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2회] 풍지관(風地觀), 잘 보면 알게 된다

봄날
2023-11-12 22:34
225

다섯 달 동안 주역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발표회를 치렀다. 준비하면서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에세이를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퍼포먼스나 전시같은 형식을 택했다. 나도 몇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민화를 이용해 주역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8개의 소성괘를 민화기법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민화로 주역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민화 작품이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태극모양이거나 3획의 검은색 막대그림은 주역을 아는 사람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8개의 소성괘가 가진 물상을 그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말로 소성괘의 물상을 제대로 그려보리라는 욕심도 생겼다.

 

하늘, 땅, 연못, 번개(우레), 불, 물, 산, 바람의 물상을 가진 소성괘를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늘을 그냥 파랗게, 땅을 그냥 황토색으로 칠하는 것은 소성괘를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산, 번개 등을 형상화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기체의 움직임 자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불거나 멈추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발생과 소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형체없는 자연물의 형상화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다가 마침 손괘에 배속된 자연물에 나무도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무에 이는 바람’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람을 다시 보게 됐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공기의 흔들림으로, 내 피부에 닿는 감각으로 바람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분명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인식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바람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왜 풍지관괘(風地觀卦)를 ‘주역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참된 인식의 과정, 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관(觀)이라는 글자는 자세히 보다, 보이다, 나타내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 등등의 뜻을 가진다. 이런 뜻을 가진 글자가 관(觀) 하나만은 아니다. 볼 견(見)자도 있고, 나타낸다는 뜻의 보일 시(示)자도 있다. 하지만 관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꿰뚫어본다는 뜻을 포괄한다. 이른 바 통찰(通察)을 뜻하는 글자가 바로 관이다. 괘명은 그 괘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므로 관괘는 본격적인 ‘통찰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괘이다.

 

풍지관괘의 물상은 ‘땅 위에 부는 바람’이다. 상괘가 바람이고 하괘가 땅이니, 땅위의 모든 사물을 바람이 훑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혹자는 이 바람이 천둥과 비를 동반하는 태풍같은 바람이라고 해석하지만 나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때의 바람이, 땅위의 사물을 찬찬히 스캔하듯 훑고 지나가는 산들바람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단전에서는 이때의 ‘봄(觀)’을 대관(大觀), 즉 크고 넓게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동시에, 시야를 넓혀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소성괘의 성질을 가지고도 괘의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데, 대관할 수 있는 것은 상괘, 즉 윗사람이 공손함의 덕을 가진 손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를 조망하는 대관(大觀)과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내면을 비우는 자세는 참된 인식과정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크게 보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려니와 자신을 낮추라는 것도 너무 추상적이다. 관괘의 괘사에 매우 구체적인 힌트가 있다.

 

“관은 (제사를 위한) 손을 씻고 (제사를 위한) 음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니, 믿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듯 보리라(觀 盥而不薦 有孚 顒若)”

 

관괘는 아래에 있는 네 개의 음효가 위의 두 개의 양효를 우러러보는 형태를 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양효가 제사를 지내는 주체라고 생각하고 괘사를 풀어보자. 관이불영의 관(盥)은 제사를 앞두고 손을 씻고 제주(祭酒)를 땅에 부어 신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천(薦)은 제사음식을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사를 위해서 손을 씻었는데, 정작 제사음식은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괘사를 이해하려면 행해지는 ‘일’보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변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이천은 변하는 요체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즉, 제사를 올리기 전에는 오로지 제사를 통해 하늘에 간절히 소망하고 정성들일 것만 생각하는데, 막상 제사과정을 따라 절을 하고 음식을 올리다 보면 과정의 번다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처음 손을 씻을 때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제사가 많이 간소화되고 각자의 집안에 맞게 제사를 치른다. 그러나 그 형식과 마음가짐의 관계는 똑같다. 제사를 위해 가족이 모이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사를 지내려는 마음이 희석되고, 제사의 절차나 음식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오가다 보면 제사를 앞두었을 때의 마음가짐과는 딴판으로 흐를 수 있다. 관괘의 괘사가 실제 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그저 비유일 뿐, 어떤 일이건 시작 전의 마음가짐과 진행되는 과정의 그것이 일관되는지가 중요하다.

