞지 않은 것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는 모두 하늘의 이치(天理)이기 때문이다.” 이일분수란 이렇듯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지만 이치는 하나라는 것. 따라서 그는 이 하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알면 시비논쟁이 사라지고(시비 없음) 도가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만물은 모두 같지 않다. 서로 다양한 생김새와 본성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에게 ‘생명의 정수(精髓)’는 오직 하나라는 것, 이것이 제물론에 대한 박세당의 해석이다. 만물제동을 주장하는 도가철학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무언가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는 방식의 유가해석을 비판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시비논쟁으로 이어진다는 입장이다. 

 

...................................

 

도가철학의 『장자』를 만났을 때와 달리, 나는 박세당의 『장자』가 낯설지 않아서 당황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토록 조선시대 유학자 박세당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는 『장자』를 읽기 전 먼저 『사서』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쌤을 통해 『장자』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작년 <장자세미나>에서 나는 왜 장자 철학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의문은 유학자들 또한 장자를 읽는 문제의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사기』의 장자 해석과는 거리를 두고, 『장자』의 “일상성”에 주목함으로써 『장자』를 정치적으로 읽어내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나의 책 읽기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 체화된 '장자의 유학화'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앞으로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도가철학이면 어떻고 유학자의 시선이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나는 학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대학원생도 아닐뿐더러, 누구도 내게 학문적 정밀함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올 한해 1234를 통해 나는 『장자』 「소요유」편의 주제를 자유라거나 혹은 대지(大知)라고 말할 때 그 자장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장자』를 읽을 때마다 맥을 잡지 못했던 이유. 가령 「소요유」편은 도가철학으로 읽고, 「양생주」편은 유학 안에서 읽을 때 발생하는 모순을 나의 언어로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장자』를 만나는 것이 나의 숙제이다.

 

댓글 1
  • 2023-11-14 15:22

    뱁새와 생쥐 역시 천하로군요!
    이이불이, 서로 다른 둘은 둘이 아닌 것인가요?
    역시 장자가 새삼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동은
2024.05.14 | 조회 143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기린
2024.05.10 | 조회 20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91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7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8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