 

요컨대 사람들이 보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다. 괘사의 뒷부분 유부옹약(有孚顒若)은 구오가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임함으로써 드러나는 결과 혹은 효능이다. 옹(顒)은 ‘우러러본다’라는 뜻의 글자로, 구오의 마음가짐만으로도 사람들이 감화되는 모양이다. 구오의 역할은 하늘을 보고 자연, 즉 천지가 운행하는 이치를 봐서 안 다음, 아래로 굽어보고 백성들을 (바람처럼) 살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래의 네 음효들은 구오를 우러러보고 그것을 믿고 따른다. 제사과정을 말했을 뿐인데, 관괘는 우주의 운행원리를 인간사회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앎을 이끄는 여러 개의 시선

그러고 보면 관괘의 괘사와 효사에는, 상대로 하여금 앎에 이르게 하는 ‘보여줌’과 스스로의 앎에 다다르는 ‘봄’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사에서는 이렇게 앎으로 귀결되는 여러 개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각 효의 관(觀)은 ‘보는 사람’이다. 아래 네 음효의 시선은 모두 구오를 향한다. 하지만 각 효가 가진 기질이나 상황에 따라 그 봄은 때로는 능력의 모자람이나, 부분적인 것을 전체인 것처럼 아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령 초육의 효사는 “어린아이가 보는 것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지만, 군자는 부끄럽다(初六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인데, 이 동관(童觀)은 보고 듣는 것이 아직 많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 육이에는 규관(闚觀)이 등장한다(六二 闚觀 利女貞). 이것은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처음이자 끝인 것처럼 아는 것, 즉 부분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육이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것을 파악하는 것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편 네 음효의 제일 위에 있는 육사는 구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존재로서 바야흐로 구오의 신임을 받아 중요한 역할을 할 존재이다. 왜냐 하면 육사는 다른 음효들과 달리 구오가 이루어낸 업적을 제대로 판단하고 그와 함께 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육사의 효사는 “육사는 나라의 빛을 봄이니, 왕에게 손님대접을 받음이 이롭다(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이다. 왕에게 손님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국사를 다루는 중요한 자리에 등용된다는 뜻이다. 육사는 구오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오가 이루어놓은 그 나라의 빛, 즉 문화의 찬란함을 제대로 본다. 관국지광은 현대의 ‘관광’의 출처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관광은 그 뜻이 아주 협소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광은 보는 것, 소비하는 것에 치중해서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의 역사나 문화, 예술 등을 깊게 살피는 것에 소홀해졌으니 아쉽기만 하다.

 

참된 인식은 나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구오와 육삼의 효사에 등장하는 관아생(觀我生)이 그것이다. ‘나의 생김을 본다’ ‘혹은 내가 낳은 것을 본다’로 해석하는 이 관아생은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관아생은 나를 본다는 것이다. 육삼의 관아생(六三 觀我生 進退)은 자신의 생김을 봄으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또 구오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대번에 군자의 앎에 이르는 존재이다(九五 觀我生 君子无咎). 요컨대 스스로를 보는 것은 참된 지혜를 얻는 첩경으로서, 관괘가 말하려는 ‘참된 인식’을 위한 성찰의 방식이다.

 

민화를 그리면서 바람을 다시 보게 되었듯, 관괘를 들여다보며 ‘과연 제대로 보고,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과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보고 있을까 자문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표면적인 ‘봄’에 치우쳐서 통찰적 시각을 얻지 못한다.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어리석은 동관(童觀)이나, 부분적이고 치우친 앎인 규관(闚觀)에 머무르는 때가 많을 것이다.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관아생(觀我生)없이 관괘의 괘사가 말하는 ‘눈을 들어 천지의 도를 보고 아래를 굽어살펴 사람들에게 베푸는’ 군자의 통찰지를 얻기는 힘들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것이 절대 오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관괘를 통해 주역은 어린 아이의 봄에서 자기 지평안에서의 봄으로, 나라의 빛을 봄으로 인식의 역량을 키워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시선을 나에게 집중하고 다시 군자되기에 도전!

 

댓글 1
  • 2023-11-15 09:38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봄날님. 소성괘 8괘의 상을 그린 민화, 깜짝 놀랬더랬어요 ㅎㅎ
    관괘는 위정자들이 민초들을 살피는 괘로 많이 해석되죠.
    봄날샘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에 더 많이 비중을 두고 해석하셨네요.
    봄날샘의 군자되기 도전! 응원합니다^^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느끼는...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느끼는...
동은
11:13 | 조회 9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기린
2024.05.10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51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8
글쓰기